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버리고 떠나기

  • 입력2004-07-30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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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헛된 바람들과, 어쩔 수 없는 어둠과, 이길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은 나. 그 속엔 누구도 쉴 자리가 없다. 이 여름에는 나를 비우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스쳐가는 것들을 붙잡지 않으리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으리라. ‘집착’을 주제로 5인의 작가가 털어놓는 인생 고백. 텅 빈 공간 속에 홀로 선 ‘나’를 돌아본다.
    ◆ 저기 피어 있는 풀꽃 한 송이 ◆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늘 그 때가 좋았다가 아니라 늘 지금이 좋다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버릴 수도, 당장 고칠 수도, 그렇다고 비켜가거나 뛰어넘어갈 수가 없다.

    ◇ 김용택 시인 yt1948@hanmail.net

    며칠 전 수업중에 갑자기 한 아이가 “야, 매미다. 매미!” 하고 외치자 공부하던 아이들이 일제히 하던 짓을 멈추고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닌게아니라 나도 그 날 매미 소리를 처음 들었다. 매년 처음 듣는 매미 소리, 처음 듣는 소쩍새 소리는 신기하다. 아이들과 나는 매미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학교 뒤뜰이다.

    학교 뒤뜰 살구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있었다. 학교 뒤에는 작은 뜰이 있고, 그 뜰에는 살구나무 몇 그루와 밤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고욤나무가 무질서하게 자라고 있다. 살구나무 밑에는 지금 개망초꽃이 한참이고, 호박넝쿨이 하루가 다르게 뻗어가고 있다. 호박넝쿨이 손을 내밀어 풀포기를 잡고, 작은 무궁화가지를 잡고 쭉쭉 뻗어간다. 오늘 아침에는 커다란 호박꽃이 노랗게 피어났다. 호박이 달리고 호박 위에 꽃이 핀다. 암꽃이다. 수꽃은 그냥 꽃만 핀다. 살구나무에는 살구들이 노랗게 익어 바람이 없어도 툭툭 떨어진다. 조용한 공부 시간에 툭 소리가 나서 가 보면 노란 살구가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 뜰 바로 뒤는 밭이다. 밭에는 지금 고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밭가에는 옥수수 잎이 바람 불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교실까지 들린다. 그 작은 뜰을 향해 난 길로 나이 든 농부들이 곡식을 이고지고 이따금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 작은 뜰로 지나간다. 때로 눈이 오는가 싶으면 비가 오고 억새가 피어 있는가 싶으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어났다가 꽃잎이 날린다. 나는 그 뒤뜰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적해지고 차분해진다. 퍼뜩 본래의 나를 찾은 느낌이 든다.

    이 글을 쓰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뒤뜰이 보인다. 매미가 울고, 살구나무 잎이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난다. 가끔 바람이 지나가는지 살구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해맑은 햇살 속에 흔들리는 잎들이 반짝거린다. 저 작은 숲에서 일어나는 하루, 한달, 1년, 2년…, 그렇게 그 뜰을 바라 본 지 벌써 30여 년이 넘었다.

    뒤뜰로 곡식을 이고지고 다니던 젊은 농부가 지금은 흰 머리에 굽은 등으로 곡식을 가져 나른다. 희한한 일은 그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손이 안 간 작은 뜰을 볼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작은 뜰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나는 꽤 오래 산 셈인데 한번도 그 뜰이 질리지 않았고 무심하지 않았다. 언제 바라보아도 거긴 평안하다. 나를 찾으면 그렇게 세상이 평화로운가 보다.

    아이들과 지내며 아이들이 나를 속상하게 하고, 내가 아이들을 속상하게 했을 때, 때로 글이 안 될 때, 꼬인 삶의 가닥들이 잘 풀리지 않고 나를 괴롭힐 때 나는 유리창에 턱을 괴고, 때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서서 그 가난한 뒤뜰을 바라보았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모습이 나를 나에게 데려다 놓아 나의 삶을 안심시켜 주었다. 생활이 나를 속일지라도 그 작은 살구나무 숲은 언제나 나의 삶을 안도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 작은 뜰과 뒷산뿐 아니라 내 교실 앞 강 건너 앞산 또한 내게 늘 감동을 주었다. 마을 뒤에 있는 그 산에 밭이 있고, 그 밭에 젊은 부부가 들어서서 농사를 짓더니, 어느 해 아이들이 부부와 함께 그 밭에 들더니, 이제 늙은 부부 둘이 밭일을 한다. 어느 해 둘 중에 누가 죽어 그 밭머리에 묻히고, 또 그 다음 그 무덤을 따라 무덤이 하나 더 생기리라. 그 밭에 봄, 빈 땅에서 곡식들이 자라고, 가을이 되어 거두고 나면 눈이 하얗게 내려 밭을 덮는다. 그 밭이 있는 산을 나는 지금껏 바라보며 살았다. 학교 뒤에 있는 산과 강 건너 앞산 사이에 강이 있고 그 강 언덕에 내가 평생을 다닌 학교가 있다. 그 학교에서 나는 내 인생을 다 보낸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장엄한 자연과 그 속에 있는 작은 학교에 어린 아이들,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나, 그 세 가지가 내 삶을 지탱시켜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갑갑하지 않느냐고. 이 가난하고 답답한 산중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물이, 강이, 나무와 꽃이, 그리고 변함없이 가난한 농부들과 철없는 아이들이 질리지도 않느냐고. 생각해 보면 그도 그렇다. 정말 단순하고 지루한 삶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말한다. 당신은 정말 복을 다 타고난 사람이라고. 자연과 예술과 그리고 아이들 속에서 평생을 산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도 그렇다. 다 맞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서 나는 행복했다라고 아무도 큰소리치지 못한다. 누가 그 어느 누가 자기의 삶에게 큰소리치겠는가. 그게 삶이다.

    다만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늘 그때가 좋았다가 아니라, 늘 지금이 좋다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버릴 수도, 당장 고칠 수도, 그렇다고 비켜가거나 뛰어넘어갈 수가 없다. 지금을 내 삶으로 ‘사는’ 일이 가장 나를 행복하게 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내겐 중요했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 여기, 지금의 사회현실은, 세계는 참으로 끔찍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진다. 우리들의 일상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검은 손길에 쫓기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하다. 이 불안한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내가, 내가 아니다.

    내가 남처럼 낯설 때가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내 정신으로 하는 짓인가를 물어 보면 이게 아닌데 하는 불안한 마음이 검은 구름떼처럼 일어난다. 이 불안하고 긴장된 삶을 우린 모면하려 한다. 벗어나려 하고, 떼어내려 하고, 외면하려 한다. 나의 하루를 생각해 보면 그래서 늘 순간을 모면하려는 안간힘의 연속으로 보인다.

    순간을 모면하려는 이 찰나주의는 필연적으로 쾌락을 찾아 헤맨다. 쾌락은 퇴폐를 부르고 범죄를 부르고, 스스로 파멸한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인류에게 진정으로 행할 일인가? 내가 하고 있는 짓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가. 우리들은 지금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고 있는가. 한번 진지하게 물어 볼 때가 되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생각해 보면 복잡하고 넌더리가 나는, 못 말리는 우리의 일상에다가 8월은 정말 짜증나는 더위까지 못살게 한다. 다들 피서를 간다, 해외여행을 간다. 법석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나 그 어디로 간들 그대들을 평안함으로 훌륭히 모실 곳은 그리 많지 않음을 알라. 산으로 가 보아라. 산에는 그대들과 같은 인간들로 법석대고 생난리를 치고 있다. 바다로 간들, 강으로 간들, 그 어디로 간들 휴대폰은 그대들을 따라다닐 것이고, 잘못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로 인해 당신은 전혀 다른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짊어지게 될 것이다.

    문제는 마음이고 생각이다. 마음을 어디에다가 주고, 마음을 어디에다가 빼앗길 것인가가 문제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내 것으로 하려 한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끝이 없는 이 탐욕이 실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사람들은 개화된 문명시대를 산다고 하지만 가만히 우리의 일상을 헤집어 들여다보면 그게 뻥이라는 게 금방 드러난다. 어떤 학자가 말했다.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짧게 살다가 지구에서 사라질 종은 인간이라는 동물일 거라고. 나도 동의한다. 인간이라는 종말고 도대체 어떤 동물들이 이렇게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가 사는 땅을 무자비하고도 야만적으로 파괴하는가. 인간들은 자기가 살고 있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자기들의 마음도 함께 파괴해 왔다.

    부서져버리고 메말라버린 오늘날 우리의 이 사막같이 삭막한 정신세계를 보라. 그것은 욕심껏 자기 것을 가지려는 탐욕에서 시작됐다. 가진 것을 늘리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 도대체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유해야 만족하고 행복하단 말인가.

    매미가 운다매미 소리에게 내 마음을 준다

    개망초 꽃이 피었다꽃에게 내 마음을 준다

    살구나무에 바람이 분다바람에게 내 마음을 준다

    날아가는 나비에게가만히 서 있는 나무에게 마음을 주면마음이 편안해 진다이 세상 처음이었던 내가 보인다.(나의 시 ‘마음’ 전문)



    말 없이 피어 있는 풀꽃 한 송이에게 내 마음을 주면 나를 찾는다. 나는 누구일까? 혹 내가 저렇게 산길 들길에 핀 꽃 한 송이는 아닐까.

    ◆ 청산이 바삐 가는 흰 구름을 비웃는다 ◆

    버리고 떠나기
    ‘집착하는 나’는 소유지향적인 관형격의 모습이다. 내 처소, 내 가족, 내 생각, 내 물건, 내 것 등등…. 내 중심으로 우주와 세상을 좁혀버리는 맹독(猛毒)에 중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 정찬주 소설가 jchanjoo@kornet.net

    좁은 툇마루에 앉아 잠깐 동안 갠 먼 산봉우리를 응시한다. 산봉우리에는 비구름이 홑이불 자락처럼 걸쳐 있고, 툇마루는 아직도 들이친 빗물에 젖어 축축하다. 비바람이 거칠게 다녀간 뒤끝이라 개울물 소리가 격렬하다. 이럴 때 나는 골짜기를 울리는 개울물 소리에 나의 몸과 마음을 맡겨버린다. 선방의 수행자들이 화두 하나에 자신의 전 존재를 맡기듯.

    중국의 남전선사는 어느 젊은 수행자가 도(道)를 묻자, ‘평상심이 도다’라고 했다. 평상심이란 한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청정한 본래의 마음일 터이다. 남전의 수제자 조주선사는 스승의 가풍을 이어 ‘차 한 잔 마시기(喫茶去)’라고 했다. 차 한 잔 마시라는 뜻은 공연히 망상 떨지 말고 차 한 잔 속에 그대의 온몸을 적셔보라는 말이다.

    격렬한 물소리에 나는 순간적이나마 좀 전의 나를 버리고 무아(無我) 속으로 빠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라고 집착하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무아의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잠시 후 나는 또다시 집착하는 무엇에 사로잡히고 만다.

    ‘집착하는 나’는 소유지향적인 관형격의 모습이다. 내 처소, 내 가족, 내 생각, 내 물건, 내 것 등등…. 내 중심으로 우주와 세상을 좁혀버리는 맹독(猛毒)에 중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몇 해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남도 산중으로 내려와 처소를 지은 뒤, 논밭에서 콩을 심고 감자를 캐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생명이 있건 없건 세상의 모든 것과 한 몸이기에 결코 나를 관형격으로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는 연기(緣起)와 상생의 도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집착하는 나’는 ‘본래의 나’를 잠시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달콤한 유혹과 게으름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방심하면 언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되살아난다. 그러니 비록 몸은 청산에 있으나 마음은 저잣거리로 나가 이런저런 욕심에 끌려다니고 만다. 사람들은 내 산중 처소를 찾아와 부러워하지만 실제 내 살림살이는 꼭 그럴 만한 것이 못 된다.

    어떤 날은 그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서울을 떠난 것이 공연한 객기를 부린 듯하고 서울에 떨어진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다. 그래서 방벽에 초의스님의 시 가운데서 마음에 와 닿은 이런 구절을 적어 놓았다. 靑山應笑白雲忙. 좀 거칠게 풀자면 ‘청산이 바삐 사는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이다. 나도 묵묵한 청산을 닮아보고 싶어서다.

    서울을 떠나고 나서부터 나는 깊은 산중의 선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대산의 상원사 청량선원에서부터 제주도 서귀포의 남국선원까지 내려갔다. 허상의 나를 버리기 위한 나만의 떠나기였다. 좀더 말을 보태어 고백하자면 선방이라는 금족(禁足)의 공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 인생을 걸어놓고 수행하는 선객을 만나 대화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잘 사는 길인가’ 등을 명백하게 알고 싶어서였다.

    최근 2, 3년 사이에 돌아가신 노선승을 뵙는 정복(淨福)을 누리기도 했다. 해인사 해인총림의 혜암 방장스님, 봉암사 태고선원의 서암 조실스님, 백장암 청화 조실스님, 백양사 고불총림의 서옹 방장스님 같은 분들이다.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분들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혜암 노스님은 “적게 먹고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씀을 하셨다. 뭘 하기로 맹세했다면 전 인생을 걸어보라는 간절한 말씀이었다. 서암 노스님은 헛된 꿈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現前一念)”고 하셨고, 청화 노스님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을 주었다. 삼배를 하려고 엎드리자 미소 지으며 손을 잡아 끄셨다. 스님께서는 진리(부처님)를 미칠 정도로 사모하였고, 그것에 감사하여 눈물이 끝없이 나므로 벽에 수건을 두 장이나 걸어놓고 사신다고 했다. 서옹 노스님은 “죽어도 산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다”며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일갈하셨다.

    이와 같이 큰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면 헝클어진 내가 바로 서고 바른 길이 보이게 마련이었다. 노스님의 미소가 전염되어 욕심과 헛된 꿈들의 업장(業障)이 잠시 녹아 내렸던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출가를 권유하는 노스님도 있었지만 나는 ‘용케’ 재가(在家)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미 입적하신 고승들말고도 나는 몇 분의 선방 선원장 스님들을 잊을 수가 없다. 먼저 성철 큰스님의 속가 딸인 불필 노스님의 선에 대한 단호한 의지와 따뜻한 배려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승(茶僧)의 법력으로 차 한 잔 속으로 나를 빠뜨리곤 했던 극락암 호국선원에 계신 명정스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만행(萬行)도 결코 잊을 수가 없고.

    20여 년 전에 처음 나와 인연 맺었던 봉암사 태고선원의 선원장 정광스님의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말씀도 그분의 형형한 눈빛처럼 늘 번득인다.

    “화두 이 뭣고(是甚摩)를 드는 데는 출가, 재가자의 구별이 없지요. 화두를 들려고 따로 시간을 정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아무 때나 생각날 때 드십시오. 이 뭣고를 드는 순간 앞뒤의 시간이 잘리므로 과거와 미래가 사라집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나’라는 것마저 끊어버리면 일체가 돈절(絶)되고 큰 허공처럼 텅 비워집니다. 그리하면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자기 본래 모습을 보게 되지요. 이처럼 화두를 들게 되면 거친 현실을 극복하는 데 남모르게 이익이 있을 겁니다. 갑자기 닥친 불행이나 좌절도 화두를 챙김으로써 마음을 어떻게 쓸까 하는 대응능력이 생겨 자신도 놀라게 됩니다. 불생 불멸하는 텅 빈 마음에서 나오는 화두의 힘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어떤 문제를 몰록 잊고 자기 자신이 완전히 객관화될 때, 바로 거기에서 비상한 해결책이 나오지요.”

    이런 이야기를 20여년 전부터 하신 기억이 난다. 지금도 스님은 설명을 달리할 뿐 변함이 없다. 그래서 스님의 말씀은 늘 새롭게 다가온다. 나를 감동시킨 또 한 분의 선승이 있다. 모든 이를 구원하겠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해인사 장경각 앞에서 불 태워버린 제주도 남국선원의 선원장 혜국스님이다.

    “임제스님은 깨닫고 나서 대성통곡했지요. 깨닫고 보니 허공이 바로 내 안에 있거든요. 그래서 스승을 향해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한 겁니다. 깨닫고 보니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라고 하는 벽이 있어서 내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법당에 방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집을 뜯어내면 이 방, 저 방은 사라집니다. 벽 때문에 방이 있는 겁니다. 벽을 다 허물어버리면 허공이 되어 버립니다. 임제스님이 통곡한 까닭도 내 안에서 허공의 성품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나라고 하는 벽이 바로 ‘집착하는 나’가 아닐 것인가. 혜국스님의 말씀은 낡은 집과 같은 오래된 허상의 나를 벽에 비유하여 철저하게 허물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 인생에서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비가 완전히 갠 것은 아닌 듯하다. 보슬비가 다시 내리려 하고 있다. 비 설거지라는 말을 산중에 살면서 처음 들어보았다. 비 온 뒤에 패인 길이나 쓰러진 작물을 손보는 일을 비 설거지라고 한다. 연못가에 쓰러진 이팝나무와 화단의 나무백일홍도 바로 일으켜 세워야겠고, 아래채 아궁이에 불을 넣어 습기 찬 산방(山房)을 말려야겠다.



    서암 노스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살라 했고, 혜암 노스님께서는 무엇을 하되 죽을 각오로 덤비라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살림살이가 바로 선방에서 닦는 선(禪)이 아닐까 깨달아진다. 나도 나에게 주어진 삶이 고마워 눈물이 났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청화 노스님처럼 눈물 닦을 수건을 벽에 걸어놓고 싶다. 그것이 바로 서옹 노스님께서 말씀하신 죽어도 산 사람이 되는 참사람(無位眞人)의 길이 아닐까 하고 깨달아진다.

    그리 살 수만 있다면 내 산중 처소야말로 ‘집착하는 나’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나만의 선방일 터이다. 선방이 꼭 절을 찾아가야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내 산중 처소가 나의 선방이듯 주인공(隨處作主)이 되어 온몸으로 뒹굴며 살고 싶다.

    버리고 떠나기
    우연히 거기서 어린 시절 내 희망과 만났다. 생활기록부에는 장래희망을 적는 칸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내 추억 속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참 절묘하게도 내 희망은 ‘선생님’이었다.

    ◇ 김풍기 강원대 교수·국어교육 pung10@kangwm.ac.kr

    별똥별처럼 스치면서 내 기억 속에 명멸하는 추억들이 있다. 특히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기억들은, 그 맥락과는 전혀 관계없이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하다. 학교가 끝나면 소 몰고 뒷산으로 올라가 또래 친구들과 쏘다니던 일도, 여름밤이면 아버지 손잡고 시냇가로 나가 돗자리 깔고 별을 보면서 잡음 심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전설의 고향’을 듣던 일도, 메뚜기 잡으러 논두렁을 돌아다니던 일도, 비닐로 된 비료 포대 하나 들고 집 뒤 언덕으로 올라가 눈썰매를 타던 일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즐거운 기억인가.

    행복하고 설레임 가득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힘이다. 바쁜 시간 속에서도 그러한 추억의 조각들이 이따금씩 부유하는 것은, 아마도 나의 현실을 추동하는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 마을을 들르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명절이 되어도 쉽게 발걸음이 그쪽을 향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고향은 변한다. 이제 내게 고향은 지리적 공간이라기보다 심리적 공간으로 남아 있다.

    몇 년 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학생생활기록부를 발급받을 일이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문서가 ‘대외비’로 분류되어 애초에 봉해진 상태로 제출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신분을 확인하는 순간 서류를 뒤져서 이리저리 찾더니 즉시 복사를 해준다.

    귀퉁이에 조그맣고 희미한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는 내가 보였다.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얼굴이다. 뒷장을 넘겨본다. 작고 깨알 같은 글씨로 내 어린 시절이 기록되어 있다. 숫자나 ‘수우미양가’로 환산된 내 학교생활은, 무수한 과목들 사이에서 수줍은 듯 눈짓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하도 오랜만이어서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담임선생님의 성함과 글씨체도 반가웠다(그런 점에서 요즘처럼 컴퓨터로 입력해서 만드는 생활기록부는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반(反)추억적인가!).

    우연히 거기서 나는 어린 시절 내 희망과 만났다. 생활기록부에는 장래희망을 적는 칸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내 ‘추억 속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참 절묘하게도 내 희망은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내 희망은 오직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촌동네에서 선생님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서도 내가 언감생심 선생님이 되겠노라고 희망했던 것은, 오래도록 책과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희망대로 나는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선생님’이 되었다.

    이제 내 희망은 무엇인가. 이 풍진 세상에 나는 진정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가.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서 아둥바둥 살아온 세월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언제나 책과 함께할 수 있는 삶이라는 점에서라면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셈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렇게 살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는 내 의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겁먹은 혹은 의뭉스러운 눈길로 내 주변을 살피는 한 여전히 내 삶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생활인이 되어갈수록 과거의 내 소중한 꿈이 허망한 꿈으로 되어 버리는 건 아닌가 근심스럽기도 하다. 당나라 시인인 나은(羅隱)의 시 가운데 ‘자견(自遣)’이라는 작품이 있다.

    得卽高歌失卽休 뜻 얻으면 소리 높여 노래하고 잃으면 쉬니多愁多恨亦悠悠 근심스럽든 한스럽든 모두 느긋해今朝有酒今朝醉 오늘 아침 술 있으면 오늘 아침 취하고明朝愁來明朝愁 내일 아침 근심 오면 내일 아침 근심하리니

    사람살이가 어찌 즐거움만으로 이어지겠는가. 희로애락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내 앞에 닥친 것을 살피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는 않다. 나은의 시처럼 살아가는 태도는 때때로 위태로운 줄타기처럼 보인다. 달관(達觀)과 체념(諦念) 사이에서 끊임없이 떠도는 듯한 느낌이다.

    복잡한 생활을 하는 사람일수록 현실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일 중독증 사이의 긴장이 강한 법이다. 이런 사정은 조선시대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쁜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비유하여 표현했다. 그런데 ‘귀거래’를 많이 읊조리는 사람일수록 현실정치에 대한 강한 집념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은의 시를 읽으면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달관인지 체념인지 정확히 가르기가 어렵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시는 읽는 사람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매사를 심드렁하게 대하는 사람이라면 나은의 시를 체념의 방식으로 읽을 것이고, 싯귀 속에서 뭔가 번뜩이는 지혜의 편린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달관의 방식으로 읽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체념의 대척점에 달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분분한 논의를 완전히 뛰어넘은 전혀 다른 제3의 자리에 달관이 위치한다. 그건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거렁뱅이가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데 소유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비록 아무것도 없는 거지라 하더라도 무한한 욕망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이다. 내가 충분히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삶이야말로 무소유의 실천이다.

    달관도 마찬가지다.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마시지 않는 행동의 표면만 가지고는 달관과 체념의 구분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현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지만 그것의 허망함을 충분히 깨닫고 스스로의 의지로 단호히 거부하는 삶이 바로 달관의 자리다. 더욱이 그 삶이 긍정의 몸짓으로 표현되어야 달관이라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깨달음의 경지다. 진리가 무엇인지 과거의 경험이나 학습을 떠올린다거나, 나중에 이 말을 가지고 무엇을 생각해 보려 한다면, 모두 망상이다. 그 순간 어떤 욕망과 망상의 개입 없이 무심하게 차를 한 잔 마시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그래야 술을 보면 마시고 근심이 오면 근심을 하는 달관의 경지를 살아간다.

    추억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무리 당차다고 한들, 모두가 집착이요 망상이다. 이미 지나간 것들을 부여잡고 돌아보며 머뭇거리는 것은 고단한 한때를 위로할 수는 있다. 장밋빛 미래의 청사진을 내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 역시 힘든 현실에 잠시나마 위안이 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이미 지나가버려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딛고 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것에 집착하여 헤어날 줄 모른다. 그 집착은 지금, 여기의 나를 옥죈다.

    집착을 버리는 일은 참으로 끔찍한 과정을 동반한다. 한여름 밤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 별을 바라보던 추억을, 친구들과 눈밭을 뒹굴면서 비료부대를 찢어 만든 눈썰매를 타던 소중한 기억을 집착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노후를 준비하고 커나가는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을 집착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추억과 희망을 집착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집착과 대면하게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당면한 현실을 정확한 눈으로 보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라야 한다.



    현실에 대한 욕망과 집착도 우리의 현재를 힘차게 만들어 나가는 힘이다. 그걸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희망이 현재의 나로 나타나고, 현재의 내 소망이 미래의 어떤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그 관계성을 정확한 눈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눈을 가지는 순간 추억과 희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나를 옥죄는 추억과 희망이 내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면서 내 삶의 가장자리를 만들 때, 그리고 내가 그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욕망과 집착을 벗어던진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유로운 눈으로 우리의 추억과 희망을 다시 살펴야 한다.

    버리고 떠나기
    사람들은 양손에 활과 칼을 들고 상대방이 먼저 무기를 내려놓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내가 무기를 들고 있는 한, 상대방도 결코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다.

    ◇ 이용범 소설가 banya02@dreamwiz.com

    요즘 인터넷에서 ‘폐인’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인터넷 게임이나 특정 사이트에 중독되어 일상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폐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쓸모없이 허물어져버린 사람(廢人)과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아첨꾼(嬖人)이 그것이다. 중독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내 주위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

    그가 폐인이 되어 버린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그는 인터넷 매체의 속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인터넷의 장점은 내가 누군가를 향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의사소통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그러나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주장은 거칠고 폭력적이며, 때로는 모독에 가까운 언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자신이 올린 글에 다른 사람들의 댓글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그는 점점 화가 났다. 인격 모독에 가까운 비아냥거림과 욕설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비아냥거리는 상대방을 향해 해명도 하고 자제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지만, 상대방은 막무가내였다.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는 댓글에 대해 그가 너무나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에 상대는 더 재미있어했다.

    결국 그는 상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상대방 역시 그를 따라다니며 악의적인 댓글을 달았다. 그러나 문제가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분노만 쌓여갔다. 그는 다른 네티즌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대부분 방관자들이었다. 인터넷에서의 승패는 결국 숫자에 의해 판명된다. 그리하여 그는 네티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스스로의 논리를 버리고 다수가 원하는 논리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는 수시로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매일 자신의 주장을 담은 글을 쓰고, 조회 수와 추천 수를 확인하고, 댓글에 대한 반박 논리를 개발하고,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과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려낸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생체 리듬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폐인(廢人)이고, 네티즌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점에서 폐인(嬖人)이 되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집착으로부터 비롯된다. 집착이란 어떤 것에 대한 끊임없는 갈애(渴愛)를 의미한다. 따라서 집착은 모든 욕망의 바탕인 셈이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그 욕망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집착은 소유에 대한 갈망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소유의 욕망이란 그가 갖고 싶은 것이 그만한 값을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을 평가해 주기 때문에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평판, 즉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인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폐인의 괴로움도 결국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기인한다.

    집착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을 버리는 동시에, 내 존재를 완전히 벗어 던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를 완전히 벗어 던질 수 있을 때, 소유의 욕망도 사라진다. 고려의 승려 혜심(慧諶)이 엮은 ‘선문염송(禪門拈頌)’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한 바라문이 두 손에 아름다운 꽃을 들고 붓다를 찾아와 공양을 올렸다. 그때 붓다가 바라문을 향해 소리쳤다.“버리거라.”그러자 바라문은 왼손에 들고 있던 꽃을 버렸다. 그러나 붓다는 다시 바라문을 향해 소리쳤다.“버리거라.”바라문은 다시 오른손에 들고 있던 꽃을 버렸다. 그러나 붓다는 다시 한번 바라문을 향해 소리쳤다.“버리거라!”바라문이 고개를 조아리며 붓다에게 물었다.“저는 두 손에 든 것을 모두 버렸는데, 또 무엇을 버리라고 하십니까?”붓다는 바라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가만히 입을 열었다.“나는 꽃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네 몸 속의 티끌과 탐욕과 번뇌의 뿌리를 버리라고 한 것이다.”

    붓다의 일화에서 보듯이 손에 쥐고 있는 소유물을 버린다고 해서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 다문품에는 이런 일화가 담겨 있다.

    어떤 마을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부부는 본래 성품이 인색하여 남을 돕거나 선행을 베풀지 않았다. 붓다가 그 소문을 듣고는 허름한 수행자로 변장한 채 부부를 찾아갔다. 때마침 남편은 집을 비운 터라 그의 아내가 붓다를 맞았다.

    “먹을 것을 구하러 왔습니다.”

    붓다가 구걸을 청하자 여인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먹을 것이 없는데 재수 없게 웬 땡추야!”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자 붓다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몸을 시체로 바꾸었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퉁퉁 부어오르더니 코와 입에서는 벌레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또 배가 터져 창자가 문드러지더니 이내 더러운 진물이 흘러 나왔다. 여인은 그 모습을 보고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 때 밖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와 아내가 기절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방금 어떤 땡추가 나를 욕보였습니다.”

    “그 놈은 어디 갔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남편은 즉시 활과 칼을 들고 붓다의 뒤를 쫓았다. 그때 붓다는 자그마한 초막에 들어가 잠시 쉬고 있었다. 잠시 후 남편이 활과 칼을 들고 초막 앞에 이르러 소리쳤다.

    “어서 나오너라, 이 놈의 땡추야!”

    남편은 온몸을 던져 문을 열려 했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붓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먼저 그 활과 칼을 버리면 문을 열겠소.”

    남편은 우선 문을 열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손에 쥐고 있던 칼과 활을 버리며 말했다.

    “자, 칼과 활을 버렸다. 그러니 어서 문을 열거라!”

    남편은 온힘을 다하여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활과 칼을 버렸는데 왜 문을 열지 않는가?”

    붓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대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칼을 버리라고 한 것이지, 그대 손에 있는 칼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오.”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나눠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 것을 지키기 위한 무기로 활용될 때가 많다. 무형의 재산인 지식조차도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되거나 편가르기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양손에 활과 칼을 듣고, 상대방이 먼저 무기를 내려놓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내가 무기를 들고 있는 한, 상대방도 결코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해는 내가 먼저 무기를 내려놓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내 것을 버린다는 것은 곧 관용(寬容)을 의미한다. 내 것을 버렸을 때 비로소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볼테르는 ‘관용론’에서 종교적 편견과 집착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 바 있다. 종교적 신념조차도 인간의 집착으로 변질되면, 신(神)의 자리는 사라지고 적대적 폭력만 남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편가르기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 갈등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행복은 스스로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 달려 있다. 편을 가르고 무리를 형성하는 것 역시 자신의 욕망을 풀어낼 공간을 얻으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다. 모든 성자들이 이 문제에 해답을 제시했다. 그것은 외부의 사물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들이고, 오직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라는 것이다. 시선을 내면으로 향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 버릴 수 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스쳐 가는 모든 것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라.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 그것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미 거기에 있었던 것은 그냥 거기에 있도록 하면 된다.

    놓아버려라. 애초부터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버리고 떠나기
    어린 시절 변소에서 뒷장이 찢겨져 나간 책을 훔쳐오던 그 순간부터 나는 사라진 책을 찾아야만 하는 과제를 떠맡게 된 셈이다.

    ◇ 김연수 소설가 larvatus@hanafos.com

    재래식 변소에 휴지 대신에 낱장씩 뜯어서 사용하라고 책을 갖다 놓았던 시절이니 아마도 내가 대여섯 살 정도 됐을 때다. 다른 집에 놀러갔다가 변소에 가서 앉았더니 대략 3도 인쇄된 만화책이 앞에 놓여 있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볼일은 보지 않고 그 만화책에 푹 빠졌다가는 그만 그 책을 몰래 감춰서 집에까지 들고 왔다.

    기상천외의 화장지 도둑이었으니까 멋모르고 볼일을 보러 갔던 그 집 어른들이 어떻게 뒷일을 처리하고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책을 누가 훔쳐 갔느냐로 동네가 좀 소란스러워졌고 변소를 다녀온 내가 의심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어쨌든 나는 버텼다. 나는 절대로 화장지 따위를 훔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책을 훔쳤으니까.

    나이가 어렸는데도 책을 화장지로 사용한다는 것에 분노했다기보다는 그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훔쳤다. 뒷쪽 몇 십장이 이미 성스럽지 못한 용도로 사용돼 사라졌으나 그 내용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상(李箱) 같은 대작가의 작품도 그렇게 사라진 바가 있다. 이상에게는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유고말고도 손수레 한 개 분량의 원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원고 중 하나가 고물상을 거쳐 어느 집 화장실에 놓여 있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고등학생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 적이 있었다. 그건 정말 보물덩어리였다. 이상 작품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는 노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나머지, 많은 원고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졌다.

    뒷부분이 뜯겨져 나간 책, 혹은 유실된 원고 조각 등을 바라보면 그게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그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고의 여러 능력 중 짐작만큼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사고 능력이 없다. 모든 짐작에는 일종의 서명 같은 게 찍히게 마련이다. 짐작하려면 그간 자신이 겪어온 모든 경험과 배워온 모든 지식을 동원해야만 하기 때문에 짐작하다가 보면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깨닫게 된다. 대학에 다닐 때, 정답 없는 논술 문제를 치른 적이 몇 번 있다. 답안을 쓰는 그 순간에 채점이 이뤄지는 종류의 시험이었다. 답안에는 내가 어느 정도 지식의 인간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실상사나 수덕사 같은 절의 해우소에 서서 오줌을 눌 때, 두 발 사이의 깊은 수렁이랄까, 어둠이랄까 그 구멍에 대해 명상하는 일이 잦다. 그건 역사의 망각과 닮아 있다. 그 깊은 구멍 속으로 인간의 배설물과 함께 몇 장의 종이가 떨어졌다. 이제 그 종이에 어떤 글귀가 씌어져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글귀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어야만 한다.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감각, 자신의 지식, 자신의 상상을 죄다 동원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어린 시절, 변소에서 뒷장이 찢겨져 나간 책을 훔쳐오던 그 순간부터 나는 사라진 책을 찾아야만 하는 과제를 떠맡게 된 셈이다.

    작가로서 내게는 내가 쓴 작품을 발표하지 않으려는 욕망이 있다. 소설을 쓰는 일은 전적으로 나의 일이다. 독자와도, 출판사와도, 비평가와도 상관없는 일이다. 스티븐 킹은 자신이 쓴 미발표 원고를 은행 금고에 보관해 놓는다고 들었는데, 이게 바로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다. 소설가들의 재산은 돈이 아니라 자신이 써놓은 원고다. 이 원고를 최대한 늦게 발표하고 싶은 욕망, 더 나아가 발표하지 않으려는 욕망은 그러니까 당연한 일이다. 이상은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이상이라면 자신의 미발표 유고가 변소의 그 검은 구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진심으로 반가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이자 동시에 독자인 나는 그 때문에 목이 마르다. 내가 속속들이 알고 싶어서 관심을 두는 자들은 모두 뭔가를 조금씩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뭔가를 조금씩 감추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속속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이자 동시에 독자인 나는 내 쪽에서는 뭔가를 계속 감추면서 내가 관심을 둔 것들에는 그 모든 것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한 번도 국민윤리나 사회도덕 같은 영역에 속하는 것들에 매료된 적이 없었다. 그건 모든 게 명명백백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에는 도무지 마음을 두고 싶어도 그럴 만한 부분이 없다.

    예컨대 연변에 와서 생활하다 보니 마을마다 열사비라는 게 세워져 있다. 대략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의 충혼탑과 비슷한 형태의 흉물스런 시멘트 구조물이다. 그건 옷을 벌거벗고 서서는 나를 봐달라고 말하는 여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아무리 먼 곳에서 봤다 하더라도 나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단숨에 그게 무엇인지 다 알아버렸는데, 내가 왜 굳이 그 흉물스런 구조물을 더 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겠는가?

    내가 정치인이나 신문의 논설면이나 통사로 씌어진 역사책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 세상이 그렇게 명명백백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일까? 집에 돌아가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을 되뇌면서 편안하게 잠드는 것일까?

    연변 지역에서는 한국전쟁을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건 정말이지 동북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지긋지긋한 전쟁이었다. 생각해보라. 청일전쟁에서부터 시작해 근 60년에 걸쳐서 전쟁을 벌였으니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고 애국의 한길로 나가려고 해도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재중 조선 청년들 중에 항미원조 전쟁에 나가기 싫어 손가락을 자른 자들이 있었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바뀌어 들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중에 열사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열사의 아내라면 타의 모범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한국이나 연변이나 혹은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전쟁에 잃어버린 그 아내 역시 마을의 선봉 일꾼이 됐다. 그러나 문제는 미망인이 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 결혼했든 결혼하지 않았든 다른 여자들에게는 수작도 걸고 연애도 하는 남자들이 열사의 아내에게는 무기력했다. 국가에서 열사비를 우뚝 세워줬으니 남자들이 그녀 앞에서 무기력한 것은 당연하다. 열사비라는 건, 그러니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의 몸 같은 것인 셈이다. 그 아내가 개혁개방 후 열사증을 없애버리고 할머니의 몸으로 재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제야 나는 그 아내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여자의 몸에서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서라도 학교만 졸업하고 나가면 온통 그런 일들뿐이다. 내가 매료되는 세계는 바로 그런 세계다. 신문이나 역사책이나 속보를 전하는 TV뉴스는 그런 세계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현대의 언론이라는 것은 짐작 따위는 절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잔인한 도구다. 곳곳에 열사비 같은 것을 세워놓고는 그걸 사랑하라고 말한다. 시종일관 그 뻣뻣한 것만을 사랑하라고 말할 뿐, 실제 사람의 몸, 순간순간 변해가는 사람의 몸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제 집착에 대해 말해야만 하겠다. 내게 집착이란 매료된다는 뜻이다. 이건 미래형에 가깝다. 재산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은 그 돈에 집착하는 것이며 여자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여자와 가질 수 없게 된 미래에 집착하는 것이다. 거기에 마음이 쏠려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온몸으로, 아무리 짐작해도 그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사람은 뭔가에 집착하게 된다. 돈이 많거나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사는 그 상태가 한순간에 없어져버릴까봐 드는 불안감은 집착이 아니라 욕심이다. 나는 욕심이 아니라 집착에 대해 더 오랫동안 생각하고 싶다.

    명명백백한 세계는 집착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손을 놓으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내게 ‘이상의 잊혀진 유고 따위는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일과 똑같다. 들끓는 육체를 잊고 한평생 열사비만 바라보며 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의 신진대사는 절대로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왜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겠는가? 인간은 잊지 못하는 일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다. 나는 명명백백한 그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 그것들은 내가 관심 둘 만한 것은 여기에 하나도 없다고, 내가 끝까지 매달릴 만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끊임없이 집착한다. 모든 게 명명백백해질 때까지 집착한다. 물론 모든 게 명명백백해진다면 나는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변소에서 발견한 책의 뒷장이 뜯겨져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그렇게 몇 번이고 읽지 않았을 것이다. 대략 10년쯤 전에 나는 우연히 서로를 죽이는 유격대에 대한 짤막한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건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일을 소설로 쓰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사로잡는 일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 사제가 된 어느 소년이다. 역사책은 그렇게 관심 둘 만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신을 믿게 됐고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려다 순교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나는 뜯겨져 나간 책을 거듭 읽는 것처럼 그 소년을 상상하고 있다.

    내게는 집착이 힘이다. 내가 가진 생각을 놓지 않으려고, 때로는 내가 느낀 감정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쓴다. 나는 사람들이 그게 재력이든 지위든 권력이든 더 많이 집착하기를 바란다. 집착은 한 인간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돈에 미쳤다. 그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권력에 취했다. 그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는 그게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심으로 그걸 인정할 수 있다면 그는 인생에서 한 가지 사실, 즉 자신이 누구인지는 깨닫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집착을 다 버렸다고 말하는 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똑같은, 말하자면 복제품의 얼굴인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절대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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