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남파간첩 주장 스스로 뒤집다

양심고백 최근 녹취록&의혹투성이 수사기록

  • 한상진 기자 | greenfish@donga.com

    입력2014-04-16 1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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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보위부에 차출된 적 없다”
    • “엄마 보고 싶어 스스로 북한 무역대표부 찾아가”
    • “검찰, 술 먹이고 다른 사람 진술 달달 외우게 해”
    • “당시 주임검사, ‘네 거짓말 다 안다’며 조용히 살라 협박”
    • 실체 없는 805부대, 간첩 행위 시점도 안 맞아
    남파간첩 주장 스스로 뒤집다
    3월 17일 발간한 ‘신동아’(4월호)는 여간첩 원정화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보도했다. 2008년 사건 당시 검찰의 수사결과와 배치되는 주장과 증거들이 취재과정에서 확인됐다. ‘신동아’는 2월 말 원씨가 자신의 의붓아버지인 김동순 씨를 만나 나눈 대화내용도 공개했는데, 원씨는 이 대화에서 북한 보위부 직파간첩, 탈북 이후 3차례 북한 방문 등 사건 당시부터 자신이 주장했던 주요 간첩 행적을 사실상 부인했다.

    ‘신동아’ 보도 직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신동아 보도에 대한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한겨레는 3월 22일 “검찰로부터 허위진술을 강요당했다. 나는 간첩이 맞지만, 아버지는 아니다”라는 원씨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면서 수사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정작 원씨는 ‘신동아’가 보도한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 나는 북한 보위부가 남파한 간첩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자신의 비공개 증언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하며 “(어린 나이부터 보위부 요원에 선발됐다고 말하면) 아버지가 놀랄까봐 그렇게 설명드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4월 8일에는 자신의 의견을 담은 문서를 언론사에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간첩행위를 인정하고 죗값도 정당하게 치렀다. 내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회유와 협박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랜 내사와 많은 증거물을 대한민국 법기관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판결을 내려 처벌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조용히 살려는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딸과 편안히 살 수 있게 해 달라.”

    오락가락하는 원씨의 주장. 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1부 - 원정화의 고백

    ‘신동아’는 원씨를 둘러싼 의혹을 계속 추적했다. 수사·재판 기록을 분석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취재를 진행했으며, 계부 김동순 씨와 여러 차례 추가 인터뷰를 했다. 그 과정에서 ‘신동아’는 최근 원씨가 김씨를 찾아가 ‘간첩 사건’의 자초지종과 그간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털어놓았고, 김씨가 원씨의 동의를 얻어 대화 내용을 녹음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대화는 지난달 ‘신동아’가 공개했던 것과는 달리 원씨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고백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왜 이런 녹음 기록을 남겼을까. 김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2008년 사건이 시작됐을 때부터 ‘정화는 절대 간첩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정화는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간첩으로 만들었다. 정화의 거짓 진술 때문에 나는 4년간이나 재판을 받아야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난 정화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며 찾아온 딸을 외면할 수 없었다. 또 내가 기저귀를 갈아주며 키운 손녀딸 OO이(원정화 씨의 딸)를 보면서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난 정말 알고 싶었다. 무슨 이유로 정화가 간첩이 됐는지, 왜 가족을 모두 보위부 요원이나 간첩으로 만들었어야 했는지를. 언젠가 이 사건도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믿기 때문에 정화를 위해서도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화도 내 이런 생각에 동의해 녹음 기록을 만들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뤄진 건 지난 3월 15일, 장소는 김씨의 서울 노원구 자택이다. 당시는 ‘신동아’가 원씨와 관련된 의혹을 취재하며 원씨에게 취재내용을 알리고 그에 대한 답변과 해명을 요구하던 때였다. 녹음파일에는 원씨의 판결문에 적시된 범죄 사실, 북한-중국-한국으로 이어지는 원씨의 그간의 행적에 대한 원씨의 고백이 담겨 있다. ‘신동아’는 최근 두 사람의 대화내용이 담긴 이 녹음파일을 확보해 분석했다.

    두 사람의 대화시간은 총 3시간이 넘고, 여러 개의 파일로 나뉘어 있다. 두 사람은 첫 대화를 나눈 3월 15일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추가 대화를 나눈 것으로 확인됐다. 이 모든 과정 또한 녹음파일로 남겼다. 녹음파일에 담긴 원씨의 주장은 수사결과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난달 ‘신동아’가 처음 공개한 원씨의 육성고백과도 달랐다.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이었다. 시점 등에서 일부 오류가 발견됐지만, 사실상 검찰이 제기한 핵심 범죄 사실을 완전히 뒤엎는 증언이라고 할만했다.

    원씨는 이 녹음파일에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남파간첩’이라는 사건의 대전제를 뒤집었다. ‘신동아’는 원씨의 육성고백이 담긴 이 파일을 공개하는 것이 진실 추구와 공익 기여라는 언론의 사명에 부합한다고 판단, 주요 내용을 그대로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화내용을 주제별로 묶었다. 일부 내용은 주장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감했다. ( ) 안의 내용은 기자가 써 넣은 것이다. 원씨가 증언 도중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도 미리 밝혀둔다. 김=김동순, 원=원정화)

    남파간첩 주장 스스로 뒤집다


    1 북한 무역대표부 김교학과의 관계

    남파간첩 주장 스스로 뒤집다

    2008년 7월 체포 당시 원정화.



    (원씨는 1998년 보위부 요원으로 차출된 뒤 중국에 파견됐다고 주장해왔다. 검찰기록과 판결문 등에는 원씨가 한국에 들어온 뒤인 2002년경부터 2008년 7월 체포되기 전까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 소속인 북한 단동무역대표부 김교학 부대표를 통해 각종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돼 있다.)

    김_ 사건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다 말해봐.

    원_ 나도 몰라요. 2008년 7월 15일 아침에 경찰이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예고도 없이, 구속영장인지 (뭔지), 내가 그런 걸 알아요? 모르잖아요. 그래서 난 아버지 너무 놀라서요. 난 너무 무서웠어요. 그 무슨 국가보안법인가 뭔가, 묵비권 행사할 수 있고 어쩌고, 그리고 경찰서에 갔어요.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입국 당시) 합동신문센터에서 진술한 대로 말했어요. 학교는 이렇게 졸업하고….

    김_ 체포하면 체포 이유를 설명하는데.

    원_ (체포 이유도 설명을) 안 해주고 그냥 조사부터 하는 거예요. 전 너무 무서웠어요. 왜 조사받는지 설명도 안 해주고. 북한에서의 행적을 다 쓰래요.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을 못 했다는 소리는 (차마) 못하겠어서,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말하고. (그런데 갑자기) “북한 단동무역대표부 김교학을 아냐”고 (수사관이) 그러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뜨끔했어요. “그건 무역업 하느라고 어쩔 수 없이 만난 거다.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 거기(단동무역대표부)에 들어갔다”고 그랬어요.

    김_ (2006년 초 네가 단동무역대표부로) 아버지를 불렀을 때도 (너는) 겁먹었었잖아. 아버지 좀 와(서 도와) 달라고.

    원_ “정화 씨! 거짓말 할 거예요?”(그러는 거예요). 내가 무슨 북한의 지령을 받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서 다 얘기했죠. 난 보름 동안 밥도 못 먹고, 무섭고.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고. 난 유치장에서 잘 때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울음) 8월 1일 검찰에 송치되어서 (주임검사인) 윤OO 검사를 처음 만났어요. 윤 검사가 (저에게) “김교학이 보위부 사람인 것 알죠?” (그러더라고요).

    김_ (그런데) 김교학이 보위부 사람인 건 맞냐?

    원_ 그건 나도 모르지, 나도. (그래서) 그냥 “단동 무역대표부 부대표인데요” 그랬죠. 그런데 난 솔직히 김교학에게 매도(‘매수’ 의미로 추정)된 게 좀 있어서, 두려운 건 좀 있었어요. 유혹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아버지 속이고 단동에 혼자 다녔잖아요. 김교학이와 같이 술 마시고 (노래방에서) 북한 노래 듣고 그러니까, 북한에 솔직히 가고 싶어서, 엄마한테도 가고 싶고, OO(여동생)이도 보고 싶고, 너무 북한에 가고 싶었어요.(울음)

    황장엽이 누구예요?

    김_ 엄마가 보고 싶어서….

    원_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제가 엄마랑 같이 못 살아봐서….(울음)

    김_ 아버지도 잘못이 있다. 아버지가 니들 못 지켜주고, 탈북하게 만들고, 아버지에게 죄가 있다.

    원_ 난 엄마랑 OO(여동생)이랑 같이 못 있고, 그게 가슴이 아파서….(울음)

    김_ 김교학이한테 매도됐다는 건 뭐야?

    원_ 내가 심부름을 계속 했죠. 내가 김교학한테 솔직히 말했어요. “내가 탈북자다”(라고). 그랬더니 자기들도 “의심은 좀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조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김교학이) “조국은 용서해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가족이 어디에 있냐”고 해서 “함경북도에 있다”고 했더니, 앞으로는 자기가 하라는 대로 하래요. 약품도 그렇고 자기들 냉동문어도 받으라(장사를 하라)고. “나라에 도움을 준다 생각하라”고.

    김_ 장사 임무였네?

    원_ 네, 처음엔 장사 임무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위부에서 왔다면서 사람 세 명이 왔었어요.

    김_ 그건 네가 검찰에서 진술한 거지?

    (보위부 사람들은 2006년 초 원씨가 단동무역대표부를 방문했을 때 식사자리에 동석했던 북한 사람들로 추정)

    원_ 네, 진술했죠. 그 사람들이 절 동지라고 부르더라고요. “조국으로 돌아가야지” 그러면서. 또 “남한에 반역자(탈북자)들이 얼마나 있냐”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모르죠” 그랬더니 (그걸) 다 알아내라고. 그 사람들이 “동지가 조국에 돌아가면 장군님 배려로 온 가족이 큰 훈장을 받을 거다”라고. 날 막 격려하고 그러니까 난 또 신이 난 거예요.

    김_ 널 회유한 거지.

    원_ 내가 “탈북자 정보를 어떻게 알아내야 하나요” 했더니, “탈북자 정보와 주소 (어떻게 해서든) 다 알아내라”고. “못 알아내면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동지, 우리가 (당신을) 믿어줘서 여기에 왔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 후로 그 세 명을 고정적으로 만난 거예요. 그것 때문에 탈북자단체 다니고 그런 거예요.

    남파간첩 아닌 ‘셀프간첩’

    김_ 다른 거 요구한 건 없어?

    원_ “국정원에서 탈북자를 어떻게 조사하냐”고 묻더라고요. 혹시 국정원 직원 아는 사람 있냐고. 그래서 “아는 사람 있다”고 말하고, (국정원 합동신문센터가) 대방동 어디에 있다고 알려주고, 약도 그리라고 해서 그리고.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사람들이 제 과거를 다 알더라고요. 교화소에서 6년형을 받았는데 특별사면으로 나왔지 않으냐면서. 그리고 협박도 받았어요. “정화 동무가 남조선에 갔다는 걸 조국에 알리면 집안사람들이 다 잘못된다는 거 알아야 한다”고. “조국에 협력하면 반드시 가족은 지켜준다”고. “믿을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믿어라, 언제 조국(북한)이 배척한 적 있냐”고 말했어요. 협박이죠. “내가 괜히 잘못 (탈북자라는 신분을) 말해서 일이 이렇게 됐구나” (후회했어요), 무서웠어요.(울음)

    김_ 그게 언제냐? 김교학한테 탈북자라고 말하고, 네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원_ 2004년 봄쯤일 거예요. 단동에 갈 이유가 별로 없는데도 (그때부터) 계속 들어가고. 부대표가 전화해요, 언제 들어오라고. (시키는 대로) 쪽지에 적은 걸 단동에 날라다 줬어요. “중요한 것을 가져다 줬다”고 (북한 사람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또 (남한에) 군부대가 몇 개나 있는지 (알아내라며) 군부대를 돌라고 했어요. 저는 “군부대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랬죠. (또) “황장엽이 어딨는지 알아내라”고 해서 제가 “예? 황장엽이 누구예요?” 그러니까 “황장엽도 몰라요? 97년인가 남조선으로 간 새끼 있어” (그랬어요). 그래서 일단 (황장엽 이름을) 수첩에 적어놓고, 국군정보사령부 직원에게 물었어요. 그랬더니 자기들이 보호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탈북단체 대표인) 김OO를 찾아가서 황장엽 만나게 해달라고 그랬어요.

    김_ (검찰에서는) 중국에 나올 때부터 김교학을 알았다고 니가 진술(했잖아).

    원_ 그건 제가 어쩔 수 없이, 협박을 당해서.

    김_ 국정원이 널 억지로 (간첩으로) 만든 건 아니야? 넌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이 아니라 네가 자원해서 간첩(이 된 거라고), 네가 무슨 훈련받은 간첩이야. 네가 자청해서 간첩이 된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황당하잖아. (난 처음부터) 내 딸은 절대 간첩을 할 수 있는 애가 아니다, 그랬지.

    2 탈북 이후 북한, 북한영사관 출입

    김_ 아버지가 탈북한 뒤에 북한에 간 적이 있냐?

    원_ 아버지나 나나 북한에 간 적이 없죠. (그런데) 아버지, 들어보세요. 아버지에게만 솔직히 말하는데, (제 검찰) 진술서에는 (제가) 도문에서 북한에 (2번)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2006년 8월) 심양대사관에서 (북한 찬양) CD도 받아오고.

    김_ 심양영사관.

    원_ (그런데 사실은 단동에서) 내가 북한에 너무 가고 싶어서 (김교학에게) 부탁을 해서 신의주까지 간 적은 (한 번) 있어요. 북한 흙이라도 만져보고 싶어서. 검열 안 하고 무사통과 하더라고요. 난 (김교학의) 승용차 뒤에 탔어요. 내가 (북한에 들어가서) 통곡하면서 울었어요. (김교학이 저에게) “조국이 이렇게 좋은 거 느껴지죠” 그러더라고요.

    김_ 신의주 가서 뭐 했어?

    원_ 시내 한 바퀴 돌고, 시장도 한 번 돌고, 그날 바로 돌아왔어요. “여기서 우리 집이 얼마 안 되는데” (하면서), (김교학에게) “집에 보내달라”고 하니까 “그건 안 됩니다” 그러더라고요. “우리 집 청진까지 데려다줘요. 한 번만 구경시켜주면 안 됩니까” 그랬어요.

    김_ 김교학하고 신의주 드라이브한 것 빼고 네가 북한에 가본 적이 있냐?

    원_ 그건 없어요.

    김_ (2002년에) 북한 집에 가서 자고 왔다고 (진술했잖아).

    원_ 그런 거 없어요. (조사받을 때 검찰에서) “여권에 도문이라고 찍혀 있다”고, 내가 북한 갔다 온 게 맞다고 인정하라고 (하도 협박해서).

    김_ 무슨 도문이라고 여권에 찍혀?

    원_ 몰라요. 나에게 (여권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김_ 북한 영사관 갈 때는 (조선족) 김용순(가명)을 데려갔잖아.

    원_ 네. 내가 (그때) 처음으로 영사관에 들어가본 거예요. 들어가니까 누가 “어서 오세요. 조국 일을 하신다고 들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내가 감격을 해서…. 나보고 (북한) 영사가 그랬어요. “정화동무, 반역자 새끼들(탈북자) 통해서 우리 군 정보가 많이 (남한에) 넘어갔어요. 그런데 우리는 남조선 군 정보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목소리를 높이며) “군대를 다 장악하라우”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이런 얘기를 그 당시 아버지께 했으면 아버지는 아마 절 죽였을 거예요.

    3 검찰 측 핵심 증인 조선족 김현수(가명) 관련

    (원씨가 간첩 혐의를 인정받는 데는 탈북 브로커인 조선족 김현수의 증언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는 원씨와 함께 여러 번 북한 단동 무역대표부를 방문했고, 원씨와 김교학의 대화를 목격했다고 검찰과 법원에서 증언한 바 있다. 그는 원씨가 북측에 우리나라 군인들의 신상정보 등을 넘겨준 과정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기도 하다. 김씨는 2006년 김동순 씨가 국내에 들어오는 과정에도 일정 부분 개입했다.)

    김_ 김현수는 어떻게 알게 됐어. 니가 진짜 간첩이면 그런 조선족 애들을 간첩질하는 데 데리고 다닌다는 게 말이 되냐.

    원_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자를 통해서 김현수를 알게 됐어요. 현수가 자기 엄마를 소개해서 가정부로 쓰고, 현수를 만난 건 2004년쯤일 거예요. 김교학보다 먼저 현수를 만났어요.

    (참고로, 2008년 김현수는 법정에 나와 ‘2005년 12월 원씨를 처음 알게 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_ 김현수를 언제부터 단동무역대표부에 데리고 갔니.

    원_ (2005년 가을 이후) OO수산에서 (돈을) 빼돌려서 단동하고 직접 무역을 할 때부터 데리고 다녔어요. 현수가 안 되면 현수 동생 김용순(조선족, 가명)을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김교학과 대화할 때는 김현수를 참석시키지 않았어요. 김교학도 김현수에게는 한마디도 말하지 말라고 (했고). 김현수는 (내가) 김교학을 만나는 자리에 있지도 않았어요.

    김_ 네가 현수 같은 놈을 데리고 다니니까 다 생긴 일이야.

    원_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올 때 제가 김현수에게 브로커 비용으로 800만 원을 줬어요. 그런데 일도 제대로 안 하고 돈을 자꾸 요구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김현수 엄마를) 찾아가서 때린 거예요. 현수새끼는 계속 돈을 달라면서 절 협박했어요. “너와 OO(원정화 동생)이를 북한 보위부에 고발하겠다”고. 실제로 그 새끼 고발 때문에 OO이가 보위부에 들어간 걸로 알고 있어요. OO이가 저한테 전화해서 “야, 이 개간나야, 그런 새끼(김현수) 소개해줘서 내가 고생만 했다”고 (하더라고요).

    4 수사과정에서의 협박, 회유에 대해

    (원씨는 지난달 ‘신동아’가 처음 공개한 비공개 녹취록, 한겨레 인터뷰 등을 통해 검찰조사 과정에서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검찰이 수사 도중 술을 먹였다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원씨는 계부와의 대화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원_ (검찰에 송치된) 첫날(2008년 8월 1일)에 윤OO 검사가 “솔직히 말하면 김현희처럼 살게 해주겠다”고 그랬어요. 8월 1일 첫 대면에서 그랬어요. 내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요. 솔직히 김교학의 사주를 받은 건 있으니까, (그게)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고 하니까. “내가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이다” (라고) 거짓말을 한 거예요.

    김_ 지금 네 입으로 (진실을) 말하라고 하는 건, 다 증거자료를 남겨놓으려고 하는 거야. 말해봐. 네가 보위부에 차출되고 그런 적이 있냐?

    원_ 없죠.

    김_ 아버지 진술이 맞지?

    원_ 네, 맞아요.

    (원씨가 윤OO 당시 주임검사와 최근 나눈 대화내용을 설명하며)

    김_ 그대로 말해봐.

    원_ (최근 윤 검사가 저에게) 일부 탈북자들이 너를 간첩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네가 (방송에 나가서) 하면 내가 어떻게 되냐”고, 나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김_ 지가 뭔데 방송 나가라 말라 그래?

    원_ 그래서 하도 협박을 해서 못 나갔어요. 권OO(경기지방경찰청 간부, 원정화 사건으로 특진)가 “윤 검사가 좀 보자고 한다”며 제게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난 반가운 마음에 (윤 검사에게) 전화했죠. (그런데) 그 새끼가 날 비난하더라고요. 윤OO가 “솔직히 네 진술이 거짓말인거 다 아는데” (그러면서). 그래서 내가 “그러면 왜 날 간첩으로 만들었냐?”고 (따졌죠).

    김_ 더 말해봐.

    원_ (윤 전 검사가) “일부 탈북자들이 너의 진술에 대해 의문이 많은데, 조용히 지내라” (그랬어요). (그리고) “니가 조금은 보위부 일을 했겠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고 그러는 거예요. 꽁꽁 숨어 살라면서.

    김_ 자기들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자기들이 만든 진술대로 했는데, 오히려 (네가 방송에 나와서) 자기들 주장을 굳히기 해주고 있는데,

    원_ “식당 설거지하면서 숨어 살라”고 윤 검사가. 그러면 네가 다 잊혀지고, 그게 제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권OO도 그렇게 하라고 하고. (울음) 권OO가 “김동순을 만나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김동순 만나면 제가 위증죄로 구속될 수 있다고. 권OO가 “한 달에 30만~40만 원씩 돈을 보태줄 테니 조용히 살라”고 했어요. 윤 전 검사, 권OO가 내세우는 거는 (제가 구속돼 있는 동안 아파트) 관리비 내주고 딸을 키워주고, 영치금 넣어주고 (한 거예요).

    김_ 자기들이 들통 나면 개망신당하니까 그러는 거야. 낱낱이 얘기해.

    원_ 일부는 내가 잘못한 거는 맞는데.

    김_ 그다음에 너 (2008년 10월경에) 아버지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때, (검찰이) 너를 이용해서 나를 잡으려고 한 거지. (재판 날 교도관이) “검찰에서 원정화 데려갔다”고 알려주더라고. “지금 (검찰에서) 훈련받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날 불려나가서 뭐라고 협박받았냐?

    원_ “이때까지 한 진술을 번복하지 말라. 뒤집으면 (너도) 위증죄로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요). 그때는 내가 형을 받은 뒤에요. 그런데 나는 그때 너무 두려웠어요.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그래서 나는 “다 모른다고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난 이렇게 내 사건이 온 세상에 퍼질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울음)

    김_ 조사받는 동안 너 변호인 몇 번 만났어?

    원_ 안 만났어요.

    김_ 요구 안 했냐?

    원_ 난 그런 거 있는지도 모르고 기소됐는데, 검찰 구형 떨군다고 할 때, 그전에 변호사가 왔어요. 이OO이라는 국선변호사가. 그 사람이 “억울한 거 있으면 말하라”고 해서 “그냥 다 맞으니까, 난 (그때는) 다 포기했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했어요.

    김_ 그런 재판이 세상에 어딨어.

    원_ 난 변호사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고, 한국법을 (내가) 알아요? 내가 뭘 알아요? 조사받을 때는 변호사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변호사 자체를 모르고.

    김_ 나도 몰랐어. 미란다원칙이니 뭐니, 북한서 살던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아냐. 근데 (나한테는) 변호사가 찾아왔더라고. 그래서 면회실에서 대화를 했어.

    원_ 근데 왜 저한테는 그런 게 없었어요? 하여튼 난 모르고 구형받기 전에 변호사 한 번 보고, 끝날 때까지 총 3번 봤어요. 그 변호사가 지금은 검사가 돼 있어요.

    5 내연남 황OO 전 대위 수사와 관련

    원_ 황 대위 조사기록이 나에게 와서 그걸 달달 외우고, 그러고 나서 영상녹화실에 들어가서 그대로 진술하고 (그랬어요). 안 그러면 “무기징역 때린다”고 (윤OO 검사가) 그랬어요. OO이(원씨 딸) 때문에 무서워서 (제가) 어떻게 해요. (외울 시간을 한 시간밖에 안 줘서) “한 시간 만에 내가 어떻게 그걸 달달 외우냐”고 하고, 또 잘 안 되니까 윤 검사가 “다시 해라” (그러고). 그래서 세 번째 만에 녹화를 한 거예요. 내가 OOO 기자에게도 그랬어요. “내가 지금 양심선언 하는데, 황 대위가 포기해버리면 내가 양심선언하는 게 뭐가 되냐”고. 그래서 황 대위와 통화해서 본인이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하면 (내가 뭐든지) 하겠다고. OOO 기자가 황 대위에게 그 말을 전했더니 “변호사하고 상의해서 하겠다”고 그랬대요.

    김_ 그건 앞뒤로 조율을 해야 돼. 황 대위라도 (누명을) 벗을 수 있으면 완전 성공이다. 미안함이라도 가실 수 있잖아.

    원_ 내가 권OO(경기지방경찰청 간부)에게 전화로 그랬어요. “내가 왜 (구치소에서) 자살을 시도했는지 아냐”고, 윤 검사가 날 성적으로 매도하고 그래서 억울해서 죽으려고 했다고. 무슨 내가 불안증세, (그런) 개똥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권OO가) “난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권OO에게) “검사장인가 누군가 하고도 같이 술 마셨다”고 (했어요). 여직원하고도 같이 술 마셨다고. 내가 맨날맨날 폭탄주 마셨다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내가 검찰에서 술 먹은 건 교도관들도 다 알아요. 항상 알딸딸해서 들어가는 거 다 본 사람들이니까. 내가 먹고 싶다고 해서 회가 들어왔는데, 술이 같이 들어왔어요. 항상 소주에 맥주가 같이 들어왔다고요. 조사가 끝난 다음에 보강조사할 때까지도 술을 매일 마셨어요.

    김_ 검찰에서 조사하면서 (피의자에게) 술을 먹이는 게 어딨어. 대한민국 좋은 나라네.

    수사과정에서 술을 먹였고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는 원씨의 주장과 관련, 당시 주임검사였던 윤OO 전 검사(현 변호사)에게 전화와 e메일로 취재에 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윤 전 검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3월 22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윤 전 검사는 원씨의 주장에 대해 “원씨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것 같다. 조사실에서 술 먹인 적 없다. 원씨는 교도소에서 내게 고맙다는 편지도 보냈었다. 최근에 내가 응대를 하지 않으니 서운했던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원씨를 수사했던 경기지방경찰청 권OO 씨는 기자가 “원정화 씨와 관련해 취재를 하고 있다. 듣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말하자 “회의 중”이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무실에 연락처를 남겼지만 권씨는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원씨가 수사 당시 같이 술을 먹었다고 지목한 당시 수원지검장(현 변호사)과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신동아’는 녹취록 내용과 관련해 원씨에게도 연락을 시도했지만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2부 - 의혹투성이 수사기록

    2008년 간첩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원씨 주장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신동아’를 비롯한 많은 언론이 그동안 확인한 거짓 주장만도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부친이 남파 도중 살해됐다’ ‘국정원 합동신문 당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통과했다’ ‘2007~08년 일본을 방문해 탈북여성 색출 작전을 펼쳤다’는 따위의 주장은 이미 거짓말로 확인된 상태다. 2005년 3월 원씨와 함께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한 남성은 “중국에서 김교학을 만나 지령을 받았고, 정보사 요원 이OO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을 폈다”는 원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원씨에 대한 수사과정은 어땠을까. ‘신동아’는 원씨 관련 사건의 수사·재판기록을 지난달에 이어 꼼꼼히 살폈다. 그 과정에서 미심쩍거나 부실한 내용을 다수 발견했다.

    김교학 언제 만났나

    북한 단동무역대표부 김교학 부대표는 원씨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원씨에게 지령을 내렸다고 되어 있다. 원씨의 모든 간첩행위는 김교학을 만난 이후에 만들어진다. 김교학의 존재 자체가 원씨 사건의 대전제인 셈이다. 그렇다면 원씨는 정말 2002년부터 김교학을 알고 지냈을까.

    수사 당시 원씨는 “2002년 10월 김교학과 처음 통화했다”고 주장했다. “보위부 간부 OOO으로부터 소개받은 원정화입니다”라고 먼저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중국에서 처음 만났다는 게 원씨의 주장이다. 그런데 수사기록을 보면 원씨가 1999년 초 김교학과 밥을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신동아’ 3월호에서 공개한 녹취록에 따르면 원씨는 2004~2005년경 무역일을 하면서 김교학을 처음 만났다고 주장한다. 원씨가 김교학을 만난 시점은 아무리봐도 불분명하다.

    원씨가 단동무역대표부와 접촉을 시작한 건 2004년 11월 자신의 이름으로 무역회사(정선무역)를 만든 이후로 추정된다. 2003~04년 대북무역을 할 때는 원씨의 역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중국에 있던 김씨와 원씨의 지인인 여OO 씨가 사업을 주도했다. 원씨도 수사 과정에서 “어떤 무역을 얼마나 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김동순과 여OO이 다 알아서 했다”고 인정했다.

    원씨는 단동무역대표부를 방문할 때마다 누군가를 데려갔다고 주장한다. 계부인 김씨, 조선족 브로커 김현수 등이다. 그런데 김씨가 원씨와 단동에 처음 간 건 2006년 4월, 브로커 김현수가 동행한 건 2006년 3월로 확인된다. 김현수는 검찰과 법원에 나와 “2005년 12월 원정화로부터 처음 전화를 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앞서 소개한 녹취록에서 원씨는 “김교학보다 김현수를 먼저 만났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원씨가 김교학을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초일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이 밝히고 법원이 인정한 원씨의 범죄 사실은 총 26건 정도다. 그중 2005년까지의 범죄는 절반인 13건에 달한다. 만약 원씨가 김교학과 만난 시점이 2006년 이후라면, 공소 사실의 골격은 무너진다. 2003년 이후 원씨의 중국 방문에 동행했던 사람들은 원씨의 ‘간첩 행적’에 의구심을 표시했다.

    정체불명 805부대

    원씨는 여동생(김OO)이 1999년 6월부터 보위부 외화벌이 요원으로 차출돼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활동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범죄행위 중 상당 건수를 동생과 연관시킨다. 2002년과 2006년 총 3번에 걸친 북한 잠입에 동생이 동행했고, 동생을 통해 공작금과 무역이익을 북한에 투자금 명목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원씨는 동생이 보위부 요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친분이 있던 한 조선족 사업가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다음은 원씨의 검찰 진술.

    “2002년 10월 연길의 백산호텔 커피숍에서 OO그룹 김OO 회장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김OO(원씨 동생)이 힘이 세다. 중앙보위부까지 다 꿰고 있다. 여권도 없이 OO이와 함께 평양까지 갔다 왔다’고 말했다.”

    원씨의 주장은 사실일까. 기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연길에 있는 김OO 회장 측에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공식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의 답을 들을 수는 있었다.

    “북한 청진에 친척들이 산다. 2002년쯤인가 북한 회령에 들어가면서 청진에 있는 친척들이 보고 싶어서 원정화 동생 김OO에게 연락을 한 적이 있다. ‘내 친척들을 회령으로 좀 데려오라’고 했다. 김OO과 평양에 간 적은 없다.”

    원씨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2년5개월간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15세에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차출됐다는 것이다. 원씨가 밝힌 특수부대 이름은 805부대 혹은 805훈련소였다. 원씨가 최근까지 방송에 나와 “어릴 때부터 살인병기로 키워졌다. 오각별 던지기, 물속에서 숨 오래 참기 등을 배웠다”고 했던 바로 그 부대다.

    그러나 원씨는 수사과정에서 805부대의 위치와 정확한 소속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원씨는 “차출될 당시 눈을 가리고 들어갔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주석부 근처인 것 정도만 안다. … 훈련받는 사람들은 805부대가 정확한 어디 소속인지 잘 모른다. 대남연락소와 관계가 있다는 생각도 했고, 보위부 소속이라고도 생각했다”고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원씨는 7월 15일 체포 당시에는 805부대에 대해 말을 하지 않다가 이틀 후인 7월 17일 처음으로 805부대에 대해 진술한다. 검사가 그 이유를 묻자 원씨는 이렇게 답했다.

    “북한 보위부의 박OO 과장이 남한에서 잡히더라도 805부대만큼은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해서 끝까지 숨기려 했다. 그러나 검사님과 면담을 하면서 사실대로 말하라는 설득을 받고 생각해보니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진술하게 됐다. 805부대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도 절대 비밀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없다.”

    검찰 기록 어디를 봐도 당시 수사팀이 805부대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특수부대 훈련’은 여전히 꼬리표처럼 원씨를 따라다닌다. 원씨의 행적과 주장을 의심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었지만, 검찰은 대충 넘어갔다. 이와 관련 원씨의 계부 김동순 씨는 “사실 정화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고 말했다.

    국군정보사 간첩?

    수사 당시 원씨는 2002년 10월, 2006년 5월 등 총 3차례 북한에 갔다 왔다고 주장했다. 2002년엔 중국 연길에서 보위부 요원인 여동생과 함께 고무바지를 입고 북한에 들어가 청진 보위부장, 가족을 만나고 돌아왔고, 2006년엔 여동생의 차로 북한에 들어가 여동생이 위조지폐와 마약을 북한에서 받아오는 걸 도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원씨는 기자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면서 이 문제로 꽤 장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원씨는 수사기록과는 달리 “단동에 있는 김교학이 내 북한여권을 갖고 있었다. 김교학에게 여권을 받아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북한에 다녀왔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원씨가 여권을 가지고 북한에 다녀왔다는 얘기는 수사기록이나 판결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수사기록을 살펴보면, 원씨는 남북을 오간 이중간첩이다. 2002년 초 하나원을 나온 뒤부터 국가정보원, 국국정보사령부 요원들과 가깝게 지내며 정보활동을 도왔고, 같은 시기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를 통해 북한 지령을 받아 수행했다. 그렇다면 원씨는 어떤 정보를 남과 북에 전달했을까.

    2003~04년 원씨는 당시 북한에 있던 계부 김동순 씨의 도움으로 연간 1000기 정도의 로켓을 생산하는 청진 로케트공장(97호 공장)과 관련된 정보(공장 설계도, 조직도, 운영체계 등)를 정보사 요원 이OO에게 전달했다. 김씨가 이 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씨는 “이것을 정보사 요원에게 전달하기 위해 심천을 거쳐 홍콩까지 갔다”고 수사 당시 진술했다. 당시 이OO 씨는 김씨에게 한국 위조여권까지 만들어주며 원씨 부녀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이씨는 2008년 사건 당시 검찰에 출석해 원씨와 김씨가 자신의 정보원이었다고 밝히면서 “여러 차례 정보수집 ‘임무’를 내렸다. 임무 수행을 못해 질타한 일도 있다”고 말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원씨가 수년간 북측에 전달했다는 정보는 70장가량의 군인 명함, 탈북자 6명(원씨의 하나원 동기) 신원, 국정원 위치 정도다. 남과 북을 오가며 주고받은 정보로만 보면, 원씨가 우리나라의 간첩인지 북한의 간첩인지 불분명 할 정도다.

    빚에 시달렸던 원정화

    원씨에 대한 취재를 진행하면서 기자는 2007~08년 당시 원씨가 사업을 하면서 생긴 빚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원씨의 진술기록에도 “(2005년 중반 이후) 단동무역대표부와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뒤 손해를 봤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동순 씨 등에 따르면, 2008년 당시 원씨는 수억 원이 넘는 빚을 지고 있었다. 부산의 한 수산업체는 선불금 7900만 원을 갚으라고 원씨를 압박했다. 김씨는 “내가 그 회사에 찾아가 언제까지 갚겠다는 각서를 쓴 적도 있다”고 말했다. 원씨를 아는 한 탈북여성은 “체포될 당시 정화는 빚 때문에 도망 다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원씨 주변에서는 “자기 발로 단동무역대표부를 찾아가 북한에 보내달라고 한 것, 일본 남자와 결혼을 하려고 했던 것, 스스로 간첩이 된 것 모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싶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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