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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우리는 목숨 걸고 독도를 조사했다”

  • 이정훈│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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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독도에 상륙해 최초 측량을 했던 1953년 10월의 조사를 위해 그해 7월에 작성한 계획서. ‘비(秘)’자가 쓰여 있고 외무부·국방부 등이 후원했다고 적혀 있다.

정부 지원과 예산으로 독도 조사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자 평화선을 선포했던 정부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기에, 1947년 독도를 조사했던 조선산악회의 후신 한국산악회에 그 일을 맡기기로 했다. 한국산악회에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는 조치를 취하고 한일회담에 대비해 독도를 조사해달라고 한 것이다. 한국산악회는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독도와 함께 울릉도도 조사하기로 하고,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을 꾸렸다.

박 선생이 보관해온 자료 중에는 이 조사에 들어간 예산을 밝힌 것도 포함돼 있다. 한국산악회는 정부 예산 2957만9000원에 한국산악회 회비 300만원을 더한 3257만9000원으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준비했다. 정부에서는 문교부와 외무부 국방부 상공부 공보처가 후원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한국산악회는 각 분야 최고 전문가를 투입하려고 했다.

지질·광물·지형·측지·동물·식물·수산·해양·농학·임학·의학·역사·지리·고고(考古)·방언(方言)·민속·사회경제·보도(報道)·문인(文人) 등으로 조사반을 만들고, 여기에 한국산악회 회원으로 있는 그 분야 전문가를 넣으려고 한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독도의 실체를 보여줄 ‘측지(測地· 측량)반’이었다.

1952년은 전시인지라 서울에 있던 대학교는 전부 부산에 내려와 있었다. 한국산악회는 훗날 건축가로 이름을 날린 서울대 김중업 교수(건축과, 작고)와 한양대 박학재(토목과, 작고) 교수를 측지반으로 선발했다. 그러나 실제 측량에는 서툴렀던 두 교수는 부산공고 토목과장 겸 교사인 박병주씨를 데려가자고 했다.



측량전문가로 독도 조사단 참여

그리하여 박 선생은 한국산악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고, 가장 중요한 독도 측량을 맡게 되었다. 박 선생은 일본에서 측량기술을 배웠다. 1925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 있던 누나의 주선으로 1941년 도일(渡日)해, 관립 고베(神戶)공업전문학교 야간부 토목과를 다니면서 낮에는 측량설계회사에서 일했다. 1945년 귀국해서는 철도국에 근무하며 측량·설계 업무를 수행하다 1948년 부산공고 토목과 교사가 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은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CRA)을 만들어 다양한 지원을 했다. 이때 UNCRA로부터 최신 측량장비를 지원받은 곳은 제대로 된 학교시설을 갖고 있던 부산공고였다(부산공고는 그 후 부산공업전문학교를 거쳐 부산공업대학이 됐다가 1996년 부산수산대학과 합병해 부경대학교가 됐다).

박 교사와 두 교수는 우연한 일을 계기로 서로 알게 되었다. 1952년 봄 조병옥·장면 박사가 이끄는 충무공기념사업회는 미국 록펠러재단에서 지원한 돈으로 서울 수유리에 충무공 이순신 기념공원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원을 만들려면 현장 측량부터 해야 한다. 사업회는 김중업-박학재 교수와 박병주 교사에게 기초조사를 맡겼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아가며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던 서울 수유리 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이런 인연이 있었기에 두 교수는 바로 박 교사를 추천한 것이다.

약관 27세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독도를 조사하게 된 것에 박 교사는 크게 고무됐으나 바로 고민에 빠졌다. 측량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측량 폴(pole)을 잡아줘야 거리와 각도를 잴 수 있는데 교수들에게 그 일을 부탁할 수는 없었다.

이 고민은 우연한 일로 풀렸다. 김중업 교수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는 국제예술가회의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김 교수가 출장을 이유로 불참한다고 하자 박 교수도 “그렇다면 나도 빠지겠다”고 해, 박 교사는 측지반 반장이 돼 같은 학교 토목과의 선배 교사인 김기발씨를 조사단에 끌어들였다.

7월에 시작된 조사단 구성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9월에야 확정됐다. 1947년 조선산악회의 조사 때 해안경비대가 함정을 제공했으니 이번에는 해군이 배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이때는 전쟁 중이라 해군은 미군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 싼한일 갈등을 잘 알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은 해군에 함정을 제공하지 말라고 지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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