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이일은 자동차 엔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계의 부속 또는 배관 같은 것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갈색 톤의 작품을 발표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당시의 교조적인 회화에 반(反)하는 작품이었다. 다른 동료들도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무모한 작업을 선보였다. 이렇게 화단에 얼굴을 내민 그들은 이내 청년문화의 기수로 회자되었고 새로운 앙팡테리블로 등장했다.
이후 그는 가족들이 있는 미국 LA로 떠났다. 그곳에서 발행되던 중앙일보에 자리를 얻어 만화와 삽화 그리고 광고면을 디자인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다. 하지만 말까지 서툰 낯선 이방인인 그에게 미국은 혹한의 땅 그 자체였다.
청년 이일은 LA보다는 뉴욕에서 화가로서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서울로 돌아와 한 학기 남은 대학을 마치고 졸업장을 얻어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얻어 뉴욕에 도착한 것이 1977년이었다.
뉴욕에 도착해 허름한 YMCA호텔에 여장을 푼 그가 처음으로 간 곳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다. 그에게 메트로폴리탄은 미술사(史)의 보고이자 미술의 향연장이었다. 두어 달을 그렇게 지내다 이미 뉴욕에 자리잡고 있던 화가 김차섭 김명희 부부를 만나게 된다.
부부는 이일이 뉴욕에 적응하고 자리를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가게에서 일을 도우며 이일은 한국에서부터 관심을 가졌던 판화에 몰두한다. 당시 한국은 판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장비와 재료의 부족으로 새로운 판화, 특히 동판화를 하기는 매우 힘든 형편이었다. 그는 뉴욕에서 판화다운 판화를 해볼 요량으로 프랫인스티튜트 판화과정에 등록했다. 1년 동안 판화를 수학한 그는 다시 같은 대학원에 진학해 회화를 공부, 1982년 졸업했다.
볼펜으로 날을 세우다

‘BL-084’, 2006, ballpoint pen on canvas.
또한 홍익대 동문으로 뉴욕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공부하던 이수임을 만나 결혼한다. 오늘까지 그의 지난한 세월을 함께하는 반려이자 동료인 이수임과 퀸스에 신접살림을 차린 그는 이내 브루클린으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판화를 공부하던 시절 그는 동판화, 특히 메조틴트나 드라이 포인트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런 경험이 볼펜을 사용해 그림을 제작하는 방법의 모티프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그는 뷰린을 사용해 무수히 반복되는 선으로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세밀한 대상을 묘사하는 기법을 썼다.
이렇게 그는 초기부터 선(線)에 몰두했다. 그에게 선은 그림을 결정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점(點)보다는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선을 회화의 실질적이며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인식한 때문이다. 사실 선이 없다면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빛이 없다면 그림이 있을 수 없지만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 존재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판화는 그에게 많은 모티프를 제공했다. 예를 들면 판화에서는 필요한 이미지를 얻으려면 판에 반대로 새겨야 한다. 이처럼 언제나 상대적인 것, 반대의 것을 통해 서로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현실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개념적이기보다는 실질적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의 기본은 선이며 그 선에 대한 생각은 여전하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의 표현 방법과 그 선을 통해 일구어낸 면과 면의 대비, 선과 선의 사이와 차이에서 나타나는 선의 표정이 다양해졌을 뿐이다.
1980년대 초기 작업은 주로 판화였다. 캔버스에 테이핑을 하고 바탕을 도려내어 선만 남긴 후 다시 바탕을 블랙 등으로 칠한 다음, 테이핑한 부분을 떼어냄으로써 화면 가득히 리드미컬한 선이 드러나도록 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