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너무 빨랐다. 그래서 몇 번이나 문제가 되는 경우를 봤다. 끝까지 너무 빨리 달려 그냥 골라인 아웃까지 해버리는 것이다. 좀 허무했다. 그러나 사이드라인을 지나 골라인을 지나도록 빠르게 달리는 차범근 선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유학생과 교민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아들인 차두리 선수도 자주 그런다.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
분데스리가가 단지 차범근 선수 때문에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차범근 선수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분데스리가는 여전히 재미있었다. 분데스리가에서는 축구를 보여주는 방식이 달랐다. 동일한 상황을 다양한 각도의 카메라로 찍어 보여줬기 때문이다.
남자가 축구를 좋아하는 건 그 안에 권력이 있기 때문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당시 차범근 선수는 정말이지 빨랐다.
축구를 보는 남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패다. 그리고 누가 골을 넣는지도 관심사다. 그것만으로도 남자들은 충분히 흥분한다. 실제 남자들의 관심은 온통 권력관계에만 집중돼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명함을 주고받는 행위도 서로 권력을 확인하는 행위다. 명함에 적힌 사회적 지위를 살피며 상호 권력관계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슈퍼 주인도 사장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사장이 하도 많다 보니 이젠 회장 명함이 없으면 제대로 대우받기 힘들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권력관계가 확인되면 그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구체적 행동원칙이 성립된다. 표정, 몸짓, 말투로 서로의 권력 서열에 따른 의례에 따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랫사람이 이 원칙을 어길 경우, 이후 어떠한 방식으로든 보복이 뒤따르게 돼 있다.
명함으로 권력 서열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 땅의 사내들은 잠시 당황스러워 한다. 권력관계가 없으면 관계도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열은 정해지게 돼 있다. 대학학번, 고등학교 기수, 심지어는 군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며 얻게 되는 다양한 번호는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여자에 비해 남자가 훨씬 더 많은 각종 ‘서열 변인’을 가진다. 이도 저도 아니면 마지막에는 서로의 고향을 확인해가며 순서를 매기려고 한다. 남자에게 대부분의 중요한 관계는 권력관계다.
철없는 사내들이 마지막으로 권력 서열을 확인하는 장소는 술집이다. 들이켜는 폭탄주의 양에 따라 또 다른 서열이 정해진다. 권력이 아무리 높아도 이 폭탄주 잔에 따른 서열이 떨어지면 수컷의 서열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와 마시는 폭탄주 잔의 양이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들이 축구에

한국 남자들은 명함으로 권력 서열을 매긴다.
권력 서열로 모든 사회적 관계가 결정되는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의 사회적 관계는 사뭇 다르다. 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서적 관계다.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마음이 통하는지가 여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결정한다. 함께 깔깔거리며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 수 있는 관계가 가능한지가 권력의 유무보다 더 중요하다. 관계적 사고에 앞서는 여자들의 특성은 심리학에서도 자주 확인된다.
남녀의 세계관 차이는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남자는 길거리에서 웬만해선 남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는다. 운전하다가 차를 세워 길을 물어보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다. 남자에게는 남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권력관계에서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찾아내려고 같은 자리를 맴돈다. 그러나 여자들은 이러한 남자의 행동을 이해 못한다. 단순히 길 물어보는 것이 뭐 그렇게 목숨 걸 일이냐는 거다.
이런 남자들이 열광하는 축구에 여자들이 무관심한 이유는 당연하다. 아이들처럼 공 하나 가지고 수십명이 몰려다니고, 고작 그물망에 차 넣는 놀이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