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특별수사’ 대부 김성호법무부 장관

“검찰 내 ‘썩은 사과’ 솎아내고, 마구잡이 ‘떼법’ 반드시 뿌리 뽑는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6-11-08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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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무 수장 오른 천막 공민학교 출신 판잣집 소년
    • “법무부, 검찰 내 감찰부서장, 징계위원회 외부인에 개방할 터”
    • “수서 사건 노태우 대통령 관련 의혹, 담당 바뀌면서 수사 못해”
    • “공직부패 가장 심한 곳은 건설·건축 분야…교육계 촌지도 여전”
    • 경찰 수사권 독립 관련, “수사기능 보장하는 제도 구상 중”
    • “법무장관 첫 수사권 발동은 강정구 사건 아닌 서석재 사건”
    • 이용훈 대법원장 공판중심주의 행보, “방향은 맞다. 그러나….”
    • 조훈현 9단에 석 점 놓고 이긴 바둑 실력
    ‘특별수사’ 대부 김성호법무부 장관
    김성호(金成浩·56) 법무부 장관은 나라를 뒤흔드는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사에 참여한 검찰 특별수사의 산 증인이다. 1979년 검사로 임관해 처음으로 참여한 특별수사가 1981년 박영복씨 부정 대출 사건이다. 그 뒤로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 사기사건, 영동개발진흥과 조흥은행의 금융 부정사건, 율곡비리,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로 이어진다. 서울지검에 근무하거나 시골 검사로 내려가 있을 때도 큰 사건이 생기면 대검 중앙수사부에 파견돼 수사를 맡았다.

    김영삼 정부 때 이형구 노동부 장관이 산업은행 총재 시절 대출 커미션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 검사의 수사 ‘작품’을 당시 동아일보 양기대 기자가 1면 톱기사로 특종 보도했다. 현직 장관을 구속하는 것을 청와대가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김 검사는 오랜 내사를 통해 증거를 완벽하게 찾아냈다. 공직자 재산 등록을 비롯, 공직사회 정화를 추진하던 김영삼 정부로서는 비리혐의가 드러난 마당에 장관의 구속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구지검장으로 있던 2003년 건국대에서 ‘공직부패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와대에서 그에게 논문을 몇 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있다가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부패방지위원회(현 청렴위원회) 사무처장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검찰을 떠나기 싫어 사절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불러 부패척결 의지를 강조하면서 부방위 사무처장직을 맡아 효율적인 반(反)부패 운영체계를 만들어달라고 강권했다.

    “5000년 역사에 부패 청산이 제대로 된 적이 없습니다. 논문을 봤는데 논문 내용을 현실 정책으로 옮겨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부방위에서 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직 검사장이 대통령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고 김포공항으로 가고 있을 때 라디오 뉴스에서 부방위 사무처장 내정 발표가 나왔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못을 박는 것 같았다. 그 후 검찰총장 후보 물망에 두 번씩이나 올라갔으나 비켜갔다. 노 대통령은 문재인 전 수석을 법무부 장관에 앉히려다 좌초하자 김성호 카드로 선회했다.



    ‘나가레(ながれ)’ 발언의 전말

    ▼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왜 ‘공직 부패’로 잡았습니까.

    “내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지요. 특수부 검사로 잔뼈가 굵었으니까요. 공직자 비리, 대형 경제사건 수사를 주로 하다보니 적발해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단계 뛰어넘어 제도적으로 부패를 축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오래 전부터 잘못된 제도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놓았다가 논문으로 발표한 거죠.”

    ▼ 박영복씨는 대출사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람인데, 지금은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검사로서 처음 맡았던 특별수사죠. 원래 그 사람이 1974년에 사고를 쳐서 구속됐죠. 그러다 형집행 정지로 밖에 나와 있으면서 두 번째로 부정대출을 받았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척하면서 병원 바로 밑에 요정을 차려놨어요, 거기에 유령회사를 여러 개 만들어놓고 은행대출 사기를 치고 있었어요. 해외에 유령회사를 만들어놓고 캄프리 원액을 수출한다면서 사실은 한강 물을 실어 보냈죠. 그렇게 신용장을 만들어 시중 금리보다 엄청 싼 금리로 은행에서 수출지원 금융을 받은 거죠. 수사를 진행해 1982년 형집행 정지를 취소하고 기소했습니다. 몇 달 걸려서 수사를 진행한 힘든 사건이었어요. 그 사건이 마무리돼가는 도중에 건국 이후 최대 어음 사기라는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져 그 수사에 차출됐죠.”

    ‘특별수사’ 대부 김성호법무부 장관
    그가 1982년 목포지청 검사로 내려가 있을 때 명성 사건이 터졌다. 명성그룹 김철호 회장은 한국에 처음으로 콘도미니엄 문화를 도입해 급성장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씨 관련 루머가 퍼지면서 세무조사를 받은 후 주저앉았다. 이 사건으로 명성그룹의 콘도와 골프장은 ‘한화’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목포지청에 근무하고 있는데 명성 사건 수사에 참여시키려고 서울지검으로 발령을 내더군요. 지검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대검 중수부로 파견명령을 받아 수사를 시작했죠. 그 다음에 영동개발진흥 사건이 터졌습니다. 장영자, 명성, 영동개발진흥 3개를 묶어 언론에서 ‘장명동 사건’이라고 작명했어요.”

    ▼ 1995년 서석재 전 총무처 장관의 술자리 발언으로 촉발된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맡았다가 수사를 마치면서 ‘나가레(ながれ·무효)’라고 했죠. 명예롭지 않은 일 아닌가요.

    “서 장관이 술자리에서 기자들한테 ‘전(前) 정권 실세가 4000억원을 바꿔주면 정치자금 2000억원을 내겠다고 했다’고 말한 데서 비롯된 사건이죠. 그 말 한마디밖에 없었습니다. 서 장관의 발언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안우만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했어요.”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발언 사건 수사 때 천정배 전 법무장관이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자 언론은 ‘건국 이후 첫 발동’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서 장관 발언 사건 때도 안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 문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수사지휘권 발동 문서의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첫째 서 장관이 그러한 발언을 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 둘째 만일 그런 사실이 있다면 그러한 자금이 존재하는지의 여부, 셋째 그러한 돈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조성됐는지를 조사해 보고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서 장관을 조사해 9단계를 거쳐 이모씨라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나왔죠. 그래서 전국 금융기관을 다 뒤져 그 사람 이름으로 된 자금을 다 조사했지요. 그런데 안 나왔어요. 끝이지요. 그러니까 자금이 없는 것이지요.

    그 돈이 전직 대통령과 관련이 있었다면 그때 수사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서 장관이 이야기한 그 돈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폭로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죠. 특수 3부장을 할 때였는데 검사들을 데리고 중앙수사부에 가서 그 수사에 매달렸죠.”

    의혹 남긴 수서 사건, 과연 진실은?

    ▼ 구시대에는 특별수사를 하다보면 정권의 압박을 받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까.

    “박영복, 장영자, 명성 사건은 검찰에서 스스로 인지했다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물의가 빚어져 수사하게 된 것이라 정치권력이 제어할 방법이 없었지요. 언론이 앞서 보도하니까요. 저는 별로 정권의 압력을 받지 않았어요. 공안사건 쪽에는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수사 환경이 좋지 않지만 그때는 내사를 심도 있게 진행할 수 있었죠. 내사를 통해 사건화할 때쯤에는 증거자료가 거의 완벽하게 구비돼 있는 상태이지요. 그런 사건에 대해 누가 ‘하라 마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이형구 장관 구속할 때도 끈덕지게 건의했습니다. 장관 구속하려면 보고해야 하니까 검사 혼자서는 할 수 없죠.

    수서 사건은 분위기가 안 좋았어요. 수서택지 개발은 그전까지 모든 부처가 반대하던 것이었습니다. 국회는 물론이고 건설부와 서울시가 전부 반대했는데, 하루아침에 허가 내주는 쪽으로 바뀌었죠. 수서 때도 내가 조금 관여하다가 기획하는 쪽으로 임무가 바뀌는 바람에 직접 조사하지 못했죠. 나중에 그게 걸리더라고요. 그런 사건은 기분이 좀 언짢지요. 여야 국회의원 몇 사람이 구속됐는데, 과연 그 사람들 힘만으로 됐을까요?”

    ▼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과 노 대통령의 뇌물 수수관계가 드러났죠.

    “그러니까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요. 처음부터 그것이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할 때 정태수씨가 노 대통령한테 100억원 준 것이 드러났죠. 그런데 수서 사건은 무슨 압력을 받아서 그런지, 그게 우리의 한계인지….”

    ▼ 아무래도 그 시절에 현직 대통령이 관련된 부분은 수사하기 어려웠겠죠.

    “그렇죠.”

    김 장관과 인터뷰하는 날 공교롭게도 청와대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한 취재 거부를 해제했다. 조선일보 칼럼이 노무현 대통령을 ‘계륵’으로 표현한 것과 동아일보 칼럼의 ‘약탈 정부’ 표현을 문제 삼아 청와대가 7월28일 취재 금지를 선언한 지 두 달 만이었다. 윤태영 대변인은 동아·조선에 대한 추석 선물인 것처럼 생색을 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메이저 신문과 정부의 껄끄러운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장관이 메이저 신문의 인터뷰를 사절하는 법은 없었다. 어떤 장관은 사석에서 필자에게 ‘신동아’ 인터뷰에 등장시켜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대통령 홍보수석을 맡으면서 장관들이 청와대 눈치를 보며 인터뷰를 꺼리기 시작했다. 조 교수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안티 조선’ 운동을 했다.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상수 전 의원이 노동부 장관으로 내정되고 난 뒤 홀가분한 마음에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조기숙 홍보수석이 전화를 걸어 “김 장관님, 대통령님이 무척 실망하실 겁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김 전 장관은 “재야에 있을 때는 나도 안티 조선 운동을 했지만 국록(國祿)을 받는 자리에 앉아서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연된 정의는 불의보다 못하다’

    김성호 장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할 때만 해도 청와대의 ‘동아·조선 취재 금지’가 풀리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그는 며칠 뒤 선뜻 인터뷰 날짜를 잡아주었다. 취재금지가 해제되는 날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사실 김 장관과는 특수부 ‘초급 검사’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그가 국회 인사청문회에 제출하는 증인 후보명단에 언론인으로 필자를 넣겠다고 요청했을 때도 “뜻대로 하시라”고 말한 적이 있다.

    ▼ 이용훈 대법원장이 밀실 수사의 산물인 검찰 조사를 집어던지라고 발언해 파문이 일었습니다. 이 대법원장이 사과는 했지만 공판중심주의를 밀고 나갈 태세인데요.

    “공판중심주의의 요체는 공판정에 모든 증거를 현출(顯出)해 거기서 법관이 심증을 형성한다는 뜻이거든요. 불문법 체계를 갖춘 영미 국가에서 발달한 제도지요. 말하자면 배심재판하고 맞물려들어가야 합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배심원이 결정을 하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는 피고인의 방어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반성적 고려가 있었습니다. 특히 시국사건에서 피고인이 검찰 조서를 법정에서 부인하는데도 그냥 증거로 채택해 유죄 판결이 내려졌거든요.

    공판중심주의라는 방향은 옳습니다. 다만 형사소송법은 두 가지 이상을 추구합니다. 하나는 인권이고 하나는 실체적 진실의 발견입니다. 피고인의 인권옹호 측면에서 공판중심주의는 상당히 유용합니다. 다만 이것이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최선의 제도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의견을 조금 달리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임무는 죄지은 사람을 적발해 처벌함으로써 선량한 국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권을 존중해야 된다는 뜻이지, 죄지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가 적절히 조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온정주의 때문에 법정에서는 진실을 말하기가 힘듭니다. 목격자라 하더라도 자기 상사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거든요. 아무도 없는 데서 이야기하기가 쉽지요. 진실 발견의 효율성도 짚어봐야 합니다. 재판이 지연될 가능성도 있지요. 전에는 서류를 중심으로 재판하니까 빨리 진행할 수 있었는데, 이야기를 다 들어주자면 재판 진행이 늦어집니다. ‘지연된 정의는 불의보다 못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공판중심주의 관련 법률안에는 집중심리 제도가 들어 있습니다. 며칠씩 계속 심리해서 심증이 흐트러지기 전에 법정에서 다 처리하자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한 법관이 한 법정을 써야 합니다. 물적·인적 비용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검사도 증원해야 합니다. 경찰관의 법정 출석도 늘어나죠. 집중심리 제도는 1심에서 사실심리가 다 끝나야 합니다.

    수사기관의 손을 묶어버리고 그냥 무조건 기소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공판중심주의를 하는 미국에는 플리바기닝(유죄 협상)과 참고인 구인 제도도 있거든요. 공판중심주의로 옮겨가려면 검찰 수사를 보완하는 그런 제도를 같이 연구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 미국의 제도가 세계 표준이 되는 현상이 사법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판중심주의와 배심제도 그렇고, 로스쿨도 마찬가지지요.

    “경쟁력 있는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로스쿨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제도로는 법률 공부해서 사법시험에 합격만 하면 법관이 되지요. 다른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이 법조계에 부족합니다. 다만 반대하는 사람도 많아요. 법과대학에서도 반대합니다. 법조인을 연 1000명 정도 뽑는다고 하면 로스쿨의 정원을 1200명 정도로 해야지요. 그렇게 되면 일부 대학만 로스쿨을 할 수 있지요. 지금 상당히 진전돼 있기 때문에 되돌리기는 어렵습니다. 로스쿨은 이상적이고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쉽지 않아요.”

    국회보다 더한 청와대 인사 검증

    ▼ 공판중심주의를 하면 법원의 권한이 커지고 검찰의 권한이 축소되는 측면이 있죠. 경찰 수사권 독립이나 공수처도 그동안 너무 비대해진 검찰 견제용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검찰 내부에서 경찰 수사권 독립과 공수처에 강력히 저항하고 있습니다. 경찰 수사권 독립은 대통령선거 공약입니다. 그러나 임기가 1년 4개월 남았는데, 이제 물 건너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검찰이 세긴 세다는 이야긴데요.

    “어느 쪽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느냐 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경찰이 실제로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생침해 사범 같은 경우 그렇지요.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줄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경찰과 검찰의 시각 차이가 커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죠. 점진적으로 해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도 협의하고는 있지만 순조롭지는 않습니다. 법무부로서는 절차 면에서 경찰의 수사 기능을 보장하는 몇 가지 제도를 시행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찬반양론이 원체 극명하게 갈려 있어요.”

    ▼ 민주화 이후 보안사 안기부의 권한이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검찰의 권한이 세지면서 ‘검찰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동안 법질서가 확립되지 않았을 때 검찰의 활약이 컸지요. 검찰이 가령 학교 일도 관여하고, 경찰 업무도 간섭하면서 검찰 본연의 임무보다도 다른 업무를 많이 한 경향이 조금 있었지요. 이제는 상당히 정리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아직도 ‘로비’ 하면 정경유착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국가청렴위원회에서 만들겠다는 로비 양성화 법률이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까요.

    “한국이 세계 10~12위 경제대국이거든요. 국민 개개인이 국회와 행정부에 접근하기 힘들어요. 결국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비를 안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이것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음성적 로비가 자꾸 늘어나게 되지요. 저는 이것이 부패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로비스트로 등록하고 담당하는 사건과 수임료를 신고해 제대로 세금 내도록 투명한 제도를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아무도 몰래 살짝 하다보니까 정책이나 입법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 청와대에서 장관 또는 부총리 후보를 인선할 때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공개 망신당하기 싫다’며 고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살아온 인생역정이 다 까발려져도 자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인사청문회 겪으면서 어땠습니까.

    “여러 사람이 도와줘 잘 넘어갔다고 생각하는데, 청문회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업무 역량과 도덕성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근거 없는 풍문을 인용하는 ‘카더라’식 질문도 많거든요.

    결국 본인에게도 상처를 주고, 그 사람이 장으로 취임하는 조직의 명예나 권위에도 타격을 주게 됩니다. 당리당략에 따라 인사 청문회를 하다보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요. 임명동의가 필요 없는 국무위원의 경우 상처 주기밖에 안 됩니다. 좌우지간 앞으로 공직생활 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할 수밖에 없겠어요.”

    김 장관은 “청와대 검증도 너무 까다로워 장관 안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계좌추적 동의서를 받고 계좌를 샅샅이 뒤져 조금 큰돈이 움직인 사례는 모두 해명과 입증자료를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특별수사’ 대부 김성호법무부 장관
    눈물의 부산중 입학금 5300환

    ▼ ‘바다이야기’ 수사에선 생각만큼 대어(大魚)가 낚이지 않는 것 같아요.

    “언론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정치권에서도 이야기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검찰은 최선을 다해 수사하고 있습니다. 소위 로비 의혹을 밝혀내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요.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조금 기다려줘야 합니다. 지금 수사가 광범위하게 벌어져 있거든요.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로비 의혹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신속하게 처리해달라는 뜻을 검찰에 전달했습니다.”

    ▼ ‘헌법 위에 떼법’이라는 속언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에 법을 무시하고 집단의 힘으로 억지를 부려 목적을 관철하는 ‘떼법’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국민이 신뢰하지 않는 정부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국민이 정부가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과거에 법을 좀 어겨도 관용하는 관행이 우리한테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일제 침략기에 생긴 문화거든요. 그 시대에 정부 요구를 거부하고 법을 어겨도, 어떤 면에서 애국자로 평가될 수 있었죠.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인권이 억압된 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항해 위법적인 행동을 해도 정치권력의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그냥 용인되는 측면이 있었단 말이지요.

    지금은 식민통치 시대도 아니고 군사독재 시절도 아닙니다. 정통성을 가진 민주정부입니다.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하게 존재하거든요. 그런데도 불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선량한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고, 단속하는 공무원들한테 행패를 부려도 괜찮다면 이것은 법치국가로 볼 수가 없어요. ‘떼법’ 근절이 법무부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다른 부처나 기업에서도 떼법과 쉽게 타협해버리면 안 됩니다. 불법 집단행동을 하는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정말 법대로 해야 합니다. 뜨거운 난로에 손을 대면 데어야 합니다. 법을 어기면 그만큼 손해가 가야죠. 그래야 법을 지키지요.”

    딱딱한 화제가 오래 이어진 것 같아 우리 모두 가난했던 1960년대로 이야기를 돌려보았다. 경남 남해에서 농사를 짓던 그의 부친은 논밭을 팔아 부산에서 건축업을 벌였으나 참담하게 실패했다. 부모와 5남매는 부산 연제구 거제동의 옹벽에 기대 지은 판잣집에서 살게 됐다. 과일상자에서 뜯어낸 판자로 바람과 햇볕을 가리고 지붕은 콜타르 칠을 한 루핑으로 덮었다. 집 한가운데로는 하수가 흘렀다.

    공부를 잘하던 소년은 학교 친구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입주(入住) 과외교사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졸업할 때 5개 학급 300명 학생 중에서 1등을 했다. 부산에서는 경남중과 부산중이 최고였다. 그는 부산중에 합격했다. 그런데 입학금 5300환(화폐개혁 이전)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입학금 액수를 기억하고 있다. 거제초등학교 수석졸업자가 중학교를 못 가게 되자 아버지와 삼촌이 나서 아는 국회의원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부산 브니엘고 개교 이래 최초 司試 합격자

    그가 이번에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그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게 됐다. 거기에 ‘부산중 진학’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이 중학교 진학자 수보다 훨씬 많았다. 그가 아마 부산중에 들어갔더라면 변양균 대통령정책실장, 송철호 고충처리위원장, 김성진 해양수산부 장관, 박정규 변호사와 동문이 됐을 것이다.

    그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남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부산에서 공장에 다녔다. 그는 그 여동생만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프다.

    집 근처 교회에서 박성기 목사가 공민학교를 만들어 중학교에 진학 못하는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두 학급이었다. 한 학급은 차고에서, 한 학급은 차고 옆 천막교실에서 공부했다. 차고 교실이 천막 교실보다는 나았다. 비가 오면 천막교실은 빗소리가 콩 볶는 소리처럼 요란하고, 교실에 물동이를 놓고 빗물을 받았다. 그는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다.

    그가 고교 1학년 때 천막 학교가 브니엘실업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중학교 졸업장은 없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박 목사는 학생들에게 오뚝이 정신을 주입했다.

    ‘아무리 던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가 되라.’

    ‘칠전팔기(七顚八起).’

    그가 학교 다닐 때 박 목사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이다. 학교 교훈이 무척 길었다. 그중 한 구절은 ‘나는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이 되련다’였다. 학교엔 늘 가족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2학년이 되면서 대한민국 경제도 나아졌고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도 집을 한 채 지어 팔면서 형편이 피었다. 정규 중학교 진학도 못했던 그에게 대학 갈 운이 돌아왔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으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지명(地名)이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 학교에서는 대학입시 준비를 시키지 않았다. 상업선전과, 관광과 두 반이 있었다. 그는 관광과였다. 음악 미술 부기 주산에다 ‘민속대요(民俗大要)’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데모를 주동했다. 영어 수학 국어만 가르쳐주고 미술 음악 체육은 좀 빼달라는 데모였다. ‘전인교육’만 받다가는 대학도 못 들어가고 취직도 못할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데모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오전수업만 했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집에서 독학을 했다.

    서울대 입시를 치려면 제2외국어를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실업고에서는 제2외국어를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진학(進學)’지에서 고려대가 ‘안암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읽고 원서를 보냈는데 ‘그 학교는 안암장학생 응시자격이 없으니 본고사에 응시하기 바란다’는 답장이 왔다. 고려대는 제2외국어 과목을 요구하지 않아 본고사에서 거뜬히 합격했다.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제1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브니엘고 개교 이래 첫 사법시험 합격자였다. 모교 교문에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는 고시 합격 전에 결혼하는 바람에 ‘처가 덕’을 보지 못했다.

    ▼ 공민학교에 다닐 때 중학교 모자 쓴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습니까.

    “제가 키는 좀 작지만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부러워하지 않았어요. 남의 집에 가서 살면서도 그랬죠. 생각이 좀 모자란지, 감성이 모자란지, 별로 부러워하지 않았어요. 좋은 중학교 모자 쓴 아이들 보면 길고 짧은 거는 대봐야 안다는 생각을 했죠. 좋은 학교 다니는 친구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거든요. 오히려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보니까 학교라는 게 영향을 주더라고요. 학벌이 상당히 중요합디다.”

    박주선 전 의원과의 인연

    지금 젊은 검사들은 고교평준화시절에 학교를 다녀 그런 영향이 작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검찰에는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부산고 경남고 경북고 광주일고 대전고 전주고 같은 명문고 인맥이 강했다.

    “내가 검사 되고서 법무부 근무를 못해봤어요. 대형 사건만 터지면 불려다니며 고생하는데도 인사 때는 객관적으로 좋은 자리에 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때는 좀 섭섭했죠. 그래서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인사를 참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 입학금 5300환을 마련해 부산중에 들어갔더라면 당하지 않았을 서러움이군요.

    “말하자면 그런 거지요. 우리끼리는 서로 알잖아요,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떨어져도 학교가 좋으면 커버되더라고요.”

    그는 동창들과 돈을 모아 브니엘 장학회를 만들어 가난한 후배 5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필자가 “지금은 평준화 세대가 밀고 올라오니 앞으로 검찰에 학벌 문제는 없겠군요”라고 말하자 김 장관은 “저는 그래서 고교평준화제도에 찬성하는 사람이지요”라고 말했다. 필자는 “평준화제도에도 보완해야 할 점이 있지만, 여기서 논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박주선 전 의원과 검찰 동기생이다. 검찰에서는 둘 다 특수부 검사로 명성을 날리며 보직을 앞뒤로 따라다녔다. 대검 연구관도 같이 했다. 박 검사가 중앙수사부 2과장 할 때 그는 3과장, 박 검사가 1과장 할 때는 2과장을 했다. 그가 서울지검 특수3부장을 할 때 박 검사는 2부장을 했고, 박 검사가 1부장을 할 때 그는 2부장을 했다.

    ‘특별수사’ 대부 김성호법무부 장관

    자신의 논문 내용을 설명하는 김성호 법무부 장관.

    “참 훌륭한 친구이지요. 일도 잘하고 역량도 있죠. 저는 박 검사 덕을 봤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같이 출발했으니까요. 당시 검찰에 두 사람을 묶어서 대접해 주는 관행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박 검사가 잘되면 나도 잘됐죠. 나는 인사 걱정이 없었어요.

    그런데 헤어졌죠. 청와대로 가는 바람에 그때부터 내가 외로워지기 시작했지요. 혼자서 해결해야 하니까 그것이 만만치 않았지요. 그 다음부터 별로 좋지 않았어요. (웃음)”

    고향이 전남 보성인 박 검사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들어갔다.

    ▼ 박 검사가 청와대에서 힘쓸 때 덕 좀 보았습니까.

    “글쎄 덕을 많이 베풀었겠지요.”

    답변이 모호하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크게 물먹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빛을 본 것도 아니다.

    한고청향(寒苦淸香), 간난현기(艱難顯氣)

    ▼ 박 전 의원이 친정인 검찰에 세 번 구속된 후 모두 무죄를 받았는데요. 왜 그렇게 보복을 당했습니까. ‘삼종삼금(三縱三擒)’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친정에서 너무한 것 아닌가요.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요. 다른 사건은 잘 모르겠고, 첫 번째 사건은 검찰이 그리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론의 압력이 심하긴 했지요. 대통령한테 보고한 문서를 김태정 검찰총장한테 보여준 혐의로 구속기소됐는데, 총장한테 조심하라고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지요. 기소가 잘못됐어요. 저는 물론 그때는 다른 데 근무했기 때문에 거기 관여하지 않았지만. 유죄라고 생각이 들더라도 불구속기소했어야지요. 법률가로서 납득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검사는 수사할 때 여론의 압력이 있더라도 심사숙고해 결정해야 합니다. 태풍이 불 때는 그냥 휩쓸려가기 쉽거든요. 당하는 처지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일생을 좌우하는 문제인데….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은 잘 모르겠습니다. 뒤의 두 사건은 증거 판단에 관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겠죠.”

    ▼ 김 장관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청소년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해주시죠.

    “사람이 일시적으로 곤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단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건강도 그럴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환경에 있으면 더 나빠질 것이 없잖아요. 좋아질 일만 남는 거죠. 청소년이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은 참 소중하다고 봅니다. 어른스러워지는 것이죠. 하루아침에 그것이 극복되겠습니까. 어린 학생들 눈에는 부유한 사람 또는 건강한 사람들이 어른거리겠지요.

    오히려 환경이 좋은 사람들은 자만하기 쉽고 안주하기 쉽거든요. 환경이 나쁜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는 훨씬 더 성숙할 수 있죠.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지요. ‘한고청향(寒苦淸香).’ ‘매경한고 발청향(梅經寒苦 發淸香)’의 준말입니다. 매화는 추운 겨울의 고통을 겪어야 맑은 향기를 낸다는 뜻이죠.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인봉간난 현기절(人逢艱難 顯氣節)’이란 말도 있어요. 사람은 간난을 넘어서야 기개가 나타난다는 뜻이죠.”

    ▼ 국제투명성기구(TI)의 국가별 부패지수를 보면 한국은 40위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2005년 한국의 부패지수는 10점 만점에 5.0으로, 159개국 가운데 40위를 차지했습니다. 경제규모나 올림픽 또는 월드컵 성적에 비해 현격하게 낮은데요.

    “2003년에 50위, 2004년 47위, 2005년 40위 이렇게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습니다. 왜 빨리 개선이 안 되느냐 하면 우리나라에 소위 연고주의, 온정주의가 강하거든요. 무슨 사건을 처리해도 엄격하게 하지 못하고 좀 봐주는 거죠. 가령 촌지를 준다든지, 추석 선물을 돌리는 것을 우리는 인정으로 생각하는데 국제 기준으로 보면 부패이거든요.

    아직도 외국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의 투명성이 부족해 믿고 일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어요. 의혹사건에 대한 신문 보도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민간 분야의 부패는 정부가 손대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우리보다 앞선 국가는 주로 유럽 쪽에 많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 캐나다, 칠레 세 나라밖에 없어요.”

    빛과 소금의 법칙

    ▼ 칠레를 제외하고는 중남미 국가의 부패가 심한 편입니까.

    “심합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다 우리만 못해요. 아프리카 쪽도 형편없지요 아시아도 마찬가지죠. 아시아에서 우리보다 나은 데가 일본, 말레이시아, 대만, 그리고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와 홍콩 정도입니다. 그런데 대만과 말레이시아는 우리보다 꼭 좋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홍콩 정치경제위험자문공사(PERC)라는 기구에서 나온 투명지수로는 우리가 대만과 말레이시아를 따라잡았어요.

    실제로 요새 공공기관의 부패는 많이 줄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제도 개선을 많이 했어요. 국세청 세무조사도 과거에는 완전히 자유재량에 속했기 때문에 세무조사만 나오면 부패가 따랐죠. 기준과 원칙을 세워 세무조사를 하고 그것을 공개하도록 하면서 국세청 비리도 크게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요즘 같은 명절 때 국세청에 뭐 갖다주느라고 기업인들이 정신이 없었지 않아요.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서 그리고 부방위 사무처장 경험에 비추어, 부패 문제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않은 분야는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특정 기관의 이름을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쪽 기관의 명예가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건설·건축 분야에 부패가 많아요, 지방정부도 마찬가지죠. 예산 규모가 큰 공사 발주와 건축 인허가 같은 거죠. 건설·건축 분야에 업자들의 로비가 성행하고 있죠. 안타깝게 교육계도 좋은 평가를 못 받고 있습니다. 큰 부패는 아니지만, 촌지는 없어져야 할 문화죠. 액수는 작지만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배운 것이 사회생활로 연장될 수도 있고요.”

    ▼ 다른 동네 이야기만 했는데, 검찰은 깨끗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얼마 전에도 판검사가 관련된 법조비리가 터져 충격을 줬는데요.

    “매우 부끄러운 일이죠. 가장 깨끗해야 할 사정(司正)의 중추기관인 검찰에 법조비리가 잔존하고 있어 국민께 송구스럽죠. 법조비리의 첫째 원인은 윤리의식의 결여입니다. 온정주의라든지 부적절한 교제가 별 저항 없이 이뤄지고 있거든요, 청탁하는 문화가 남아 있죠. 그 다음에는 전관예우가 있습니다. 전관예우가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를 부르거든요. 사건 브로커도 없어져야죠.

    이런 문제점들을 없애기 위해 빛과 소금의 법칙, 썩은 사과 솎아내기 법칙 같은 것을 적용하려 합니다. ‘빛의 법칙’은 투명하게 하는 것이지요. 검찰과 법원의 일처리를 투명하게 해 국민에게 알려줘야죠. 사건처리 기준, 양형(量刑)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구속이 되겠다’ ‘안 되겠다’ ‘형은 몇 년 받겠다’ 하는 기준이 나와 있으면 법조비리가 확 줄어들지요.

    ‘소금의 법칙’은 예방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죠. 판·검사 임용제도도 성적 순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죠. 윤리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어요. 판·검사 윤리강령도 구체적으로 만들고, 어겼을 경우 처벌받게 하는 것도 정하려고 합니다.

    또한 대검 감찰부장이나 법무부 감찰관을 개방직으로 하려고 합니다. 징계위원회도 내부직원으로만 구성했는데 절반은 외부인에게 개방하려고 합니다.”

    ‘전공노’ 주장 이해할 수 없어

    김 장관은 “판·검사가 퇴직 후에 자기가 근무하던 검찰청이나 법원의 사건을 맡아 대리를 하는 것이 보기에 어떻습니까”라고 인터뷰어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필자는 “변호사의 개업지 제한이 위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보기에 정서상으로 안 맞지요”라고 답변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종전의 법으로는 경기도 북쪽 도시에서 군법무관으로 일하던 사람이 서울에서 개업하는 것도 걸렸어요. 개업지를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것은 저도 위헌이라고 봅니다. 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려면 법을 정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가령 자기가 근무했던 청이나 법원만 제한하면 되죠. 예를 들면 판사는 검찰청 사건은 맡을 수 있는 거죠. 검사는 법원 사건은 맡을 수 있죠. 그런 식으로 하면 더 낫지 않을까 해서 지금 연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위헌도 피하고, 국민 보기에 전관예우 관행이 사라졌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습니다.

    ‘썩은 사과 솎아내기’ 법칙은 처벌을 확실히 해 잘못된 사람을 완전히 제명하고 뽑아내버리라는 것이지요. 감찰활동을 강화하고 내부 고발자 보호 제도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검사 징계 제도도 고쳐 해임할 수 있도록 했지요. 해임되면 연금에서 불이익을 받죠.”

    ▼ 전공노(전국공무원노조)는 노동 3권을 달라며 등록조차 안 하고 법외노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을지포커스 훈련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는데요. 법무부 산하기관에는 전공노가 없습니까.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봉사자입니다. 일반 근로자와는 달라요. 이런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불법 행동을 해서는 나라가 유지될 수 없죠. 저는 전공노의 불법 집단행동에 대해 엄격하게 대처하려 합니다.

    을지연습을 뭐 때문에 합니까. 국가 차원에서 총체적인 위기관리를 위한 훈련이지요. 물론 남북간에 약간의 화해와 평화 무드가 조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늘 대비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전공노는 ‘을지연습이 한반도의 긴장과 전쟁 위험성을 높이고 남북교류 및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징계 여부는 관계부처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실정법 위반에 대해서도 현재 내사 중입니다. 매우 우려할 만한 사태입니다. 법무부에는 전공노에 가입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공노가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 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는.

    “평화 공존 또는 평화통일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러니까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인 국가보안법 또는 국가안보에 관한 법체계를 다 없애버리면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선 상대방보다 내가 힘이 약하면 두드려 맞지 않습니까. 협력할 것 있으면 협력하고 화해할 것 있으면 화해해야 하지만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법체계는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름이나 법체계를 조금 손질할 수는 있겠지만 안보위협이 확실히 제거됐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만 무장해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에 국가보안법 운영과정에서 인권 침해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남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있습니다. 국회에서 여러 가지 개편법안이 나왔는데, 여야 합의를 통해 국가안보에도 걱정이 없고, 인권 침해 소지도 없는 좋은 형사법체계가 만들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법무부 교정국은 직원이 1만3800여 명에 이르는 방대한 기구이다. 전경과 비슷한 경비교도대도 3900명. 교정시설 수용자는 4만8000여 명. 교정직원 한 명이 세 명 가량의 수용자를 관리하는 셈이다. 교정국 1년 예산은 8900억원으로 법무부 전체 예산의 47.7%를 차지한다. 인생 막장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관리하다보니 사고가 그칠 날이 없다.

    “CCTV를 늘려 올해에만 110여 명의 자살 기도자를 살려냈습니다. 7, 8명이 자는 방 안에서 새벽에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때는 CCTV로 발견하고 교도관이 뛰어가보면 이미 숨이 끊어져 있는 경우도 있죠. 자살 방지를 위해 심리 치료사를 채용하려 합니다.”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추지 않는다

    ▼ 젊은 시절에 읽은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대학 때 읽었습니다. 데미안은 완전무결한 인물이죠. 주인공 싱클레어는 계속 방황하고 불완전한 속에서 데미안을 향해 나아가는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죠.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는 구절을 좋아했어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에게 알은 조용하며 따뜻하고 안락한 곳입니다. 가녀린 몸으로 두꺼운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그때까지 안주해온 자신의 세계를 깨뜨리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냥 편안하게 자신의 세계인 알 속에 안주한다면 새는 결국 죽어서 썩고 맙니다. 젊은 시절에 그 문구가 아주 강렬하게 와 닿았습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여러 유형의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우리의 대학 시절은 좀 어두웠습니다.”

    김 장관은 68학번이다.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준비하는 시기에 대학을 다닌 세대.

    “그때 데모를 많이 했지요. 고려대에 위수령이 내려져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탱크를 몰고와 진주했죠. 그 다음부터는 데모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사회이념 쪽보다는 인생, 사랑, 진리 이런 개똥철학에 빠져 있었어요. 데미안도 그 시기에 읽은 책이죠.”

    그는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할 때 서예를 배웠다. 춘천지검 구내 정자의 ‘만파식정(萬波息亭)’ 현판은 그가 쓴 것이다.

    “서예에 좋은 점이 있습디다. 옛날 말치고 나쁜 말이 하나도 없어요. 좋은 말을 정성들여 쓰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어요. 아주 편안해지고 맑아지는 효과가 있다고요.”

    ‘논어(論語)’에 나오는 일월무사조(日月無私照)라는 글을 좋아한다. 그의 공직관이다. 해와 달이 사사로이 비추지 않듯이 공직을 사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바둑 실력은 정상급 아마추어다. 아마 5단으로 조훈현 기사에게 석 점 놓고 이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고시공부할 때 바둑을 두다 회심의 한 판으로 상대에게 패배했다. 이에 절치부심해 집념으로 바둑공부를 했다. 바둑에 빠진 사람이 고시 패스한 게 신기하다.

    ‘김폴레옹’

    ▼ 신체적인 콤플렉스에 관해서 여쭤보면 결례인데…별명이 ‘김폴레옹’이라면서요. 기록을 위해 정확한 수치를 알고 싶습니다.

    “내가 제법 큽니다. 160cm가 조금 안 돼요. 키 좀 크면 좋을 것 같아요. 높은 데 물건도 끄집어낼 수 있고. 이종원 변호사가 이철희·장영자 사건 수사할 때 법무부 장관이었죠. 그 분이 장관 그만두고 영동개발진흥 사건 변호인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공소유지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난공불락’이라면서 ‘김폴레옹’이라고 별명을 지어줬어요.”

    ▼ 검찰에서 벌이는 폭탄주 금지운동은 잘돼가고 있습니까. 과거 폭탄주와 관련한 대형 사고가 검찰에 여러 건 있었지요.

    “저도 폭탄주를 하면 다음날 힘들어요. 되도록 안 마시려고 합니다. 법무부, 검찰에서도 낮에는 일단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밤에 하는 거야 사생활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터뷰가 끝나자 저녁 6시였다. 인터뷰에는 김수남 홍보관리관(차장검사)이 배석했다. 김 장관이 저녁을 같이하자고 했다. 김 장관은 밀린 결재를 하고 조금 늦게 나왔다. 법무부 문성우 검찰국장, 김수민 보호국장과 동아일보 허승호 논설위원, 김정훈 법조팀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평준화 세대인 허 위원은 김 장관의 브니엘고 후배. ‘하나님의 얼굴’에서 배운 사람들은 서로 좋아한다. 폭탄주는 돌지 않았다.

    김 장관은 필자에게 “사형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필자가 “연쇄 살인범 유영철 같은 범죄자를 살려두는 것에 대해 다수 국민이 동의하겠느냐”며 사형제 찬성에 가까운 견해를 밝혔다. 그러자 김 장관은 “유영철은 법정에서도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구했다”며 사형제도의 존폐를 결정하기 위해 용역 연구를 줬다고 말했다. 미국의 계량경제학자들은 사형이 살인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김 장관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다산 정약용. 다산의 ‘견여탄(肩輿歎)’이라는 시를 제일 좋아한다. 꽤 긴 시인데 앞 두 행만 소개한다.

    人知坐輿樂(사람들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不識肩輿苦(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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