2004년 8월호

동북아시아의 원형을 찾아라! 두 권의 동양신화

  • 글: 이권우/도서평론가 lkw1015@hanmail.net

    입력2004-07-30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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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아시아의 원형을 찾아라! 두 권의 동양신화

    ‘김선자의 중국신화 이야기’ 아카넷/352쪽/1만4500원<br>‘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황금부엉이/360쪽/1만2800원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게다가 말은 오죽 잘하나. 비평가적 시각에서 가장 ‘육질’이 좋은 곳만 가려낸 다음, 갖은 양념을 쳐 설명하기 시작하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책과 관련해 라디오방송에 출연할 때는 주변사람들한테 엄청 욕을 먹었다. 방송을 듣고 꼭 읽어야 할 것 같아 책을 샀는데, 책장을 덮을 때면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책이 다른 건 당연하다. 내가 언제 누구나 읽을 만한 책이라고 했던가. 내가 읽어보았더니 정말 좋더라고 했지.

    이번에도 나는 입단속을 하지 못했다. 한달 간격으로 나온 두 권의 책-‘김선자의 중국신화 이야기’와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을 읽고, 만나는 사람마다 입에 침을 튀기며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유익한지 모른다고 떠벌렸으니까. 그 방정맞은 입 때문에 엉뚱하게 화가 미쳤다. 그렇게 재미있으면 원고를 쓰란다.

    이 개명 천지에 그리스 귀신들이 나타나 한창 굿판을 벌이고 떠난 자리에 동양의 신들이 들어서고 있다. 정말 반갑고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길 고대한 것은, 그리스 신화 열풍이 불어닥칠 때부터였다. 서양문명권의 탯줄이 그리스 신화에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서양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 신화를 알아야 한다.

    물론 신화읽기의 목적이 문화의 원형을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실 신화는 기원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이 어떻게 비롯됐는가를 신화는 말해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고대인의 상상세계를 엿보게 되며, 우주와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었던 총체성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신화를 읽다 보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에 새삼 동의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삶도 신화에는 이미 예언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 열풍이 불어닥칠 적에 더더욱 목이 말랐다. 서구문명의 원형에는 그토록 열광하면서 왜 동북아시아의 원형에는 그토록 관심이 없는지 부아가 솟았던 것이다.

    상상력의 제국주의화 우려



    목 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물어본 사람이 대답을 해보면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터다. 먼저 그만큼 우리가 서구 추수(追隨)적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제 문화를 비하하고 남의 것을 높이는 삶에 익숙해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 신화는 물론 동북아 신화의 세계를,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줄 만한 전문가가 없었다는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시름 놓게 되었다. 김선자와 정재서라는 내공 있는 중국신화학자들이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잇따라 펴냈기 때문이다. 만시지탄이나 정재서의 말대로, 상상력의 제국주의화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게 됐다.

    이쯤 되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독자가 있으리라. 듣자 하니 중국신화 해설서가 나왔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 같은데, 이들 책도 결국 남의 것 아니냐고 말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나, 더 알게 되면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알다시피 중국은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다. 고대부터 여러 민족이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 다투며 살아왔다. 그러기에 중국신화는 한족(漢族)만의 신화가 아니라 동북아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여러 민족이 공유하는 신화다. 중국신화의 내용이 우리 신화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거나, 신들의 전쟁에서 패한 신이 남방민족의 시조신으로 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신화가 동북아시아의 신화임을 알 수 있는 한 예를 정재서의 책에서 가려 뽑아 설명하면 이렇다.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의 한이 배어 있던 형무소가 서대문 어름에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여기에는 동북아 특유의 방위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여신 서왕모(西王母)는 중국의 서쪽 끝 곤륜산에 살았다고 한다. 이 여신은 하늘에서 내리는 재앙이나 돌림병 같은 일과 함께 형벌을 관장했다. 서왕모가 이 같은 일을 떠맡은 것은 서쪽이 지니는 상징성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해가 지는 서쪽을 어둠과 죽음의 땅이라 여겼다. 조선시대 한양의 서쪽에는 고태골이라는 처형장이 있었다. 그래서 ‘고태골로 간다’는 말에서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는 말이 나왔다.

    여신의 위상 복원

    김선자와 정재서의 책을 읽으며, 나는 느닷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긴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앎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한꺼번에 얻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중국신화 전문가로 호가 난 인물들이고, 각기 중국신화에 관한 주요한 책을 번역한 경력이 있는 데다, ‘중국신화의 이해’라는 책을 같이 쓰기도 했다. 김선자의 책을 읽고 나서 정재서의 책을 읽었는데, 여성학자와 남성학자가 각기 중국신화 해설서를 썼으니 말 그대로 자웅(雌雄)을 겨루는 꼴이나 우열을 가리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니까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이 낫다고 하기보다 복습의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 그만큼 차이보다 유사한 점이 도드라져 보였다.

    두 권의 책에서 주목할 점은 여신의 위상 복원이다. 인간을 창조한 여와(女)는 한대에 이르러 유가(儒家)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신격에 변화가 생겨났다. 문헌에 단독으로 나타나지 않고 복희(伏羲)의 아내로 설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두 사람의 글을 대조해보면, 두 책의 유사성을 금세 눈치채게 된다. 먼저 김선자는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보면서 제우스의 위대함에 길들여져 그의 아내 헤라가 원래 지중해의 다산(多産) 신앙과 관련된 풍요의 여신이었음을 잊기 쉽듯이, 중국의 위대한 여신 여와도 한나라 때 이후에는 단지 복희라는 위대한 남신의 아내로만 대부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남편을 가진 여신들뿐 아니라 소위 처녀신인 아테나나 아르테미스, 헤스티아 등도 등장하지만 모두 비정상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그려져 있다. 여신들은 이제 남신의 그늘 아래에서 다소곳하게 복종할 때에만 정상적인 배역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덧붙인다.

    정재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여와를 설명하는 글의 앞대목에 “헤라 역시 처음에는 당당한 대지의 여신이었다가 나중에는 제우스의 질투심 많은 부인이자 가정과 결혼의 수호신으로 역할이 후퇴하고 만다. 이 모두가 슬프게 자리바꿈한 어머니 여신들이다”고 했다.

    두 책이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과 서구신화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가 홍수신화다. 서구의 경우 대체로 신의 징벌로 홍수가 일어난다. 그런데 중국신화 그 어디에도 인간의 방종에 화가 나 신이 홍수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없다. 중국신화에서 홍수는 단지 자연재해일 뿐이다. 두 사람은 홍수신화에 대해 비슷한 해석을 내놓지만 예로 드는 신화는 각기 다르다. 김선자는 치수에 성공한 우(禹)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정재서는 복희와 여와가 부부가 되는 장면에서 이런 해석을 한다.

    큰 틀에서 두 권의 책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김선자의 책은 서정적이다. 중국신화의 내용을 유려한 우리말로 풀이해놓았다. 만약 편집자가 읽는다면 동화책으로 재구성하고 싶은 욕심이 날 정도다. 대신 신화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은 자제한 편이다. 독자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크게 넓혀 놓았다.

    이에 비해 정재서의 책은 서사적이다. 후기에도 밝혔듯 정재서는 뚜렷한 전략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중국신화의 의미를 설명한 다음 그리스 신화 등과 비교해 그 차이점을 드러내고, 해당 신화를 한국신화와 비교한다. 자신의 지식을 마음껏 활용해 신화의 상징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내린 결론은 공저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엘리아데나 조지프 캠벨의 책을 즐겨 읽어왔다. 이들의 책은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신화의 세계에 스며 있는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신화읽기의 기쁨이 여기에 있다고 여겨왔다. 나뉘고 찢긴 현실에서 합쳐지고 뭉쳐진 상상의 세계로 여행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신화읽기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다.

    그런데 최근 국내 저자들이 쓰는 신화책은 특정 문화권의 고유성이나 특징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나 두 사람의 중국 신화가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 어떤 면에서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신화의 정신에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고대하는 새로운 신화책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엘리아데나 조지프 캠벨처럼 세계 신화를 대상으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밝혀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분열과 갈등, 그리고 충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신화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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