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2년 서울 출생 <BR>홍익대 회화과, 미국 프랫인스티튜트 회화 석사 <BR>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미술관 개인전, 미국뉴욕 퀸스미술관 특별전
그의 바다는 언제나 새롭고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지만, 듬직하게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일견 검은 또는 푸른 단색화처럼 보이지만 그 색을, 면을 채우는 선(線)들의 짜임을 보면 그 선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른 표정과 사연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를 만들고, 그 바다에 빠지고, 다시 바다에서 나와 바다를 관조한다. 이렇게 그는 작품과 일체를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접하고 범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면서 화면은 그려지는 동시에 그려지지 않은 면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긴장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의 작품은 음과 양의 대비이자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의 조화다. 동시에 행하는 사람과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행위의 무한함과 무상함을 보여준다.
선과 여백의 정반합
그의 회화는 자신과의 싸움, 시간과의 싸움이다. 대결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는 예리한 금속으로 마무리된 볼펜으로 화면을 범한다. 0.5~0.7mm에 지나지 않는 볼펜촉으로 계속해서 그어 넓고 큰 화면을 가득 채운다는 게 보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최근엔 스케일이 더욱 커져서 2×3.3m에 달하는 작품이 대종을 이룬다.
단순하게 시각적인 면에서 보면 밤새 일 삼아 무수히 선 긋는 행위를 반복한 결과 이외의 어떤 변화도, 의미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화면은 때로는 바다에 이는 포말처럼 빛의 재잘거림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이름 모를 꽃으로 피어오르기도 한다.
과정에 비해 결과가 간단하고 명료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그 넓은 화면을 단순하게 볼펜 하나에 의지해 수없이 반복되는 선 긋기로 채워 넣는 행위(아니 비워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를 묘사한다면 인고(忍苦)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일의 단순한 형태와 색채의 회화는 드로잉에 가깝다. 아니 드로잉이다. 드로잉이란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는 단순한 밑그림으로, 색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선을 사용하는 그림을 말한다. 완성작을 위한 습작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이일의 드로잉은 드로잉인 동시에 바로 작품이다. 즉 그에게 ‘그린다’는 의미의 드로잉은 곧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 즉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 그린다는 본질적 행동, 그림의 전제인 ‘그리다’라는 동사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볼펜으로 선을 그어 그린 그림으로 미국 화단의 주목을 받은 이일.
그의 회화에 대해 서양 비평가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은 여백을 중시한 한국을 비롯한 동양회화의 전통을 들어 수묵화의 새로운 형태로 해석하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그의 회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
물론 볼펜으로 그려진 면과 대비를 이루면서 여백이 한층 강조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여백이 없다면 행위의 결과이면서 선의 집적물인 면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여백만 남는다. 그 여백은 부재를 의미하지만 부재 뒤에는 언제나 떠오르는 새로운 존재로 인해 그 여백이 사라진다. 따라서 여백은 쓸쓸함 공허함을 상기시키지만, 한편으로는 그 여백을 메워줄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는 반어법적 의미를 갖는다.
험난한 뉴욕을 이기다
그의 회화가 주목을 받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1975년 대학 졸업을 한 해 앞두고 미국행을 결행한다.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가족들을 따라나선 것이다. 그림은 그에게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해주는 근거이자 삶의 동인이 되었다.
그는 그가 살던 답십리에서 가까운 동대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림을 그릴 운명이었던지 여기서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승조(화가·1941~1990) 선생을 만난다. 이후 미술실에서 숙식을 하며 작업을 하던 선생을 좇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직 이승조 선생을 사사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같은 울타리에 있는 동대문상고로 진학했을 만큼 선생과 깊고 질긴 인연을 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