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연방 탈퇴는 남부 전체를 동요하게 만들었고, 이윽고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여섯 주가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동조해 잇따라 연방을 탈퇴한다. 이어 이들 각 주의 대표자들은 링컨의 대통령 취임을 한 달여 앞둔 1861년 2월, 앨라배마의 몽고메리에 모여 미국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하고 미시시피 출신의 정치가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일부 정치가들이 나서서 화합의 길을 모색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3월4일 링컨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연방이 헌법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어떤 주도 연방을 탈퇴할 수 없다는 것과 따라서 연방분리를 획책하는 행위는 반란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로써 남북의 갈등은 더더욱 봉합할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고 만다. 남북의 분리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가운데 남북 쌍방의 주권 행사가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남북전쟁의 기폭제가 된 곳이 찰스턴 항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뱃길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섬터 요새다.
섬터로 가는 뱃길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붐볐다. 정년을 넘긴 듯한 노부부,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눈에 띈다. 이따금 긴 부리의 펠리컨들이 내려앉으며 흰 포말이 이는 것을 제외하면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여기저기 떠 있는 부표에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앉아 지나는 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유람선 위에서 찰스턴 항을 되돌아보니 이곳이 뛰어난 입지조건을 갖춘 양항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우측으로는 제임스 섬이, 좌측으로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황금충’의 무대이기도 한 설리번 섬이 마치 입 벌린 뱀의 형상처럼 항구를 옹위하여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막아준다.
남북전쟁의 시발지

섬터 요새 내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독립전쟁 영웅 토머스 섬터의 이름을 딴 이 인공의 성채가 착공된 것은 1829년이다. 1812년 영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대서양 연안 항구들의 방위를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한 연방정부가 기획한 일련의 요새지 건설 사업의 하나였다.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시까지 성채에는 7만여 t의 암석과 멀리 북부의 메인 주에서 실어온 1만여 t의 화강암이 투입됐으나 아직 계획된 공정의 90%밖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실로 50여 년에 걸친 대공사였다. 높이 지상 50피트, 두께 5피트, 사면이 약 190피트에 이르는 방벽으로 설계된 성채는 3면에 3층으로 모두 135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650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에서 탈퇴한 일주일 뒤인 1860년 12월26일, 연방군 수비대장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80명의 수비대를 설리번 섬의 모울트리 요새에서 섬터 요새로 이동시켰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민병대가 요새를 접수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자신 남부 켄터키 출신으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앤더슨은 연방의 군인으로서 책무를 맡은 이상 남부연합에 투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앤더슨은 섬터 요새가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전략적 가치가 크고, 또한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하는 데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앤더슨의 예상대로 남부연합군은 곧 주변의 중요한 군사시설과 요새지를 접수하고 장악했다. 그러나 투항을 거부하는 섬터 요새에 대해서 그들도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할 무렵, 섬터 요새는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 항의 피큰스 요새와 더불어 남부연합의 영토 내에 여전히 연방의 깃발이 휘날리는 군사시설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