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 양건 외 지음, 대화문화아카데미, 454쪽, 1만5000원
강원룡 목사의 사진이 걸린 큰 방에서는 북악산 능선 너머 멀리 한강 줄기가 내려다보인다. 그곳에서 보면 2008년 여름 대한민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세 종류의 개헌 논의가 시야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정치인들의 논의’다. 과반수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참여한 미래한국헌법연구회(공동대표·이주영, 이낙연, 이상민 국회의원)는 이미 여러 차례 개헌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의 공언대로 18대 국회에 개헌특위와 헌법연구자문기구가 구성되면, 이 논의는 곧바로 ‘제도적인 의미’까지 가지게 될 전망이다. 심지어 청와대의 입장정리 여부와 상관없이 국회가 중심이 되어 개헌 논의가 본격화하리라는 예상마저 있을 정도다.
그 다음으로는 국회 주변을 바라보면서 한국사회의 제 정파가 진행하고 있는 각개약진식의 논의다. 개헌의 범위, 시기, 추진방식, 정치적 파장 등을 두고 정당, 언론, 시민사회단체들은 정치적 득실 계산에 돌입한 지 오래다. 2007년 초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했던 이른바 ‘원포인트 개헌론’이 외면 당한 것은 각 정파들로부터 내부 논쟁의 기회를 빼앗은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개헌의 구도와 전선이 어떻게 형성될 것인지를 초미의 관심으로 지켜보면서 제 정파는 명분과 논리를 가다듬고 있다.
‘제3의 개헌 논의 대표선수’
마지막으로는 이 두 종류의 개헌 논의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헌법에 대한 시민적 숙고를 시도하는 또 다른 개헌담론이다. 바람직하기로는 헌법학회나 정치학회 같은 학술단체들이 이 역할을 맡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학계는 헌법을 두고 시민들과의 진지한 소통을 시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이 세 번째 개헌 논의는 시중을 내려다보는 눈길을 거두고 지식인들의 산중문답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4년 동안 진행됐던 대화문화아카데미의 대화모임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는 한국사회가 보유한 제3의 개헌 논의의 대표선수다.
최근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같은 이름으로 펴낸 이 책은 그동안의 산중문답에서 지식인들 사이에 오간 발제와 토론 내용을 꼼꼼히 채록한 일종의 현장기록이다. 아마도 기자나 정치평론가들은 맨 처음 이 책에서 현실적으로 개헌 논의의 최대 쟁점인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선호 및 지지도’를 찾아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이 책이나 대화모임의 기획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앞의 두 가지 개헌 논의 중 어느 하나와 성급하게 연결시키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목적은 그와는 정반대일 수 있다. 앞의 두 가지 개헌 논의와 같은 ‘정치적/정략적 담론투쟁’에서 한 발 물러나는 것이 더욱 필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 책은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의 산중문답은 이 물러남의 미학을 담아내는 독특한 대화 형식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시중에서 벗어나야 하며, 말하기보다 듣기에 익숙해져야 하고, 또 듣고 생각한 내용을 곰삭일 숙성기간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기획 의도가 대화모임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책의 곳곳에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 (헌)법학자들과 비(非)법학자(정치학자, 철학자, 정치인 등)로 대별될 수 있는 발제자들의 구성이 그러하다. 이 구성은 그 자체로서 개헌 논의에 전문적인 테크니션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 전자와 정치적/정략적 판단의 논리와 근거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은 후자에게 공히 경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으로 읽힌다. 적어도 개헌 논의에 관한 한, 이 두 부류의 정치적 지식인들은 자기 지식을 믿고 고집을 피우기 전에 우선 서로에게서 많이 듣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일차적으로 현실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정치적/정략적’ 개헌 논의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중으로부터 물러나는 대신 문제의 핵심에 놓인 지식인들을 불러내어 산중문답식으로 서로 대화하게 하는 것. 이 독특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이 책은 통상의 개헌 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 가지 은폐된 문제를 대화의 전면에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정치체제(politeia)에 정치공동체(polis)를 부합시키려는 ‘폴리테이아니스트(politeianist)’와 정치공동체에 부합하는 최선의 정치체제(polity)를 찾아내려는 ‘폴리티아니스트(politianist)’의 대립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