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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부산, 인천, 원산 담보로 미국 병사 20만 빌려 천하를 얻으리라”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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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1884년 9월 장로교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알렌은 1905년 5월까지 21년간 조선에 머물면서 의료, 선교,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하영은 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인 1858년 경남 동래군 기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이 매우 구차해 동생 이준영과 함께 기장에서 동래장을 내왕하면서 찹쌀떡 행상을 다녔다. 끼니나마 때울 요량으로 통도사에 동자승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1876년, 그의 나이 열아홉 때 부산이 개항되자 혈혈단신 부산으로 이주해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집안이 한미하고 가난한 탓에 한문은 물론 한글조차 깨치지 못했지만, 점원으로 일하는 동안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깨닫고 밤낮으로 일본어와 일본 상인의 상술을 익혔다. 그렇게 8년을 열심히 살다보니 일본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고, 장사 밑천도 어느 정도 마련됐다. 개항 초기다보니 아직 조선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1884년 스물일곱이 된 이하영은 고용살이를 청산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사업은 평소 알고 지내던 평양 출신 상인과 동업으로 일본과 조선을 왕래하며 무역을 하는 것이었다. 이하영은 제2의 임상옥을 꿈꾸며 동업자와 함께 나가사키로 건너갔다.

그러나 믿었던 동업자는 낯선 도시 나가사키에서 동업 밑천을 몽땅 챙겨 도주해버렸다. 8년 동안 모은 전 재산을 장사 한번 해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날린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이하영은 하늘을 원망하며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가 올라탄 배는 상하이를 출발해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향하는 여객선 난징호였다.

난징호에는 이역 땅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조선으로 향하는 또 한 명의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의료선교사 알렌이었다.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한 알렌은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지원해 중국 선교사로 발령 받았다.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한 알렌은 난징과 상하이를 거점으로 의료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년 동안 넓디넓은 중국 땅을 발바닥에 땀나도록 쫓아다녔지만 선교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반서양적, 반기독교적 편견으로 가득 찬 중국인들을 상대로 선교 사업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국의 비위생적인 환경은 출산을 앞둔 아내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중국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알렌에게 동료 의사인 핸더슨 박사가 조언했다.



“중국에서 겉돌 게 아니라 조선으로 가는 게 어때? 조선은 개신교 선교사가 아직 들어가지 않았어.”

조선이 개신교 선교의 불모지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알렌은 곧장 뉴욕에 있는 장로교 선교본부에 조선으로 선교지를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 조선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찾고 있던 선교본부는 알렌의 신청을 신속히 승인했다. 1884년 9월, 알렌은 상하이에서 난징호에 올랐다. 근대 조선의 외교를 좌지우지한 두 ‘58년 말띠’ 동갑내기의 극적 만남에 대해 이하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갑신년(1884) 가을이다. 나는 이역 땅에서 비범한 사람을 만났다. 어떤 일이 있어 일본 나가사키에 갔다가 배편으로 귀국하는 길에 선상에서 알렌이라는 미국인 의사를 만났다. 서양의학을 선전하기 위해 동양에 파견되었다는 알렌은 초면인 나를 몹시 따뜻하게 대했다. 처음 청국 상하이에 와서 얼마를 지내다가 껄끄러운 인정 풍속에 쫓겨 역시 미지의 나라 조선을 찾아오는 알렌으로서는 조선 사람인 나를 따뜻하게 대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외국인이라면 모조리 호랑이나 표범같이 여기던 당시의 나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처음 만났으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친밀해진 우리는 인천 부두에 내렸다. 나는 알렌이 조선에서 최초로 사귄 지우(知友)이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이하영과 알렌이 처음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어나 영어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1882년까지 조선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83년에 단 한 사람이 생겼는데, 바로 윤치호다. 윤치호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다가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통역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윤치호조차 일본에서 겨우 넉 달 배운 영어로 통역노릇을 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윤치호는 영어 통역 초기에는 일본어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이중 통역했다.

1883년 민영익을 수반으로 하는 보빙사(報聘使) 일행은 워싱턴 방문길에 중국어-영어, 일본어-영어, 조선어-중국어, 조선어-일본어를 구사하는 4명의 통역을 데리고 갔다. 체스터 아더 미국 대통령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면, 한편으로는 중국어-영어 통역이 중국어로 옮기고 그것을 받아 조선어-중국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어본-영어 통역이 일본어로 옮기고 그것을 받아 조선어-일본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겨서 두 가지 이중통역을 종합하면 민영익 일행이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했다. 난징호 선상에서 이하영과 알렌은 아마도 일본어-영어 통역을 매개로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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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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