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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중국 민주화는 한국 통일의 지름길”

  • 이혜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ehappy@donga.com│

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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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땅에 묻어놓았다 어렵게 찾아온 우전룽씨의 원고.

1951년 제정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선 난민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난민이라 함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합리적인 우려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그러한 우려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 국적을 가진 자 또는 종전의 상주국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그러한 우려로 인해 상주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자를 말한다.”

우전룽의 변론을 맡았던 조영선 변호사(법무법인 동화)는 중국인도 얼마든지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난민 인정을 받은 것은 민주화운동으로 중국에서 박해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 참여자 50여 명이 함께 난민 신청을 했지만 그 사람들은 당시 운동만 한 정도였다. 다만 우전룽씨는 저술 활동과 지부장이라는 반정부 행동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가 집필한 내용의 질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일단 그런 의견을 개진한다는 점에서 처벌받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으므로, 보호해줄 필요가 있다.”

편안히 여생을 즐겨도 되는 나이에 민주화를 위해 고생하는 이유는 뭘까 싶다. 억눌렸던 그 무엇을 감추고 살기에는 그 무엇이 너무도 소중한 걸까.

2003년, 천안문 사태 14주년을 맞아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할 피켓을 만드는 우전룽(가운데).



우전룽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한국지부 부장이 보내온 원고

내가 한국에 와서 난민신청을 한 이유는 중국에는 경제적 자유(먹고사는 자유)는 있지만 사상과 출판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청년 때부터 나는 중국의 민주운동을 연구했고 2002년 11월12일 한국에 오기 전까지 약 30권 분량의 원고를 썼다. 이 원고는 내 영혼이 28년간 쏟아낸 작품이다. 그런데 나의 조국 중국에서는 한 글자도 출판할 수 없었다. 출판되는 순간 나의 인생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법무부는 이런 나에게 ‘난민인정 불허’라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나는 이 결정에 불복해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통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인터넷을 만나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내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이 암담한 상황에서 나는 위대한 무기를 만났다.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나의 민주사상을 전세계로 전하는 문명의 이기였다. 이 기간에 나는 한국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렸다. 무슨 자유인가?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자유다. 인터넷을 통해 나는 그동안 가슴에 담고 있던 민주사상을 전세계를 향해 확산시켰다. 중국민주운동에 관심을 가진 해외 및 중국 내부 중국인들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나 자신 이제 중국민주운동의 주요인사가 되었다. 미국에 있는 주쉐위안 선생과 홍콩에 있는 張三一言 선생 같은 분들은 나의 사상과 이론을 높게 평가한다.

나는 중국민주운동을 하면서 이론과 사상을 주로 연구했고 저술을 통해 중국민주운동을 고취시키고 있다. 중국에도 민주운동의 전통이 있다. 100여 년 전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한 무술유신(戊戌維新)이다. 그 후 국민당이 이끈 신해혁명, 공산당이 이끈 농민혁명이 있다.

1949년 정권을 세운 중국공산당은 민주적 제도를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전제주의적 공산당 일당 독재정치를 만들었다. 결국 중국에는 민주적 진행과정이 멈추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60년 통치한 기간에도 간헐적으로 민주운동은 일어났다. 1957년 지식인의 명방운동(鳴放運動: 마음에 있는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자는 운동), 1966년의 조반운동(造反運動), 1976년의 제1차 천안문운동, 1979년의 자유화운동과 1989년의 6·4운동은 중국민주화를 어느 정도 진전시켰다. 하지만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중국의 민주화가 실현되는 날 앞서 말한 민주운동들은 빛을 발할 것이다. 나는 이런 환경에서 중국의 민주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면 중국은 왜 민주가 필요한가? 부의 분배문제 때문이다. 중국은 현재 0.4%의 인구가 70%의 재부(財富)를 점유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 대단히 위험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선진국을 보라. 선진국은 5%의 인구가 재부의 50~60%를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로 볼 때 나는 이미 중국사회가 ‘고(高)위험’에 들어섰다고 예견했다. 만일 민주제도를 통해 이 상황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중국엔 대동란(大動亂)이 발생할 것이다. 이건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아울러 중국의 정신적, 도덕적 타락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사회엔 돈만 번다면 다른 사람은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독이 든 분유사건(멜라민)을 생각해보라. 독을 음식물에 넣어 판다. 중국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먹기가 무섭다. 독이 든 기름, 독이 든 쌀, 독이 있는 채소 등. 가짜 약, 가짜 술, 가짜 음료수가 도처에서 팔리고 있다. 중국제품은 현재 전세계에 공포를 주고 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중국공산당

그뿐 아니라 쓰촨성 지진 때 학생들을 놔두고 혼자 도망간 교사, 인민대학교의 깡패 교수, 부패한 공산당 관리들이 있다. 사법기관은 흑사회(깡패)와 결탁하고 심지어 불교성지도 음란한 장소가 되었다. 중국엔 이미 엄중한 도덕위기와 문화위기가 발생했다. 사람들의 행위가 법도를 떠났고 물질적이고 육체적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사람들의 이성능력은 동물성(動物性)에 굴복하고 심지어 마귀성(性)에 굴복하고 있다. 이런 사회환경이 보편적이고 심각하다. 내가 아는 중국인민대학교 부교수 유리화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을 잃은 중국인의 전체 상태는 단순화, 동물화, 마귀화되었다. 인간을 물건으로 본다.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영역 등 처처가 다 이렇다. 중화민족은 자기의 민족신분과 본래 면목을 상실했다.”(유리화의 ‘중국 현재의 문화위기’강의 원고. 한마디로 중국공산당은 중화민족의 아름다운 도덕, 정신 그리고 문화를 파괴하고 압살시킨 것이다. 북한이 북조선 인민의 정신과 도덕 그리고 문화에 끼친 파괴적 해악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을 누가 정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가.

현재 중국공산당의 통치는 이미 중국 사회의 이런 중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다만 공산당은 모든 것을 억압의 방식으로 통치한다. 총과 칼로 인민의 입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숨이 끊어져가고 있다는 신호다. 나는 한국인에게 말하고 싶다. 대다수 한국인은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을 이해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국 내부에 존재하는 위기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중국민주화는 한반도 통일의 지름길이다. 한국인의 가장 큰 소망은 한반도 통일이지 않은가. 한반도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이어야 한다. 공산중국은 절대 북한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이 민주화되면 한반도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 없어지며 동시에 가짜 사회주의 봉건왕조인 북한의 권력집단도 붕괴되고 자유와 민주 체제가 된다. 이후 민주중국과 민주통일한국은 민주와 자유, 그리고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가치동맹이 되어 중국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누리게 된다. 나아가 민주중국, 민주통일한국, 민주미국이 가치동맹으로 서로 손잡고 아시아와 전세계의 억압적 정치와 독재정치를 몰아내고 자유와 인권을 확대할 수 있다. 나아가 민주중국은 통일한국이 세계 7대 강국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신동아 200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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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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