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제44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황혼일기

  • 이응수

황혼일기

4/11
황혼일기
×년 ×일 지공(地空) 65세

오전 11시가 되는 걸 보고 중앙통 반월당(半月堂) 사거리에 있는 S생명 1층 로비로 나간다. 어제 저녁, 설야(雪野)한테서 전화가 왔다. 설야는 친구 강문호의 아호다. 내가 알기로 죽어도 호 같은 건 안 찾을 사람이지 싶은데, 무슨 바람이 들었던지, 자기 보고 지어줄 사람도 없고 해서 자기가 하나 지었단다. 제대로 되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며 그렇게 하나 지어 우리한테 불러달라고 했다. 눈 덮인 들녘, 어쨌든 그럴싸했다.

요즘 주변에 호를 가진 친구들이 더러 있다. 하긴 우리 세대도 먹물이 튀어 밴 사람들은 모르지만 대부분 호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잉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했던가, 자작한 호를 조심스레 내비친 이도 있는데, 잘 써먹질 않아 모처럼 자기 호를 남이 불러줘도 모르는 난센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오늘 설야가 만나자는 건 별다른 일이 없으면 같이 문양에 가서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자는 것. 나한테 남아도는 건 시간뿐이니까 좋다고 해두었던 것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도 설야가 점심을 샀는데. 자꾸 얻어먹는다는 게 부담이 되기는 했으나 언젠가 ‘나는 지금도 조금씩 벌고 있으니까 요즘 젊은이들 말로 신경 끄라’고 해서 오라는 대로 나가긴 하는데, 잘하는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는 요즘 안경테 제조회사에 고문 비슷한 일을 봐주고 있다. 우리 나이에 그런 일자리가 잘 없는데 어쨌거나 땡 잡은 친구다.



점심때쯤 100여 평이 넘는 S생명 로비는 우리 나이의 사람들로 항상 득시글거린다. 시내 중심 지하철 1, 2호선이 교차하는 위치에다가, 냉난방이 되어 있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해서 우리 같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만나는 곳으론 딱 됐다. 커피 자판기, 화장실에 조그만 전시실까지 하나 있어 혼자 기다리기에도 심심하지가 않은 곳이다.

기업경영이나 마케팅 기법에 보면 주변 사람들과 친화력을 쌓는 것도 투자의 한 방법이란 말이 나오는데, 아마 그런 차원에서 만들어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한테는 그런 고마울 데가 없다.

회전문을 들어서는데 맞은쪽에서 설야가 손을 번쩍 들면서 일어난다. 그런데 옆자리에 아주머니 한 분도 같이 따라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눈인사를 건넨다.

“우선 서로 인사나 하지. 구체적인 얘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바로 지하철로 내려와서 문양 방향 지하철에 올랐다. 문양은 2호선 종착역이다. 거기에는 오래전부터 매운탕집이 많았는데 지하철이 개통되고 난 이후로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언젠가 보험 하나 들어주고 알게 된 아주머니가 있다더니 이 여자가 그 여자냐고 슬쩍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한창때도 그쪽으로는 호를 찼더랬는데, 이 나이에도 여전한 걸 보면 알아줘야 할 친구다. 하여튼 재미있게 사는 친구인 것만은 분명하다.

3년 전 일이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 미도다방에 들렀다. 나이가 드니 기분 좋게 들를만한 다방도 잘 없다면서 저쪽에서 거기로 나오라기에 나간 것이다. 미도다방은 대구에서 노인다방으론 이름난 곳이다.

그곳에서 우연히 나보다 여남은 살 위인 선배 한 분을 또 만났다.

“아따 이사람 오랜만이다. 자네도 이제 머리에 서리가 앉았네. 오래 몇인공?”

“선배님도 참. 저도 지공입니다.”

지공(地空)은 지하철을 공짜로 탈 나이인 65세를 일러 누군가가 만들어낸 속어다. 불혹(不惑)이니, 이순(耳順)과 같은 반열에 두고 곧잘 써먹는다.

“아, 그래. 벌써 그렇게 됐구나. 어쨌거나 아직은 좋을 때다.”

“좋을 때라구요?”

“왜 내가 말을 잘못 했는강.”

선배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마침 옆자리에 앉았던 주인마담 정 여사가 한술 더 떠 거든다. 그녀는 이미 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도 두어 번 나온 적이 있는, 거기 나드는 노인네들한테 우상이 돼 있는 여인이다.

“좋은 때구 말구요. 병아리구만요. 여기 한번 보세요. 선생보다 젊은 양반이 있는강.”

그러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보다 연장자로 보인다.

오늘 설야를, 설야가 데리고 나온 여자를 보니, 문득 참 좋을 때란 그날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여자를 만나면 저네들 둘이 만날 일이지 나는 왜 불러냈을까. 혹 점심 먹자고 불러내어 나한테 보험 들어달라고 압력 넣는 건 아닐까. 내가 알기로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은근히 걱정도 좀 된다. 요즘 형편으로는 든 보험도 해약해서 쓰고 싶을 만큼 곳곳에서 가랑잎 구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종착역이 가까워오자 차 안에는 우리 연치의 늙은이들뿐이다. 차비가 따로 들지 않으니까 모두 지하철을 이용한 것 같다. 공짜로 야외 바람까지 쐬며 점심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문양까지 지하철이 들어가고부터는 그곳에서 점심 먹는 게, 요즘 우리 지공들한테는 유행병처럼 번져 있다.

지하철역마다 무임승차로 인한 적자가 대구에서만 연간 200억원이 넘는다면서 이를 정부에서 해결하라는 시위성 벽보가 역마다 붙어 있는데 이를 볼 때마다 솔직히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모처럼 혜택을 받은 복지정책에 또 이런 못할 짓이 가담되어 있구나 해서.

사실 말이 났으니 얘기지만, 그리고 나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꼭 나설 일도 없으면서 교통비가 안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저기 헤매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건 아니다. 가끔 노인들만 가득한 차 안을 볼 때마다 자괴감이나, 젊은 층들의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하면, 이 나라의 오늘이 있는 게 모두 누구의 덕이냐고 반론을 제기하며, 어차피 다니는 차 그냥 좀 얹혀가자는 건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고 따지면, 이야기는 충분히 된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런가. 모두가 자기 중심으로, 자기 시각에서 주판알을 튕기고, 눈높이를 맞추고 보는 데야 도리가 없다.

이날 매운탕은 얻어먹어 그런지 맛이 너무 좋았다. 만에 하나 노심초사했던 보험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이 친구가 자랑으로 여자를 차고 나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너하고 사는 방법이 다르다는 걸 구경이나 하라는 듯이 말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말이 언뜻 스친다. 자기의 거문고 솜씨를 알아주는 이라곤 친구 종자기(鐘子期) 하나뿐인데, 그가 죽자 더는 거문고 만질 일이 없다면서 그 줄을 끊었다는 백아의 이야기. 오냐, 잘 먹었다. 자네의 그런 모습 내가 안 알아주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4/11
이응수
목록 닫기

황혼일기

댓글 창 닫기

2022/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