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다
1998년 전창진 감독의 초중고 선배인 최형길 당시 원주 TG 사무국장이 그에게 수비코치를 제의하면서 그의 인생은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코치로 선수들을 잘 다독이며 지도자의 자질을 보이던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은 2001~02년 시즌 도중. 최종규 당시 원주 TG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중도하차하면서 구단은 그에게 감독대행을 제의했다. 부담도 되고 겁도 났지만 도전할 기회가 마침내 왔다는 생각에 그는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가 감독이 되자 “원주 TG 프런트에 용산고 선후배가 많아 주무 출신인 그를 발탁했다” “용산고 마피아들이 다 해먹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농구코트에서 선수들과 땀을 흘렸다. 결국 감독 첫 시즌인 2002~03년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주무 출신 주제에 김주성 같은 좋은 선수를 만난 덕에 거저 우승 했다”는 비아냥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이는 당시 원주 TG의 사정을 잘 모르는 타인들의 시샘일 뿐이었다. 당시 삼성, LG 등 쟁쟁한 모기업을 둔 다른 농구단이 연간 50억~60억 원의 예산을 쓸 때 원주 TG는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30억 원 미만의 예산을 써야했다. 남들이 다 가는 해외 전지훈련은 꿈도 못 꿨고 외상 밥값이 너무 밀려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걸핏하면 농구단이 해체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초보 감독과 선수들의 의욕은 대단했다. 전 감독은 “우승을 못하면 곧바로 팀이 해체된다’는 말이 나돌았던 게 오히려 선수들의 의욕을 자극했다”고 평가한다.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처지에 몰린 선수들은 당연히 죽을 각오로 뛰었고 코치진도 열과 성을 다했다. 첫해 깜짝 우승을 차지한 전 감독은 다음해인 2003~04년 시즌에도 준우승을 차지해 그의 능력이 일회성이 아님을 입증했다. 원주 TG는 2004~05년 시즌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2005년에는 모기업이 TG에서 동부로 바뀌었다. 든든한 스폰서를 구하긴 했지만 모기업의 기대치도 높았다. 전 감독은 2007~08년 시즌에 팀을 세 번째 정상에 올려놓으며 구단의 기대에 부응했다.
부산 KT로 이적

하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동부에는 스타 선수가 많았다. 김주성, 신기성, 양경민 등은 물론 한국 농구계가 낳은 최대 스타인 허재 KCC 감독이 마지막 선수 생활을 한 곳도 바로 동부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선수들도 기초 훈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 그의 운영 방식을 잘 따라왔다. 하지만 KT는 달랐다. 전 감독은 부임 초기 KT 선수들이 기본적인 패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명색이 프로라는 선수들이 이렇게 기본이 안 돼 있나, 감독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라는 게 그의 회고다.
전 감독은 새 감독을 어려워하는 선수와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위해 다양한 작전을 썼다. 술자리는 물론 고스톱을 같이 치고, 목욕탕에 함께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농구선수가 하는 기초 훈련도 다시 실시하며 이 훈련을 왜 해야 하는지 상세한 설명도 곁들였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선수들은 곧 그를 따라왔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도 스스로 훈련을 자청했고, 훈련 결과가 실제 연승으로 이어지니 선수단의 자신감도 배가됐다. 스타 선수 없는 팀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강한 조직력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감독 전창진의 비전을 선수단이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부산 KT는 신흥 강호로 급부상했다. 결국 2009~10년 시즌 정규리그 2위, 2010~11년 시즌 41승으로 정규리그 최다승을 거두며 1위를 차지했다.
아쉽게도 두 번 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우승하지 못했지만 KT는 올해 초 전 감독에게 3년 재계약과 최고 연봉을 제시하며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최근에는 국보급 센터 서장훈까지 영입했다. 전 감독은 지난 3년간 이루지 못했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