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장기는 바이오 장기와 기계식 장기로 나뉘는데, 한국의 기계식 인공장기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꼽힌다. 많은 인재가 연구에 매진하고 있고 임상 적용이나 정부의 지원도 활발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이들은 황 박사를 비롯,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위시한 일련의 바이오 인공장기 연구자들이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도 앞에 나서지 않고 묵묵히 연구실을 지켜왔다.
국내 기계식 인공장기 분야의 1인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연구자들은 주저 없이 서울대 의대 의공학교실 민병구(閔丙九·64) 교수를 꼽는다. 민 박사는 국내 최초로 인공신장과 인공심장을 개발해 의공학도 사이에선 ‘인공장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인공장기 개발 연혁(표 참조)을 살펴보면 ‘한국에도 이런 과학자가 있나’ 하는 탄성이 흘러나온다. 그는 황우석 박사와 함께 정부로부터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지정됐지만, 그의 이름은 좀체 신문 지면을 장식하지 못했다.
의대 교수가 된 기계공학도
5월2일, 민 교수를 만나기 위해 철쭉꽃이 한창인 서울대 병원을 찾았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게 쑥스럽다며 한사코 만남을 사양했던 터라 깐깐한 선비의 이미지를 상상했지만, 연구실로 들어서니 초롱초롱한 눈매의 노교수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따뜻한 녹차를 권하면서 “평생 연구실에서만 지낸 내 얘기가 뭐 재미있다고…”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의공학을 처음 접한 것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후 2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1968년 미국 유학을 갔을 때였죠. 전공분야를 정하려 하는데, 당시 미국에선 의공학 연구가 막 시작되던 참이었어요.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에 의공학을 택했는데 이렇게 미쳐버릴 줄은 몰랐죠.”
미국 럿거스 대학 의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교수는 뉴욕의 마운트사이나 의대 병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미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병원. 2년간의 연구원 생활을 마친 그는 모교인 럿거스 대학에서 러브콜을 받고 조교수를 맡아 연구를 이어갔다. 그러던 1979년, 미국생활을 급거 정리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해 서울대 의대는 선진 의료장비들을 들여와 국내 의료 수준을 한 단계 높이려 시도했다. 그런데 어렵게 도입한 최신 의료장비들을 조직적으로 연구, 관리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더욱이 국내 최초로 의대 안에 의공학과를 설치했는데, 당장 교수직을 맡을 사람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소문한 끝에 민 교수를 찾아내 그에게 SOS를 요청했다. 민 교수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조국의 부름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시 쓰는 과학자
그가 미국에서 시작한 인공심장 연구는 한국에서도 계속됐다. 의공학과 주임교수직과 인공심장 개발자 노릇을 겸하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1984년 본격적으로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 프로젝트’에 돌입한 그는 3년 만에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을 완성해 미국 특허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국제적으로도 시선이 집중된 연구 성과들을 부지런히 발표한다. 연일 휘파람을 불며 승전고를 울리던 나날이었다.
민 교수의 얘기를 듣던 중 그의 책상 위 진한 흑색 표지의 두꺼운 전공 서적들 사이에 있는 ‘수상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크림색 표지에 단아한 글씨체로 씌인 민 교수의 시집이었다. 제목은 ‘안개 속의 화살’. 필자가 “언제 시를 다 쓰셨느냐”며 놀라워하자 “연구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좌절을 일기처럼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것인데, 제자들이 강권하는 바람에 책으로 내게 됐다”며 무안해했다. 시집은 2002년 그의 환갑을 기념해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