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둘째 부인은 장경왕후인데,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출산한 아이가 인종이다. 장경왕후의 출산을 도운 이는 TV드라마로 유명한 장금이다.
셋째 왕비가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제였던 문정왕후다. 두 딸을 낳은 그는 결혼 17년 만인 중종 29년에 훗날 명종이 되는 왕자를 생산했다. 문정왕후는 인종과 명종 두 왕의 건강과 죽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강력한 여제 문정왕후
‘명종실록’ 20년 4월 6일, 사관이 쓴 윤씨의 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하고 문자를 알았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적에 윤씨가 그를 꺼리자, 그 아우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장경왕후의 아우 윤임(尹任)과 틈이 벌어져, 윤씨와 세자 양쪽 사이를 얽어 모함하여 드디어 대윤·소윤의 설이 있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고위(孤危)를 근심하였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윤씨를 섬겼다. 그러나 삼조할 즈음에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왕)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까지 말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하고 또 상중에 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서 우상(憂傷)이 되어 승하하게 되었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 묘가 있는 태릉.
하지만 4월 20일 명종이 지시해 만든 공식 문서는 사뭇 다르다. “인종이 원자로 있을 때 부지런히 애써 무양(撫養·어루만지듯이 잘 돌보아 기름)함이 자기 소생보다 더 나았다. 항상 인종의 학문이 날로, 달로 진취함을 기뻐하여 유모·보모, 시인(侍人)의 무리에게 자주 상을 주었다. 인종과 효혜공주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을 애통히 여겼고, 공주의 자제에 이르러서도 모든 일을 일체 공주의 예에 의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문정왕후는 두 번이나 공주를 낳은 끝에 결혼 17년 만에 명종을 낳는다. 그동안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누르고 쓴맛 단맛을 보며 권력의 속성으로 앞날을 파악한 여장부다운 처신이 아니었을까.
문정왕후는 권력을 잡자 자신과 대립했던 대윤파를 일소했다. 이때 윤임과 그 일파가 제거되면서 인종 때 등용된 사림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을사사화는 대윤과 소윤의 정쟁이지만, 그 이면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세력과 성리학의 원리주의자인 사림세력 간 갈등이 배경으로 있었다.
훈구와 사림의 갈등
사림은 선조 이후 조선의 정치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 때문에 사림과 갈등을 겪으면서 불교를 옹호한 문정왕후를 실록이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문정왕후의 권세를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은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양재역 벽에 대자보 성격의 글이 게시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其書以朱書曰: “女主執政于上, 奸臣李·#54702;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그 글은 붉은 글씨로 썼는데,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54702;)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여주는 여왕의 권력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이 사건으로 중종과 희빈 홍씨 사이에 난 인종과 명종의 이복형제 봉성군 이완이 사사(賜死)당한다.
불교는 세종마저 평생의 위안처로 삼았으면서도 대놓고 절 하나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던 조선의 이단 종교다. 이 때문에 사회를 거스르며 불교를 육성하고 도첩제를 만들어 승려 보우를 우대한 문정왕후의 배짱은 조선의 미스터리다. 반면 유학적 소양을 지닌 명종이 얼마나 어머니의 압박에 시달렸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종은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의 메시아나 다름없었다. 명종 즉위년 7월 27일 인종의 행장은 이렇게 기록됐다. “왕의 성품이 엄중하여 평소 한가롭게 소일할 적에도 조용히 침묵하면서 희롱하는 말이 없었고, 찡그리거나 웃는 모습을 외형에 나타내지 않았고, 좌우의 근시(近侍)들에게도 일찍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자신의 미덕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으며, 혹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좋아하지 않는 빛이 있었다.…성색(聲色·음악과 여색(女色)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학이 공자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국가와 사회의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했다면, 성리학은 주자를 조종으로 해 태어난바 마음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학이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불교적 공(空)의 세계와 도교의 도(道)의 세계로 확장해 마음의 태극을 닦아가는 공부다.
인종의 극단적 도덕성
조선시대 왕의 이상형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안으로 성현 같은 인격을 완성하고 밖으로 왕다운 왕 노릇을 하는 것이다. 성현은 당연히 공자와 주자가 롤 모델이다. 공자는 ‘논어’ 향당편에서 자신의 식생활 습관을 밝히면서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생강이 정신을 소통하고 내부의 탁한 악기를 없앤다고 주석을 달았다.
인종은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조선 전기에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의 궁료들에게 생강을 하사했다.
“내가 ‘논어’에 공자의 음식에 대한 절도를 기록한 것을 보니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입과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을 소통시키고 입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여러분은 공자를 사모하는 사람들로서 비록 말단인 음식 같은 것에서도 반드시 법을 취하고 있을 것이기에 지금 이 채소를 글 선생인 시강원 궁료에 보내는 것이니, 한번 맛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매운 생강을 선물하며 극단의 공자 따라잡기를 한 것이다.
인종과 연산군은 매우 대조적이지만 비슷한 면도 많다. 일찍 세자로 책봉됐고, 어머니가 얼굴도 모르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으며, 계모의 손에 자라 다음 왕위가 계모의 아들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모두 파평 윤씨였고, 31세에 사망한 점도 닮았다. 하지만 인종은 사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극단적으로 효심을 발휘했으며 도학자로서의 금욕정신을 실천한 반면, 연산군은 처용무라는 탈춤을 추고 백모를 겁간하면서 소의 태(胎)를 먹는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극단적인 도덕성도, 극단적인 쾌락도 건강을 해친다는 평범한 진리를 역사가 확인해준 셈이다.
실록은 인종의 효심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원인이 됐음을 담담히 적고 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별다른 질병이 없었다. 자신의 누님인 효혜공주의 죽음을 슬퍼해 초췌해졌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왕이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에서 졸곡(卒哭·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까지 죽만 먹고 염장(鹽醬)은 먹지 않았으며 밤에 편히 자지 않고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상차를 떠나지 않았다. 왕이 시질(侍疾) 초두부터 초췌함이 너무 심하였는데, 대고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철골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날 지경이었으므로 대신이 선왕의 유교를 들어 아뢰면서 권도를 따라 육선을 진어하라고 청하면, ‘나의 성효가 미덥지 못하여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하면서 더욱 애통해하였다.” 병이더욱 악화된 것도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무리했기 때문이었다.
심열증(心熱症)과 독살설
인종의 재위기간은 8개월이다. 인종 1년 윤(閏)1월 1일부터 약방제조와 의원들은 계속해 진찰을 받고 약을 쓸 것을 건의하지만 거절당한다. 1월 9일 “심폐와 비위의 맥이 미약하고 입술이 마르고 낯빛이 수척하며 때때로 가는 기침을 했다. 정부 및 육조·한성부가 아뢰기를, “상의 옥체가 매우 피곤하고 비위가 미약하십니다”라면서 세종의 경우처럼 고기반찬을 먹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인종은 1월 29일 “나도 아들인데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어디에다 나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느냐”고 되레 반문한다. 실록은 인종이 정말로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기록했다.
인종 1년 6월 25일 이질(설사) 증세가 시작되면서 증세가 급격하게 나빠진다. “상의 증세는 대개 더위에 상한 데다 정신을 써서 심열(心熱)하는 증세로 매우 지치셨는데, 약을 물리치는 것이 너무 심하여 광증을 일으키실 듯합니다.”
7월 1일 인종은 세상을 떠난다. 하루 전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성리학의 메시아답게 죽은 조광조를 잊지 않는다. 자신의 마지막 비원을 윤임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조광조를 복직시키고 현량과를 부용(復用)하는 일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용기 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큰 유한이 없지 않다.”
성리학을 숭상했던 인종은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궁료들에게 생강을 하사했다.
같은 날 실록은 야사의 추측에 힘을 보태는 기록을 남겼다. “인종이 이날 이후 원기가 끊어지고 병세가 심해져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명종 20년 4월 6일 문정왕후는 자신의 운명할 날이 다가오자 명종의 체력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유언을 남긴다. “주상은 원기가 본래 충실하지 못하여 오래도록 소선(素膳·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반찬)을 들 수 없으니, 모든 상례(喪禮)는 모름지기 보양하는 것을 선무로 삼아 졸곡까지 기다리지 말고 모든 방법을 써서 조보하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이오.”
스태미나 약했던 명종
명종은 즉위 직전 역질(疫疾)을 앓았다. ‘면역’이란 단어의 ‘역’이 역질인 점을 감안하면 현대적으로 볼 때 면역력이 약했던 것이다.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잘 걸리는 감기는 명종의 질병 중 단골 메뉴였다. 명종 8년 환절기에 바람을 쐬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나른하다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12년 10월 27일 날씨가 따뜻하지 못해 감기를 오래 앓고 있다면서 궁전 처마 밑에 털로 장막을 쳐서 임금을 추위로부터 보호했다고 할 정도였다.
13년 11월과 14년 1월에도 각각 기침과 어지러움, 감기 증세로 진료를 받는다. 감기에 잘 걸리고 추위를 잘 탄다면 이는 몸속의 보일러인 신장의 양기가 약하다는 신호다. 양기가 약하다는 건 스태미나가 약하다는 의미다. 신장은 차가운 쪽과 뜨거운 쪽 양면이 있다. 차가운 쪽이 물을 상징하는 신수(腎水)라면 신장의 뜨거운 부분인 명문(命門)은 보일러이며, 흔히 단전(丹田)이라는 붉은 밭과 맥락을 같이한다. 현대 의학의 부신(副腎)처럼 보일러와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명문은 생명의 문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체의 보일러 구실을 한다. 신장의 양기를 상징하며, 남자의 스태미나를 내포한다. 명종은 스태미나가 약했던 만큼 자식 농사도 힘들어 순회세자 하나만 낳았는데 일찍 죽고 만다.
즉위년 8월 15일엔 문정왕후의 지극한 보호 아래 경연과 곡림(哭臨·임금이 죽은 신하를 몸소 조문하는 것)을 중지한다. ‘마마보이’ 명종은 엄마의 극성스러운 보호를 받는다. “주상께서 큰 역질을 겪으신 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기가 허약하여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한다. 학문과 양기가 모두 중요하나 내 생각으로는 기운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실록의 사관은 문정왕후의 이런 지적을 대놓고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기운을 보양하는 것이 학문보다 중요한지 모르겠다’라고 딴죽을 걸었다.
성리학자 이언적은 의외로 문정왕후의 지적에 힘을 보탠다. “어제 전교를 들으니 ‘주상께서는 춘추가 어리신 데다 금년에 또 역질을 앓으셔서 기체가 충실하지 못하니, 학문이 진실로 힘써야 하는 것이지만 신기(身氣)를 보양하는 일 또한 큰일이다. 곡림과 경연은 위에서 헤아려서 조처하겠다’ 하셨는데 상교가 지당하십니다.” 이언적은 혈기가 안정되지 않을 때 색(여자)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명종의 건강과 스태미나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꼽는다.
세자의 죽음으로 건강에 타격
한의학에선 목소리와 스태미나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언적의 지적에 근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종 3년 11월 7일 시강관 정유길은 왕의 목소리를 거론한다. “옥음을 들으니 여느 때만 못합니다.”
신하들의 불안한 예측은 후일 맞아떨어진다. 명종은 결국 순회세자 하나를 낳았는데 13세에 죽으면서 자신의 건강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는 본래부터 약한 체질로 태어났다. 6년 5월 30일 원자(元子)가 탄생한 지 일주일도 되기 전에 피우(避寓)한다. 사세가 부득이하다는 왕의 지적을 감안하면 태어나면서부터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9년 8월 14일 “원자의 보양은 조심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자가 전일 걸음이 자유로울 적에는 뛰어다녀 별다른 증세가 없었는데, 올해 봄, 여름부터는 다리 힘이 쇠약해져 건강하게 걷지 못하고 때로는 일어서는 것도 어렵게 여깁니다. 간혹 차도가 좀 있기는 해도 역시 전일처럼 건강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된 까닭을 알 수 없었는데, 의원 김윤은(金允誾)이 가서 맥을 짚어보고 ‘습증(濕症)이다’라고 하기에, 신이 ‘보통 사람들은 거처가 잘못되어서 그런 증세가 있게 되지만 원자가 무엇 때문에 그런 증세가 있겠느냐?’ 하니, ‘유모에게 습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12년 8월 19일의 기록은 세자의 건강에 문제가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옹원 주부 김윤은은 전일에 세자가 어리고 약한 데다 기가 허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약을 잘 조제하여 효험을 보게 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백관을 가자할 때 역시 친수하게 하라.”
18년 9월 20일 왕세자 이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명종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진다. 19년 윤2월 24일 명종은 세자를 잃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한다. “나의 심기가 매우 편안하지 않으며 비위가 화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갑갑하다. 한기와 열이 쉽게 일어나며 원기(元氣)가 허약하여 간간이 어지럼증과 곤히 조는 증세가 있고, 밤의 잠자리가 편안하기도 하고 편안치 못하기도 하다.…나이가 3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국가에 경사가 없다. 지난해에 세자를 잃은 뒤 국가의 형편이 고단하고 약해진 듯하니 심기가 어찌 화평하겠는가.”
후계자를 둘러싼 논쟁에서 명종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핏줄을 염두에 뒀다. 그만큼 순회세자의 죽음은 명종의 건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친위 권력 사라져 죽음 문턱
왕의 외삼촌 윤원형이 전횡을 일삼았던 명종 때엔 의적까지 출현했다. 임꺽정의 산채가 있었다고 전해오는 한탄강 고석바위(오른쪽).
이에 본래부터 심열증을 앓던 명종은 큰 충격을 받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 20년 9월 15일엔 열이 심해 입시한 신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대신들은 후계자 문제에 대해 절박하게 물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명종은 “내전(內殿)에서 생각하여 처리할 것이다.”(당시에 상이 하답하기가 어려워서 이같이 하교했으나 실은 후사를 정하겠다는 뜻이 없었다) 대신들은 다시 왕비를 압박했고, 왕비는 마지못해 한글로 하성군 이균(선조)을 지목했다. 이것이 바로 ‘을축년의 하서’다.
심열증은 명종이 가장 자주 호소한 괴로움이다.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한 번도 왕권을 행사해보지 못한 마마보이의 전형이다. 윤원형의 전횡이 이어져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임꺽정이란 의적까지 출현한다. 명종 14년 3월 27일 임꺽정 토벌 방안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재상들의 인식은 사태의 본질을 분명하게 환기시켜준다. “도적이 출현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특이한 상황도 많다. 명종 21년 2월 29일 전하는 다음 이야기는 단적인 예다. “사서(士庶)들이 주색을 즐기다 음창(陰瘡·성병)에 걸린 이가 많았다.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면 그 병이 즉시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통을 받던 이들이 많은 재물로 사람을 사서 죽이고 그 쓸개를 취했다. 종루, 보제원, 홍제원 등에는 걸인이 많이 모였는데 4~5년 새 이들이 다 사라졌다. 나중에 이들은 평민에게까지 손을 뻗쳐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다.”
음창은 사타구니에 생기는 부스럼으로 일종의 성병 후유증이다. 이것을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심약한 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 졸기다. “환시(宦侍)를 대할 때에는 매우 질타했지만 외신(外臣)을 대하면서는 조금도 잘못됨이 없게 하였으니, 공론을 두려워하고 조정을 높이는 것이 지극했던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상이 군자를 쓰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죽여버리고, 상이 소인을 제거하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에게 붙좇는 것을 이롭게 여겨 서로 이끌어 나왔다.”
외부에 강한 사람은 내부에 약하고 외부에 약한 사람은 내부에 강하다. 심약한 명종은 내시들에겐 한없이 강했지만, 외부로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거나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상열하한증에 시달려
실록 17년 7월 12일 “상은 성품이 강명(剛明)하여 환시들의 잘못을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고, 항상 궁중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꾸짖고 매를 치기까지 하였다. 다만 스스로 심열을 걱정하였다. 희로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에 벌을 주었다가 저녁에는 상을 주고 또는 저녁에 파면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서용하니, 환시들이 상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심히 두려워하지 않았다.”
22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문제로 왕은 지레 겁을 먹고 고민했다. 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상이 평소 심열이 있는 데다 더욱 사신에 대한 생각에 열증을 돕는 징후가 없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심열증이 심해지면서 명종의 체질적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실록 20년, 명종은 자신은 본래 약한 체질로 위는 열이 나고 아래는 냉한 증세가 있었는데 더욱 심해져서 가슴과 명치가 막힌 듯해 음식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21년 9월 13일에도 명종은 자신이 약질로 본디 심열이 있어 병을 자주 앓는데 계해년에 세자를 잃고 매우 상심하고 다시 어머니의 상을 만나 마음이 한없이 괴롭다고 호소한다. 22년 6월 9일에도 위는 뜨겁고 아래는 냉한 증세로 진료를 받는다. 그때마다 토로하는 괴로움은 한의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상열하한증이었다.
음양오행론에서 심장은 우리 몸의 엔진이어서 불꽃(火) 같은 힘을 상징한다. 신장은 겨울을 상징하므로 차가운 물(水)을 나타낸다. 불은 위를 향하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상열하한을 치료하는 수승화강(水升火降)은 마음을 다스려 심장의 열기를 하부로 내리고 신장에 저장된 차가운 물을 데워 상승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명종은 스트레스로 심열이 심해져 불이 위로 향하고 스태미나를 상징하는 신수는 고갈돼 상승할 수 없었다. 평소 의식주 습관도 문제가 있었다. 너무 더운 곳에 거처하고 너무 두꺼운 옷을 입었으며 찬 음식을 즐겼기 때문에 소화 기능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도 여름에 찬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 지병을 앓은 명종의 소화 기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왕이 건강할 권리
22년 6월 27일 실록은 마지막 증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상께서 열기가 위로 치받쳐 올라 인사를 살피지 못한다.”
‘동의보감’은 이런 증상을 간열과 비허로 파악했다. “몹시 성내어 간을 상하면 열기가 가슴에 밀려오고 숨이 거칠고 짧아지면서 끊어질 듯하며 숨을 잘 쉬지 못한다”“지나치게 생각하여 비를 상하면 기가 멎어서 돌아가지 못하므로 중완에 적취가 생겨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배가 불러 오르고 그득하며 팔다리가 나른해진다.”
성리학은 본성과 천리를 파악하고 수양함으로써 기질과 욕망을 억제하고 경건하게 살 것을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해답을 지닌 치유 체계도 공존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은 왕이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았다. 성리학 원리주의자였던 인종과 심약한 마마보이 명종은 그렇게 조선의 이념적 질곡 속에서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