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金氏왕조’보다 더 무장투쟁 정통성

北 ‘2인자’ 최룡해 혈통과 미래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4-04-18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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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투가 벌어져 위기에 처했을 때 최룡해가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을 상기하며 살 길을 도모할 것인지, 무기력하게 사라져갈 것인지가 북한 정세를 좌우하는 키포인트가 될 것이다.”
    ‘金氏왕조’보다 더 무장투쟁 정통성

    2012년 4월 13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평양에서 열린 김정일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박수치고 있다. 4월 9일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최룡해(오른쪽에서 두 번째).

    3대 세습 권력자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것과 관련해 북한 노동당 간부 출신 탈북자 A씨의 분석이 흥미로웠다. A씨는 북한 고위직을 지낸 인사의 아들로 2월 11일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백두혈통을 강조하는데 꼼수가 있어요. 누가 후광을 누리는지 잘 살펴봐야 해요.”

    A씨는 추론이 아니라 정보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황순희 노인이 주석단에 느닷없이 왜 나타났을까? 전례 없는 일이에요. 항일 빨치산 가계(家系)가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한 겁니다. 장성택은 ‘잡것’ ‘곁가지’라는 거죠.”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2주기 추모대회 때 주석단 김정은 왼쪽 세 번째 자리에 올해 95세인 황순희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이 앉았다. 생존한 빨치산 1세대 셋 중 하나다.



    A씨는 ‘신권력파’라는 표현을 썼다. 최룡해가 신권력파와 함께 장성택을 제거한 것으로 봤다. 신권력파로는 노동당 조직지도부 인사들을 가리켰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인 조연준 황병서는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신(新)실세라고 할만하다.

    “최룡해? 멋있잖아, 인민이 보기에. 김정은 앞에서 충성맹세하는 것 봐요. 인민 눈엔 충신인 거예요. 역사가 설명하듯 무신 정권이 왕조를 살려놓으면 권력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북한의 권력층이 파(派)로 나뉘어 알력을 빚을 소지가 커요.”

    최룡해는 장성택 처형 직후인 지난해 12월 16일 인민군 충성맹세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 준엄한 시련의 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권위를 헐뜯으려는 반당분자들을 가차없이 쏴죽이겠다고 추상같이 외치며 권총을 뽑아들었던 항일혁명투사들을 본받아 김정은 동지의 영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색출해 처단하겠다.”

    A씨는 “북한이 백두혈통을 강조하면서 가장 큰 후광을 누리는 이가 바로 최룡해”라면서 “백두혈통의 범위는 필요에 따라 항일 빨치산 가계로 넓어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최룡해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북한의 미래와 관련해 매우 중요하다”고도 했다. 또 “권력 암투의 향배에 따라 김씨왕조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36세 때 권력 집단 진입

    4월 9일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최룡해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인민군 총정치국장이면서 당중앙위원회(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부위원장), 국방위원회(부위원장) 등 3개 핵심 권력기관 요직을 차지한 것.

    한국 언론은 “최룡해가 2인자 입지 굳혔다” “장성택 빈자리 채웠다”고 보도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 체제의 명실상부한 2인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라고 분석했다.

    장성택 처형 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을 두고 북한 전문가 집단에서는 엇갈린 견해가 나온다. “장성택 실각은 권력암투의 산물로 불안정성이 증대한 것”이라는 견해와 “1인 지배체제가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서로 다른 분석이 그것이다.

    최룡해의 부상을 두고도 정보가 불충분한 터라 이론이 많다. 왕조를 연상케 하는 수령독재 국가에서 2인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시각과 최룡해가 군권을 사실상 장악했다는 견해가 엇갈려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4월 9일자 기사에서 최룡해를 “김정은 체제하에서 떠오르는 스타로 장성택의 공백을 메웠다”고 보도했다. “최룡해는 이제 김정은 정권의 진짜 넘버 2”라는 한 전문가 견해도 소개했다.

    代 이은 ‘절대 충신’ 본보기

    최룡해는 한동안 외부 분석가에게 여럿 중 하나(one of them)일 뿐이었다. 특별한 위상에 처음 주목한 언론은 ‘신동아’다. 김정일 사망 6개월 후 ‘최룡해 핵심 실세로 급부상…장성택보다 공식서열 앞서’ 제하의 정성장 세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의 기고문을 실었다.(2012년 6월호)

    정성장 연구위원에 따르면 최룡해가 ‘당중앙위원회 위원’이라는 당내 중요 지위에 오른 것은 1986년 12월로 장성택보다 6년 앞선다. 36세 때 100명 안팎의 파워엘리트 그룹에 진입한 것. 장성택은 46세 때(199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됐다. 최룡해는 2010년 9월 개최된 제3차 당대표자회 때도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당중앙군사위원회 명단에서 장성택 앞에 호명됐다. 제3차 당대표자회 때 김정일을 제외하고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서국과 당중앙군사위원회 직위에 모두 선출된 것은 최룡해가 유일했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비서국, 군사위원회에 모두 선출된 인물은 김일성과 김정일뿐이었다. 최룡해는 NYT의 표현처럼 ‘떠오르는 스타’라기보다는 ‘항일 빨치산 가계 2세대 실력자’라는 게 적확해 보인다.

    북한 매체에서 ‘백두혈통’이라는 낱말이 본격 등장한 때는 2009년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다. 백두혈통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가계를 가리킨다. 백두혈통에 버금가는 게 항일 빨치산 혁명 가계다.

    2012년 4월 8일 ‘노동신문’은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과 관련한 기사를 실었다. ‘자기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몸에 배인 사람’이라면서 “주체혁명위업 계승을 위한 조직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당의 영도체계를 튼튼히 세우는 데서도 언제나 앞장섰고 견결하였다”고 썼다. 이튿날(4월 9일)은 최현 사망 3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북한 당국은 4월 10일 ‘최현 서거 30주년 중앙추모회’를 개최했다. 최룡해는 이날 차수 칭호를 받았다. 노동신문은 4월 11일 5면 전체를 할애해 중앙추모회 관련 기사를 실었다. 장성택 처형 직후인 지난해 12월 14일 노동신문에는 ‘우리는 김정은 동지밖에 모른다’는 제목의 정론이 실렸다. 정론은 ‘누가 감히 우리 수령님을’이란 대목을 언급하며 “어제 날 종파 나부랭이들의 숨통에 권총을 들이대고 불을 토했던 투사들의 외침소리는 결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말 놓고 지내

    최현은 소련파, 연안파가 김일성에게 반기를 든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장에서 박창옥, 윤공흠, 서휘 등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고 “누가 감히 우리 수령님을”이라고 말했다. 최룡해가 12월 16일 충성맹세에서 언급한, “반당분자들을 가차없이 쏴죽이겠다고 추상같이 외치며 권총을 뽑아들었던 항일혁명투사”가 최현이다.

    노동신문은 지난해 12월 20일엔 최현에 대해 “두 대전(항일투쟁과 6·25전쟁)의 초연탄우(硝煙彈雨)를 헤쳐온 감때사나운 백전노장”인데도 “젊으신 장군님(김정일)의 선군 영장다운 풍모와 위대성에 매혹돼 장군님을 모실 때면 천하가 발밑에 있는 듯 더없이 기뻐했다”고 묘사했다. 최현과 종파 나부랭이(소련파, 연안파)를 대치하면서 최룡해를 띄운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한 ‘잡것’(북한 매체는 “백두의 혈통이 흐르는 조선노동당에는 잡것이 섞일 틈이 없다”면서 장성택을 ‘잡것’에 비유했다)과 대척점에 선 ‘절대 충신’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백두혈통과 항일 빨치산 가계의 나라, 북한의 실세로 부상한 최룡해의 특별한 위상을 파악하려면 최현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현은 북한 연구자 사이에서 최룡해처럼 여럿 중 하나(one of them)일 뿐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항일 빨치산 연구는 터부시됐으며 이후에도 최현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은 없었다. 최룡해가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최현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고조됐다.

    ‘신동아’는 최근 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작성한 A4용지 40매 분량의 미공개 논문을 입수했다. 논문 제목은 ‘최현의 재조명’. 정부 당국의 의뢰를 받아 북한 사료 등을 바탕으로 최현을 탐구한 것이다.

    이 논문의 결론은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은 김일성보다는 최현에게 있다”는 것이다. 김씨왕조(金氏王朝), 그러니까 김정은가(家)보다 최룡해가(家)가 항일무장투쟁에서만큼은 역할이 더 컸다는 얘기다. 결론 부분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백두혈통의 순수성을 지켜내려는 북한정권의 고투(苦鬪)는 성공적으로 관철되기 어려워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은 김일성보다는 최현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최룡해가 현 정권의 2인자 노릇을 하고 있다. 최룡해는 과연 아버지 최현처럼 정권에 대한 절대 충신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장성택의 처형에서 교훈을 얻어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인가?”

    1907년 태어난 최현의 아버지는 독립군이었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동료 중 독립군 집안에서 태어난 이는 최현이 유일하다. 최룡해의 어머니인 최현의 부인 또한 항일 빨치산이었다. 문순보 연구위원의 미공개 논문 중에서 그간 알려지지 않은 사실만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는 논문에서 인용한 것)

    *김일성과 최현의 업적만을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면 오히려 김일성의 심복이자 절대 충신이었던 최현의 투쟁사가 더욱더 무장투쟁의 역사로 정통성을 지닌 것이었다. 최현은 출신 성분부터 독립군 집안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반일, 항일사상을 체현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전투에 직접 지휘 또는 참가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8일자 기사의 일부다.

    “그리하야 김일성은 작년부터 비로소 활동을 하여오며 부하의 훈련 전법의 연구들을 게흘리 하지 안허 지금에 이르럿고 최현은 수십년 이어 준비를 하여오든 자로 나이 오십을 넘엇는데 김일성을 어린아히와 같이 취급을 하고 잇는거으로보아 그의 실력을 엿볼수 있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최현의 나이는 오류다. 최현은 김일성보다 다섯 살 위다. 일제 관동군 토벌대는 최현을 ‘사자’라는 은어로 표현했다. 김일성과 최현은 서로 반말을 했다. 김일성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껴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순보 연구위원이 확보한 중국 유력 인사의 증언은 이렇다.

    “평양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데, 김일성 주석이 최현과 함께 있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최현이 김 주석에게 ‘일성아’라고 부르는 것도 여러 차례 들었다. 김 주석 역시 그런 최현을 거리낌 없이 친구로 대했다.”

    최룡해도 어릴 적 김정일을 ‘형’, 김경희를 ‘누이’라고 부르면서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룡해의 운명

    *최현의 무산지구 습격은 시기적으로 볼 때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보다 20여 일 앞섰기 때문에 군사력을 동원한 국내진공도 무산지구 습격이 보천보 사건보다 더 빨랐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최현의 기록은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김일성 권력 장악 과정에서 그를 우상화하고자 최현이 김일성의 부하였던 것처럼 조작된 것이며 최현의 전공(戰功)과 그 의미를 절하하고 있다.

    북한 학생들은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한 ‘김일성 동지 혁명 역사’를 외워야 한다. 한국의 주사파 상당수도 북한이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 기록에 매료돼 있다.

    최현 부대는 1937년 5월 15일 함북 무산군의 한 마을을 습격해 경찰지서를 파괴했다. 5월 20일에도 두만강을 건너 무산을 습격했다. 무산지구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앞서 언급한 1937년 5월 최현 부대의 역할과 1939년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 부대를 인솔하고 일제에게 심대한 정치군사적 타격을 줬다고 ‘주장하는’ 전투가 그것이다.

    *무산지구 전투에서도 최현의 부대는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최현이 주도했던 무산지구 전투가 아닌 또 다른 무산지구 전투를 선전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먼저 있었던 1937년의 무산지구 전투에 관해서는 아무런 해설이 없다. 김일성이 주도하지 않았고 단순 참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1939년에 발생한 무산지구 전투는 김일성이 주도했던 전투이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기념탑까지 만들어 선전하고 있다. 김일성이 모방할 수 없는 최현 특유의 전사로서의 기질과 지휘관으로서의 주도면밀함은 1939년 10월과 그해 겨울에 있었던 한총구 전투와 얼청페 전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 두 전투에서 최현은 그 나름의 지략과 전술을 선보이며 적의 병력을 격퇴시켰다.

    문순보 연구위원은 “최현은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함께한 동료로 김일성보다 나이도 많고 빨치산으로서 성과도 더 컸지만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끝까지 충성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룡해는 북한 사람이 ‘진정한 군인’으로 기억하는 최현과 다르게 현실주의자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권력암투는 숙청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암투가 벌어져 위기에 처했을 때 최룡해가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을 상기하며 살길을 도모할 것인지, 무기력하게 사라져갈 것인지가 북한 정세를 좌우하는 키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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