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北, ‘최후의 선택’과 대내·대남·대미전략

김정일 대외비 연설 “남조선 경제 장성했으나 결심만 하면 먹을 수 있다”

  • 이교관 한반도문제 평론가 leekyokwan@hanmail.net

    입력2006-11-06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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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정권은 물론 자신의 생명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일련의 도발을 강행하는 속내는 무엇인가. 최근 우리 정보당국이 입수한 그의 대외비 연설 내용을 통해 그러한 의문에 접근해본다. 7월 미사일 시험발사 직후 당·정·군 간부들을 상대로 한 이 연설 내용을 살펴보면 최근의 초강경 노선이 북한 내부의 결속과 남한의 대선, 미국과의 협상이라는 세 층위에서 검토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北, ‘최후의 선택’과 대내·대남·대미전략
    “한번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병력을 나누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지방을 잃는 것이 낫다.” 이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제의 아포리즘은 ‘모든 것을 얻으려다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니 원하는 분야에 제한된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7월5일의 미사일 시험발사부터 10월9일 핵실험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취한 일련의 의사결정은 이 아포리즘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1950년 6·25 남침 이래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러일으킨 도발이 3개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감행됐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경제 및 군사제재로 정권유지 자체가 위협받을지 모르는 도발을 그 짧은 기간에 잇달아 일으킨 김 위원장의 속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국제사회가 크게 우려할 만한 도발을 감행할 때마다 미국 일본 한국 일각에서는 ‘김정일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김 위원장은 그러한 공감대가 혹시나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제한적인 군사공격으로 이어질까 우려해 어김없이 잠행했다. 미사일 시험발사 직후 종적을 감췄던 그는 핵실험 직후에도 전혀 일정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보당국은 그의 잠행 코스가 미국의 크루즈 또는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이 어려운 산악지대나 신의주 등 중국 인접지역일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호 동지(김정일)’의 동선(動線)을 아는 참모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김 위원장은 자신의 속내를 북한매체를 통해 공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핵실험을 통해 얻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의문은 풀 수 없는가. 다행히도 우리 정보당국은 미사일 시험발사 직후 김 위원장이 당·정·군 간부들을 상대로 한 대외비(對外秘) 연설 내용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김 위원장이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 감행으로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 우리 정부가 최소한 ‘절반의 정답’은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김정일의 대외비 연설

    연설 내용을 확인한 정보당국의 판단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결심하면서 가장 깊이 고려한 요인은 ‘북한 내부의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본인이 직접 내부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때문에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미사일 시험발사가 남북관계에 초래할 악영향과 관련해 김 위원장은 “‘우리 민족끼리’는 당분간 중단해도 괜찮다”며 “파탄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남조선 경제가 장성했으나 언제든지 결심만 하면 남조선을 먹을 수 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가 결속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해서는 “감수할 수 있다”면서 “올해 안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정리하면 그가 미사일 시험발사를 통해 얻고자 한 세 가지 목표를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노린 첫 번째 목표는 북한 내부의 결속이다. 경제난과 식량난에 따른 주민 동요로 자신의 정권유지가 위협받는 수준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현재의 경제난을 미국의 전방위적 압박 때문이라고 호도하면서 ‘북한도 미국에 대항해 맞설 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주민들에게 불어넣으려 한 것이다.

    실제로 미사일 시험발사 직후 이 같은 논리가 북한 주민에게 어느 정도 먹혀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부 주민 사이에는 ‘미국놈들과 일본놈들이 벌벌 떨고 있다’는 얘기가 돌았고 인민군 고위간부들도 ‘우리나라에 미사일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최근 북한 내부 상황과 관련해 미사일 시험발사 전후와 핵실험 직전 방북했던 국내 대북지원단체의 한 관계자는 “북한 경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그는 휘발유 절대부족 사태를 들었다. 남포항에 남한이 보낸 지원물자가 도착해도 이를 제때 각 지역으로 실어 나르지도 못하는 형편이라는 전언이다. 10여 년간 북한을 드나드는 동안 정전(停電)사태를 늘 겪었지만 최근 몇 개월만큼 빈번한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올해 농사가 수해와 비료부족으로 잘 안 돼 식량난까지 심화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오랫동안 실증적인 지표를 통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관찰해온 한 북한 정치학자도 최근 북한 민심이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올여름 수해로 인한 엄청난 인명 및 재산피해로 ‘꽃제비(걸식 아동)’ 수가 증가하는 등 사회 곳곳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보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북한 내부에서 단순히 민심악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 위원장의 통치기반이 되어온 당·정·군 엘리트층의 동요가 감지되고 있다. 앞서 대북지원단체 관계자도 “주민동요는 물론 엘리트층의 동요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엘리트층의 동요

    특히 지난해 시작된 미국의 대북 금융압박에 따른 자금고갈과 대외결제 마비사태가 장기화해 김 위원장의 통치자금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 엘리트층 동요의 주요 원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통치자금 루트 방코델타아시아(BDA)에 개설돼 있던 50개 계좌가 미국의 압박으로 동결되면서 올해 내내 김 위원장이 당·정·군 측근들에게 여러 기념일 등을 통해 돈과 선물을 주던 관행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전 방위적인 대북압박은 BDA에 머물지 않는다. 이 사건 이후 북한에 계좌를 개설해줬다가는 미국 금융 시스템으로의 접근을 금지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전세계 금융기관들이 앞다퉈 북한과의 금융거래를 중단하는 도미노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그 결과 대외결제가 사실상 마비되면서 북한은 달러·엔·유로·바트 등 외화 위조를 통해 한 해 1억달러가량 벌어들이던 수입도 급감했다.

    이와 함께 부시 행정부의 주도로 2003년 출범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이 회원국을 60여 개국으로 늘리면서, 한 해 10억달러 규모를 자랑하던 미사일 수출 등 북한의 무기와 관련물자 수출도 된서리를 맞았다. 9월7일에는 키프로스가 시리아를 향해 이동식 레이더 21대와 지휘차량 3대를 싣고 가던 북한 선박을 나포하는 일도 있었다.

    PSI에 의한 대북압박은 북한의 또다른 주수입원인 담배 밀수와 위조담배 수출도 어렵게 하고 있다. 북한의 담배 밀수는 9월24일 그리스가 150만갑의 밀수담배를 실은 북한선박을 적발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그리스가 올 들어 적발한 밀수담배 400만갑 중 300만갑이 북한 선박에서 발견된 것이다.

    미사일 시험발사의 두 번째 목표는 대남 혁명역량의 강화이다. “남조선 경제가 장성했으나 언제든지 결심만 하면 남조선을 먹을 수 있다”는 김 위원장의 발언은 미사일 시험발사가 궁극적으로 남한 경제를 인질로 삼는 결과를 가져와 대남 혁명역량을 강화할 것이라는 속내를 보여준다. 이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인 대포동 12호 등 미사일 개발이 대남 혁명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입증한다.

    세 번째 목표로는 미국을 북-미 양자회담으로 유도해 올해 안에 대미 관계개선을 이루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9월 열린 4차 6자회담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핵무기 개발프로그램을 폐기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이후 미국의 금융압박이 시작되자, 다자회담의 틀 안에서 핵개발 포기의 대가로 북-미 불가침협정 체결을 이끌어낼 전망이 어두워졌다고 본 김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이후 6자회담을 거부해왔다. 대신 미국을 양자회담 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한 전술로서 미사일 시험발사를 선택한 것이다.

    김 위원장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강행해 노린 목표는 이 세 가지라고 우리 정보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불과 석 달 만에 다시 한 번 핵실험을 강행한 것은, 이러한 목표 달성에 차질이 생겼음을 의미한다는 게 정보당국의 평가다.

    우선 내부결속의 경우, 주민은 물론 엘리트층의 동요도 잦아들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심각해 과연 핵실험 카드가 먹힐지는 의문이라는 게 앞서 대북지원단체 관계자의 지적이다. 핵실험이라는 초강수가 만들어지는 데 ‘수령 결사옹위’를 유일한 목표로 삼는 선군(先軍)정치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선군정치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정책결정 과정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당과 내각을 압도했다. 김 위원장이 대남·대미정책에서조차 노동당 통일전선부나 외무성보다 군부의 의견을 더 존중한다는 것이다. 핵실험 결정과정에서도 외무성과 군부간 견해차이가 컸을 것이라고 한 대북정책당국 관계자는 분석했다.

    北, ‘최후의 선택’과 대내·대남·대미전략

    평양 대동강변에 전시 중인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주목할 것은 북한 외무성의 핵실험 예고성명이 나온 지 이틀 후, 그동안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던 김 위원장이 군 대대장 및 대대 정치위원들과 회동한 사실이 보도됐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주요 결정에 앞서 인민군의 핵심 간부층인 이들을 만나는 경향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 보도는 핵실험 강행을 알려주는 지표였음에도 미처 이를 간파하지 못했다고 한 북한 문제 전문가는 털어놓았다.

    남한 대통령선거 겨냥

    김 위원장이 핵실험을 통해 노리는 대남정책의 목표는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의 집권을 저지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노동당 대남부문 출신 탈북자는 분석했다. 대북정책 당국의 한 관계자도 김 위원장이 현재 남한 정세와 관련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내년 대선에서 보수세력이 집권하는 사태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대외결제 마비사태로 가중된 북한의 경제난은 중국의 국영상업은행인 중국은행이 북한 계좌를 동결하는 등 중국 정부까지 압박에 동참하면서 더욱 나빠지고 있다. 1월10일 김 위원장이 예정에 없던 중국방문을 단행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한은 동북아 국가 중 유일하게 북한의 숨통 구실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대북지원을 이어왔다.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된 이래 남한에서 북한에 송금된 경화는 대략 매년 1억달러 규모다. 이는 주요 수입원인 미사일 및 위조화폐 수출, 마약·담배밀수가 위축된 북한에는 오아시스나 다름 없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한 금융기관들은 북한에 계좌개설을 거부하는 전세계적인 금융압박 흐름과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 보수세력이 집권하면 남한마저 금융압박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고, 북한의 경제난은 더욱 가중돼 주민과 엘리트층 동요는 극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김정일 정권의 붕괴는 초읽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가 내년 대선에서 보수세력의 승리를 원치 않는 것은 이처럼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서라도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핵실험을 통해 그가 내부와 대남 차원에서 노리는 목표는 서로 맥락이 통하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북한이 남한의 대선에 간여하는 수준이 핵실험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데 있다. 앞서의 대북정책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이 연말을 전후해 서해 해안포로 우리 해군 함정들을 기습적으로 포격하는 등 여러 차례의 국지전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연평해전이나 서해교전 때와는 달리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입증된 상태이므로 우리군이 물리적 보복을 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무력 비대칭에서 발생하는 이 같은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북한이 남한 국민에게 보수세력이 집권하면 전쟁도 불사할 테지만 현재의 햇볕정책 세력이 재집권하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할 경우 내년 대선의 향방은 가늠하기 어렵다. 핵실험 성공으로 남한 국민은 북한의 인질이 돼버린 셈이지만, 북한이 군사적 협박공갈을 반복하고 자기들이 가진 핵무기는 남한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선전할 경우 인질이 인질범의 논리에 동화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이 남한에서 확산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이 관계자는 전망했다.

    푸에블로호 납치 상황과의 공통점

    핵실험 강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검토해야 했을 대미관계 변수는 대남관계보다 훨씬 복잡하다. 특히 미국의 군사보복 가능성을 정확히 계산하는 일이 관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군부는 이라크 사태라는 수렁에 빠져 있는 미국이 쉽게 대북 군사 제재를 취하지는 못할 것으로 자신한 듯하다고 앞서의 관계자는 지적했다. 사실 2002년 10월 이른바 ‘2차 북핵위기’가 불거진 이래 북-미 양자회담을 고집하던 북한이 2003년 8월 6자회담에 참가하기로 돌아선 것은, 그해 3월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의 군사력을 목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8년 북한이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을 당시의 상황과 흡사하다. 이때도 북한이 미국과의 양자협상을 끌어내기 위해 푸에블로호를 납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베트남전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던 존슨 행정부가 북한에 군사적 보복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는 데 국내외 학자들은 의견을 같이한다. 존슨 행정부는 결국 그해 12월 우드워드 소장으로 하여금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 간첩행위를 한 것에 엄숙히 사과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하게 하고 나서야 북한에서 로이드 부처 함장 등 승무원 82명과 사체 1구를 인수할 수 있었다.

    핵실험을 통해 김 위원장이 노리는 대미목표는 단기와 중장기로 나눠 볼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어떻게든 금융압박을 해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핵실험 직후 북한의 2인자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일본 교도통신과의 회견에서 “미국이 금융제재를 해제하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금융제재가 해제되면 북한이 핵무기와 핵개발프로그램을 폐기하기로 합의한 9·19 공동선언을 이행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미 국방부 아태지역담당 부국장을 지낸 척 다운스는 저서 ‘북한의 협상전략(Over the Line)’에서 “북한은 협상에 응하겠다고 양보하는 것만으로도 대가를 얻어왔고, 합의에 도달하더라도 일방적으로 폐기하거나 합의 내용을 정반대로 해석해 협상을 파탄낸 뒤 또다시 복귀조건으로 이득을 얻어내는 식의 행태를 반복해왔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조건 없이 9·19 공동선언에 합의하고 하루 만에 “경수로를 제공하면 핵무기와 핵개발 프로그램 폐기에 응하겠다”고 해 합의를 뒤집었다. 이번에 북한이 금융제재를 해제하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고 나오는 것 역시 협상 복귀를 대가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전술에 따른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여전히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 폐기에 합의할 것처럼 위장해 미국을 북-미 양자회담으로 끌어낸 뒤 북미 평화협정 또는 불가침조약을 체결해 주한미군 철수를 통한 한미 정치군사동맹을 해체하는 데 있다는 게 우리 대북정책정보당국 관계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들에 따르면 핵실험은 김정일 위원장의 핵 카드가 노리는 진정한 목표가 핵무기 보유국 지위였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즉 그간의 협상에서 결과에 따라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할 것처럼 내비친 것은 위장전술에 불과했고, 김 위원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핵무기를 갖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금융압박 해제를, 중장기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통한 한미 정치군사 동맹 해체를 관철하기 위해 김 위원장은 또다시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 폐기에 합의할 것처럼 위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들 관계자의 전망이다. 금융제재를 해제하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김영남 위원장의 언급은 그 같은 전망을 뒷받침한다.

    정해진 로드맵

    돌이켜보면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향한 김정일 위원장의 로드맵은 매우 구체적으로 진행돼왔다. 1994년 북한은 영변 흑연감속로 가동중단을 조건으로 경수로 2기를 제공받는다는 제네바 기본합의에 서명함으로써 마치 자신들의 핵개발 목적이 핵무기 제조가 아니라 전력생산인 것처럼 전세계에 위장했다.

    우리 대북정책정보당국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 김 위원장이 제네바 기본합의로 일단 핵무기 보유국 지위 달성시기를 늦춘 것은 핵무기를 제조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핵무기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대륙간탄도미사일과 그 미사일에 실을 정도의 소형 핵무기 제조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면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성공한 1998년 8월31일이 바로 그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소형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시점이라는 게 이들 관계자의 분석이다. 김 위원장이 대포동1호 미사일 시험발사를 감행한 목적은 미사일 탑재용 소형 핵무기 개발에도 성공했음을 미국에 간접적으로 알리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北, ‘최후의 선택’과 대내·대남·대미전략
    이교관

    1965년 강원도 양양 출생

    한국외대 독어과 졸업,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북한통일정책학과 석사, 서강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시사저널’ ‘조선일보’ 기자

    저서 ‘레드라인, 북핵위기의 진실과 미국의 한반도 시나리오’ 등



    북한이 위장전술을 버리고 다시 공개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행보를 보인 것은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 핵무기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지 않냐는 미국의 추궁을 받고 이를 시인하고 나서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제공받게 된 매년 50만t의 중유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경수로 2기의 공사일정과 관련해 미국이 계속해서 핵사찰을 강요하자 핵무기 보유라는 최종 목표를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한 북한이 이를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2005년 2월 북한이 핵무기 제조와 보유를 공식 선언했다는 사실은, 북한이 6자회담 참여와 불참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최소한 8개 이상의 핵무기를 제조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고 우리 정보당국 관계자는 밝혔다.

    한미 정보당국은 북한의 이 같은 핵무기 개발 로드맵을 간파하고 수년 전부터 내부적으로는 북한을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10월9일 핵실험 직후의 관전 포인트는, 북한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운반체까지 만드는 데 성공했음을 한국과 미국이 다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굳이 핵실험을 하면서까지 노리는 목표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제 ‘10·9 이후’의 북핵 문제는 그 목표를 달성하려는 김 위원장의 다양한 벼랑끝 전술에 한미 양국이 과연 정치군사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효과적으로 대응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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