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리공원 지석영 선생 묘(왼쪽).
수년 전까지만 해도 비디오 영화를 보면 항상 이런 문구가 앞부분에 나왔다. 불법비디오의 패악을 드러내기 위한 선전문구이지만, 여기서 천연두(마마)가 조선시대에 얼마나 무서운 병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마마는 조선시대 치사율이 30%를 넘나드는 불치병이었으며 용케 살아남은 사람도 그 자국이 얼굴에 남아 평생을 곰보로 살아야 했다. 바로 그 천연두를 사라지게 한 주인공이 송촌(松村) 지석영이다. 지금도 왼팔에 불주사 흔적이 없는 국민이 없으니 송촌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밀접하고 광범위한 은혜를 베푼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동락천 방향으로 1km 정도 걸어가면 오른편에 지석영 묘 입구가 보인다. 올라가는 길이 좀 애매한데, 잘 둘러보면 나무에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내판을 지침 삼아 오른쪽 2시 방향으로 올라가면 너른 터에 묘 두 기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생전의 지석영 선생.

지석영 묘 비의 앞뒤.
곰보의 은인
1931년 1월25일 매일신보는 “조선의 제너, 송촌 지석영선생, 곰보를 퇴치하던 고심의 자취. 신미(辛未)의 광명을 찾아”라는 제목으로 지석영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자료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읽기 어려운 부분은 일부 생략하며 현대문으로 고쳐 옮기면 이렇다.
“음력으로 섣달 스무닷새 날이었는데 좋은 재주를 배우고 또 약간의 약까지 얻기는 하였지만 도무지 그것을 시험할 데가 없구려. 비록 장가는 들어서 아내는 있으나 나에게 소생이 없으니 시험할 수 없고, 남의 자식에게 시험을 하자니 아직 우두(牛痘)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 부모가 허락할 리가 없고 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일 즈음에 마침 나이 어린 처남 아이가 생각납디다 그려.
그래서 한번 시험을 해보고자 하였더니 우두라는 것은 외국 사람이 조선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것인데 이 아들에게 놓는다니 될 말이냐고 장인이 펄펄 뛰며 나를 미친 사람으로 돌리는구려. 그러니 어디 해볼 수가 있소? 그러다가 내가 한 계교를 생각하여 사위를 믿지 않는 처갓집에는 있을 수가 없다고 그대로 상경을 하려고 하였더니 나의 정성에 감동이 되었음인지 그때서야 장인 되는 사람이 그러면 어디해보라고 어린 아들을내밉디다그려.
그래서 물실호기(勿失好機)라고 즉시 우두를 하였더니 사나흘 만에 팔뚝에 완연한 우두자국이 나지 않겠소? 그 나흘 동안 내가 가슴을 졸인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거니와 팔뚝에 똑똑하게 우두자국이 나타나던 그때 나의 기쁨이라고는 무엇에 비할 수가 없는 것이었소. 나의 평생으로만 보더라도 과거에 급제한 때와 유배에서 돌아온 때와 같은 크나큰 기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까 말한 그때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소. 그때 나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