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통신’의 주인이자 시인, 소설가 한귀남 씨.
“아,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그 유명한 호곡장론(好哭場論)이다. 연암은 말한다. 사람들은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 기쁨이 넘쳐도 울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고, 즐거움과 사랑이 터질 것 같아도 울고, 욕심이 가득 차도 울게 된다고. 즉 원인이 무엇이든 가슴이 꽉 막힐 땐 소리 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는 것이다.
1200리나 아득하게 펼쳐진 요동벌판.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 땅 끝이 맞닿아 아교풀로 붙인 듯’한 대평야. 연암은 비로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통쾌한 마음이 절로 들어 몇 번이나 무릎을 쳤다.
손바닥만한 조선 땅. ‘서로 나 잘났다’ 핏대 올리며 싸우는 좀팽이 선비들. 중국 변방의 토성쯤밖에 안 되는 땅에 살면서,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업신여기는 턱없는 허세, 한 줌도 못되는 상투를 갖고 세상에 잘난 척은 다하는 거드름. 연암은 ‘갓난아기가 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우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그것은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두려워서도 아니다. 삶의 고행을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아기가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보고 발도 펴보니, 참으로 가슴이 시원해서 나온 우레 같은 것’이다.
울고 또 울고
1980년대 대한민국 서울. 연암이 살던 때나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 시절. 겨울공화국. 숨이 턱턱 막히고 먹구름이 낮게 드리웠다. 자궁이 답답하고, 불알 밑이 뻐근했다. 장안의 논객 호걸들은 어디 울 만한 곳이 없었다. 모두 애꿎은 술만 퍼댔다.

시인통신은 해방구였다. 그곳은 술집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카페라고 하기에도 뭐한 묘한 곳이었다. 차라리 목로주점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옴팡 집이라고나 할까. ‘문화 복덕방’이요 ‘사람 복덕방’이었다. 촉수 낮은 알전구만 뎅그렁하게 매달린 2평짜리 공간. 술꾼들의 낙서가 사방벽면 천장 탁자 위까지 가득했다. 그중엔 명화 뺨칠 만한 그림이나 멋들어진 붓글씨도 보였다.
‘아이들은 데모하고, 어른들은 술 처먹고, 누나는 화장하고, 선거하는 놈들은 좆나게 바쁘다’/ ‘有酒有樂 無酒無樂(유주유락 무주무락)’/ ‘죽었으면 죽었지 지금은 죽을 수 없다’/ ‘목숨 바치세요. 술 마시려면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봅시다’/ ‘수많은 남자가 살고 갔지만, 당당한 대장부가 몇이나 될까?’/ ‘맥주는 길고 소주는 짧다’/ ‘허무 그 단단한 놈’/ ‘잘 사는 놈이 법을 지킬 때, 못 사는 놈은 기분이 좋다’/ ‘방관은 죄악이다’/ ‘깨어있는 것은 입밖에 없나보다’/ ‘하늘이 어두운 새벽, 사람들이 어둡게 살아가고 있다’/ ‘누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개수작했습니다. 누님은 여전히 누님이고 강물은 저렇게 흘러갑니다’
김재곤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툭하면 시인통신(이하 시통)에서 울었다. 눈물 콧물이 술잔에 뚝뚝 떨어지면, 그는 그 눈물콧물이 섞인 술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닦지도 않은 그 술잔을 다시 가득 채워 선후배들에게 권했다.
“봄은 왔어도 봄 같지 않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하고, 국가는 그걸 총칼로 막고…. 이게 무슨 개 같은 역사냐? 왜 이 나라는 이런 슬픈 역사만 되풀이되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