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에선 ‘성(性)차별’이 아직 심한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엔 일부 남성이 여성을 적대시하는 ‘성 갈등’ 조짐이 뚜렷하다. 이 문제는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성차별과 성 갈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양상을 들여다봤다.
시사지 ‘타임’ 표지 일부.
요즘엔 이 점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이런 부처를 만들어야 할 만큼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의미다. 둘째, 일부 남성의 시각에서 보면 이런 부처까지 만들 정도로 여성운동이 극성맞다는 뜻이 된다.
2013년 11월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 평등 순위는 136개국 중 111위에 그쳤다. 한국에서 여성은 여전히 억압받고 부당하게 대우받는다는 점을 통계적으로 딱 떨어지게 보여주는 듯하다. 111위라는 등위를 보면 여성은 기본적인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슈퍼 맘’ 강요받는 여성들
국경을 초월해 여성의 공통된 고충은 육아 의무를 거의 도맡는 것이다. 그런데 평균적으로 한국 여성은 서양 여성에 비해 그 고충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육아냐 직장이냐’의 기로에 자주 놓인다. 여성이 육아와 직장 생활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 육아에 드는 비용도 전적으로 개인에게 전가해선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되는 게 없다. 수많은 기업은 임신과 육아를 업무 비효율 사유로 인식한다. 정부는 떨어지는 출산율을 걱정하면서도 여전히 육아비용 지원에 인색하다.
여기에다 우리나라 남편들은 육아와 집안일을 돕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아내에게 ‘모성애로 모든 가사노동을 떠안아’라고 당연하게 요구한다. 많은 여성이 이런 문제로 속을 끓인다. 핵가족화가 상당히 진행됐다고는 하지만 여성은 시댁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고부갈등 같은 꽤 혹독한 감정노동이 수반되기도 한다. 전업주부는 전업주부대로, 맞벌이 여성은 맞벌이 여성대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슈퍼 맘’은 신화일 뿐이지, 실제 현실은 여성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희생을 강요한다고 할 수 있다.
미혼 여성도 차별받기는 마찬가지다. 기업은 직원을 채용하려 할 때 잠재적인 임신과 육아 문제 때문에 여성 구직자를 평가절하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평균적으로 돈을 더 적게 벌고 비정규직에 더 많이 종사한다. 정부 통계(2013년)에 따르면 여성 근로자의 57.5%가 비정규직이다. 이는 남성 근로자의 비정규직 비율인 37.2%보다 20.3%포인트 높은 것이다. 여성 비정규직은 월평균 113만 원을 받는다. 남성 정규직 월급의 35.4%에 지나지 않는다. 정규직 일자리로 접근하거나 승진하는 데 여성은 여전히 불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민간 기업에 인위적으로 여성 정규직 비율을 강제하기란 쉽지 않다. 여성 권한 확대를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면 법과 제도가 여성을 보호하는 쪽으로 바뀐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여성의원 비율만 소폭 늘어도 여성권한척도가 획기적으로 향상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2012년 총선에서도 이 시도는 좌절됐다. 평소 ‘여성의 백기사’처럼 행세하던 민주당도 공천을 앞두고는 슬쩍 눈을 감아버렸다. 한 386출신 남성 정치인은 “여자대학 출신들이 전횡을 일삼는다”며 탈당 엄포를 놓기도 했다. 국회는 주부들의 반찬 걱정도 토론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게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이다. 한국 정치가 지극히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것도 사실 남성 중심 문화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정치 진출이 순조롭지 않으면 여성을 불행하게 하는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남자’ 돌풍의 이면
이런 가운데 요즘 우리 사회에선 일부 젊은 층 남성이 여성을 적대시하는 성 갈등 양상마저 나타난다. 3월 말 음원 차트 순위에서 얼굴도 공개하지 않은 신인가수 브로의 ‘그런 남자’가 정상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남자의 조건만 따지는 여성을 비꼰 가사가 남성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끌었다. 그러자 여성그룹 벨로체가 여성 관점에서 이 가사를 패러디한 ‘그런 여자’로 반격에 나섰다. 전통적으로 대중가요는 남녀 간의 사랑이 주된 소재였는데 이제는 서로를 ‘디스’ 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주류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지 인터넷에서는 진작부터 성 갈등이 심화된 상태였다. 인터넷에서 댓글이 많이 달리는 기사 중 상당수는 종이신문 1면 머리기사가 아니라 성차별 관련 기사다. ‘된장녀’ ‘김치녀’라는 용어의 유행도 여성혐오에 따른 것이다. 여성혐오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과거와 다른 것은 남성의 피해의식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영호남 지역 갈등, 신구 세대 갈등과 함께 남녀 성별 갈등이 우리 사회의 긴장 요소로 등장한 셈이다.
여성을 비판하는 쪽은 “성차별이 과장됐다”고 주장한다. 2013년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불평등지수는 186개국 중 27위로 경제력보다 더 나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고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언론은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내용만 보도한다고 한다. 이렇게 현실을 왜곡하는 뉴스 때문에 여성은 피해의식을 갖고 남성은 피로감을 나타낸다는 이야기다.
여성운동가들은 “유능한 여성이 사회적 고정관념 탓에 차별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은 아시아 내에서 근대화와 민주화의 최고 모범생이다. 유독 성차별만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언뜻 논리적으로 잘 납득되지 않는다. 여성 대통령이 등장했을 리도 없다. 되레 여성을 비판하는 남성들은 한국의 여성운동이 서구와 같은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외래 사상이 들어와 이상하게 변질된 사례가 많다. 사회주의는 북한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습왕조로 변질됐다, 기독교는 기복신앙으로 변했다. 마찬가지로 여성운동도 이상하게 바뀌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한국 여성운동과 서양 여성운동은 여성의 육체를 다르게 이해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한국 여성운동은 생리, 임신, 출산과 같은 여성 고유의 생리활동을 신비화하는 경향이다. 동양의 전통의학이 한국 여성운동에 남겨준 유산은 생리휴가 등의 제도화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
3월 27일 여성 전용 성인쇼인 ‘미스터 쇼’를 찾은 여성 관객들.
서양 여성운동은 해부학적 관점에서 육체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한다. 서구 여성은 남녀 간 신체적 생김새의 차이는 있어도 신체적 능력의 차이는 별로 없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금녀의 영역을 없애려 한다. 반면 한국 여성운동은 남녀 간 신체의 기능 및 능력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궂은일을 떠넘기는 것을 당연시한다. 한국 여성운동이 원하는 것은 결과의 평등이다. 남자들과 똑같이 일할 생각은 없지만 같은 연봉을 받고, 같이 승진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비친다.
일부 남성의 관점에서 한국 여성운동은 과잉 보호를 권리로 여기는 오류를 범한다. 이에 따라 점점 나약한 여성이 만들어지며 여성의 사회 진출에도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들 남성은 ‘생리휴가 같은 이유로 일에서 자주 빠지는 근로자를 어떤 고용주가 좋아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한국 여성 가운데엔 세계적 스포츠 스타가 즐비하지만 평범한 젊은 여성은 자기 가방조차 남자가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됐다.
여성을 과보호하는 제도는 여성 사이에서도 모순을 드러낸다. 생리공결제의 시행에는 여자대학부터 난색을 표한다. 2008년 18대 국회가 개원했을 때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한 언론은 여성을 배신한 여성의 명단을 공개했다. 여성 보좌관을 뽑은 여성 의원이 별로 없다는 내용이었다. 여성은 기업이 유능한 여성을 차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고용주가 되면 여성 친화적 직장을 만들지 못하는 경향이다. 여성 스스로도 여성을 뽑으면 마음대로 일 시키기 어렵고 과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이미 여성 중심 경제를 운용한 적이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수석을 지낸 오원철은 1960년대까지 여성이 주로 생계를 책임졌다고 증언한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은 가난한 나라 여성의 신산한 삶을 상징한다. 맏딸은 일하러 나간 부모 대신해 젖먹이 동생을 업어 키웠다. 사춘기가 되면 도시 공장에 나가 돈을 벌어 송금했다. 1960년대 신의 직장은 제일모직이었다. 이 시절 주력 수출품은 여성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가발, 봉제품이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 간호사가 더 많았다. 저개발 단계에서 여성은 경제 주체가 되고 남성은 빈둥거린다.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여성의 사회적 권한이 높게 나타나는 이유다.
3월 31일 폭발물 설치 신고가 접수된 서울 중구 여성가족부.
한국은 경제성장의 결과를 여성의 지위 향상에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결혼 적령기 남성은 중산층에 편입되기 위해 일하는 배우자를 찾는다. 이런 풍조는 여성의 고등교육 이수와 사회참여를 촉진한다. 수십 년 전 미국에서 이미 나타난 현상인데 우리 사회에서도 본격화한 것이다. 한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제조업에 이어 서비스업이 성장한다면 여성을 위한 고급 일자리는 더 늘 것이다. 여성운동가들이 안달하지 않아도 한국은 이런 길을 가게 돼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될 수는 있어도 어머니 세대처럼 ‘강남 사모님’으로 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젊은 남성을 위한 좋은 일자리는 거의 정체 상태다. 체감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다. 이에 따라 능력 있는 여성 상당수가 30대가 되도록 마음에 맞는 신랑감을 쉽사리 구하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어느 정도 자기 수준에 맞는 남자와 결혼해 맞벌이하며 아등바등 산다.
“남자가 찌질하게…”
남편의 고속 출세에 편승해 풍족한 삶을 누리는 건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엄청나게 오른 부동산 가격과 사교육비 등으로 ‘샐러리맨 신화’는 꺾인 지 오래며 아마 자식 하나 키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성 평등 지수는 향상되어도 그리 행복하지 않은 커리어우먼이 양산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여성 차별은 정확히 얘기하면 사회적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스매치 현상인지도 모른다. 여성운동가들은 이 책임을 기업에만 돌리고 있는데, 실제는 여성 자신의 선택 탓일 수 있다.
‘고시에서 여풍이 분다’는 이야기나 ‘여성 구직자가 차별받는다’는 이야기나 과장되긴 마찬가지다.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여풍이 전혀 없는 곳이 이공계다. 최근 현대자동차가 이공계는 공채 방식을, 인문계는 수시채용 방식을 밝히면서 인문계 차별 논란이 일었다. 제조업이 발달한 사회에서 이공계 우대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인문계 차별이 여성 차별로 둔갑한다. 고시에서의 여풍은 취업시장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인문계 여학생이 고시로 몰려 만든 일종의 풍선효과다.
여성운동가들은 기업의 여성 차별을 탓하기 전에 여학생이 인문계로 지나치게 몰리는 현상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학생의 인문계 편향은 또 다른 피해의식을 낳는다. ‘여성을 외모로 차별한다’는 의식이다. 이 또한 절반의 진실이다. 여성이어서 외모로 차별당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를 중요시하는 분야에 여성이 몰려드는 것이다.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미국 대통령 중에 대머리는 거의 없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미국 남성 평균치보다 키가 컸고 날씬했으며 잘생겼다.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종은 어느 분야나 외모가 경쟁력일 수밖에 없다.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경우를 보자.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윤 전 장관을 미인이라고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여성을 외모로 차별해왔다면 윤 전 장관은 연구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연구 결과물로 평가받는 직종에서 외모로 차별하는 일은 별로 없다. 이공계 직종은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문과 계통은 어떤 형태로건 다수의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 심지어 아이가 좋아 유아교육과를 선택한 여학생도 예쁜 선생님을 좋아하는 유아들의 차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여성운동가들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주로 유교적 전통에서 찾는다. 하지만 기독교 문명이 여성에게 더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기독교 문명은 마녀사냥, 정조대같이 여성의 육체까지 학대했다. 이런 사례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여성해방은 전통문화의 배척이 아니라 합리성의 회복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성 갈등을 가장 촉발하는 소재는 병역 문제다. 유명 여성 인사들은 군대를 비하하는 발언을 너무 자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언제부턴가 “여성이 장교로 복무할 길을 널리 열어달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ROTC에 지원하는 여대생도 많다. 그런데 이는 종전 주장과 모순된다.
1999년 군가산점 위헌 소송 당시 여성계는 “여성이 신체적 한계로 병역을 이행할 수 없고 임신과 출산으로 사회적 의무를 대신한다”고 주장했다. 신체적 한계로 사병을 할 수 없다면서 장교는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보좌관은 못해도 국회의원은 해야겠다? 사병으로는 못 가도 장교로는 가야겠다? 이런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 여성밖에 없다. 서구 여성은 같은 여성이라도 코웃음을 칠 것이다.
미국의 전·현직 여군 4명은 2012년 전투 현장에서 여군을 배제하는 것이 성 차별이라며 미 국방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 국방부는 2013년 여군의 전투병과 배치를 허용했다. 노르웨이 의회는 2013년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1년간의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의무 이행을 통한 여성 권한 확대로 접근하는 것이다. ‘주고받기’야말로 평등과 공정을 진정으로 담보해주는 원리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남성은 “여성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한결같이 “남자가 찌질하게…”라고 말한다. “남녀가 데이트 비용을 함께 분담해야 한다” “남녀가 결혼 시 집 장만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남자가 찌질하게”라는 반응을 보인다. 권리와 의무에 대한 모순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성 갈등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측은 어린 남성들이다. 10~20대 남성은 이제 또래 여성과 대학 입시에서, 직장 취업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많은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을 앞지른다. 이들 남성의 관점에서 또래 여성은 전혀 약자가 아니다. 자신보다 학벌 더 좋고, 학점 더 좋고, 스펙 더 좋고, 심지어 군대 안 가 나이도 어린 여성은 벅찬 경쟁 상대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이들 어린 남성에게 여성을 약자로 대접해주라고 하고, 데이트 비용도 다 대라고 하며 군가산점 같은 것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다.
1960년대 흑인 남성처럼?
이와 관련해 미국 여성운동의 후폭풍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 미국 여성해방운동은 제조업이 시들해지고 서비스업종이 호황을 누리자 기혼 여성을 일터로 적극 내보냈다. 이 탓에 질 낮은 일자리를 두고 백인 기혼여성과 흑인 기혼남성이 충돌했다. 결과는 전자의 완승이었다.
백인 기혼여성이 원한 것은 백인 남편의 수입 외에 가계 살림에 조금 더 보탤 수준의 급여였다. 하지만 이 급여는 흑인 기혼남성에게는 자기 식구 전체를 부양하는 데 필요한 돈이었다. 이들 흑인 남성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자 수많은 흑인 가정이 해체됐다. 이후 흑인 사회엔 편모 가정이 급증했다. 이로 인해 아버지 없이 자란 흑인 아이들이 범죄에 발을 들이고 사회 하층계급으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30년간 미국에선 강도범죄가 5배 증가했다. 이는 흑인과 히스패닉의 만성 실업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 사회도 이런 식으로 흘러갈 수 있다. 여성의 적극적 사회 진출과 여권(女權) 신장엔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 이 비용이 경쟁력 취약한 10~20대 미취업 남성에게 전가될 조짐이 뚜렷이 보인다. 이들 어린 남성 중 여럿은 과거와 달리 좋은 일자리로 접근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비정규직 상태 내지 실업 상태로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이들의 불안, 스트레스, 원망이 커질 것이다. 이에 비례해 성 갈등도 심화될 수밖에 없다.
여성운동가들은 “알파 걸은 있는데 왜 알파 우먼은 없느냐”고 묻는다. 이런 한가한 질문을 하기 전에 알파 걸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용어를 만든 댄 킨들러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알파 걸은 공부 잘하고 능력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외조할 엘리트 남자를 선택하는 여학생을 일컫는다. 여성해방은 남성해방을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냥 두면 남성의 계급 격차를 심화시킨다.
국방개혁을 군인에게만 맡기면 자기권리 과잉 보호로 흐르기 십상이다. 여성정책도 여성운동가에게만 맡겨선 안 된다. 여성운동의 시조 격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해방은 자유를 지향한다”고 했다. 성차별과 성 갈등은 모두 자유가 억압된 상태다. 어느 일방이 아닌 양성의 자유 확대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