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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부산, 인천, 원산 담보로 미국 병사 20만 빌려 천하를 얻으리라”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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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서 빈털터리가 된 이하영은 어차피 부산으로 돌아가봐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귀국길 선상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귄 김에 무작정 그를 따라나섰다. 1884년 9월20일, 난징호가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닿을 때만 해도 이하영이나 알렌이나 앞길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렌에게 맡겨진 첫 보직은 주조선 미국공사관 무급 의사였고, 이하영에게 맡겨진 첫 보직은 무급 의사 알렌의 요리사였다.

갑신정변, 그리고 권력과의 만남

미국공사관이 알렌에게 제공한 것은 가족과 함께 살 집이 전부였다. 알렌의 요리사로 일하는 동안 이하영은 알렌에게 영어를 배웠고 알렌은 이하영에게 조선어를 배웠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크게 쓰일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알렌이 조선에 들어온 지 석 달째 되던 1884년 12월4일 밤, 누군가 황급히 알렌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제 저녁 산책을 끝낸 후 10시30분에 집으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자마자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외국인이 나를 불렀다. 거실로 나가보니 주조선 미국공사관 스커더 비서였다. 스커더는 죽어가는 사람의 응급치료를 위해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급히 와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우정국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저녁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불길이 번졌으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왕비의 조카이자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도가 민영익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자객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알렌의 일기’ 1884년 12월5일자)


알렌이 ‘개신교 선교사상 가장 획기적인 날’로 명명한 그날 밤, 우정국 개국 축하만찬 석상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알렌은, 온몸에 자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의 목숨을 극적으로 구해냈다. 알렌이 민영익의 치료를 위해 며칠밤을 지새우던 동안 곁에서 같이 밤을 새운 조선인이 있었다. 바로 이하영이었다.



알렌이 민영익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갑신정변 때였다.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의 곤봉에 맞아서 사망설이 나돌 정도로 중상을 당했다. 한의(韓醫)들이 백방으로 치료를 해보았지만 차도가 없어 양의(洋醫)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즉시 나를 찾아와서 의논했다. 나는 알렌을 민영익에게 안내했다. 민영익은 건강을 회복한 후 알렌과 친교를 맺게 되고 미국을 친근하게 여기게 되었다. 알렌의 자국 찬미가 민영익과 나에게 미국을 존경하게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죽어가던 민영익을 회생시킨 것을 계기로 알렌은 세도가 민씨 가문과 조선왕실의 신임을 얻어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됐다. 미국공사관 무급 의사로 조선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일약 어의(御醫)로 승차(陞差)한 것이었다.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을 세워줄 것을 건의해 승낙을 받아냈다. ‘개신교 선교 사상 가장 획기적인 날’ 민영익이 개화당 자객의 칼에 맞지 않았다면 쉽게 받아내기 어려웠을 승낙이었다. 이듬해 4월, 조선왕실은 최초의 근대식 병원 광혜원(개원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하고 알렌을 의사로 초빙했다. 알렌은 조선에서 사귄 최초의 지우 이하영이 새로 설립된 제중원의 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알렌에게 영어를 배운 지 1년 만에 이하영은 더듬거리면서 몇 마디씩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영어통역관 윤치호는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1883년 조선 정부는 외국과 교역에 필요한 영어통역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영어교육기관을 설치했지만, 졸업생들의 영어실력은 영 신통치가 않았다. 덕분에 이하영의 더듬거리는 영어는 당시 조선 안에서 조선인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어였다.

알렌은 이하영을 자신의 통역으로 삼았다. 알렌의 더듬거리는 조선어와 이하영의 더듬거리는 영어로 두 ‘58년 말띠’가 한참 동안 씨름하면 대충 뜻은 전달됐다. 알렌은 진료를 위해 고종을 알현할 때도 이하영이 함께 가길 원했다. 그러나 벼슬이 없는 이하영은 관복을 입고 어전에 나갈 수 없었다. 사정을 들은 고종은 배운 것도 변변치 않고 집안도 한미한 이하영에게 외아문 주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더듬거리는 영어실력 하나로 출세의 탄탄대로에 들어선 것이다.

해프닝, 해프닝, 해프닝

박정양 공사 일행은 안내책임을 맡은 참찬관 알렌과 그의 하인 김노미까지 도합 11명이었다. 1887년 12월10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이래로 조선공사 일행에게 선상 생활과 미국 생활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사고와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알렌은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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