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2010년 태블릿PC인 아이패드를 내놓으면서 전자책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애플이 전자책 시장에 진출할 당시 이 시장은 아마존이 장악하고 있었다. 시장 점유율이 90%를 넘었다. 아마존은 전자책 판권 가격이 얼마인지에 관계없이 모든 전자책을 권당 9.99달러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시장점유율을 높여 독점기업의 위치에 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마존의 시장독점은 좀처럼 깨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전자책 시장에 새롭게 진출하면서 애플은 먼저 미국의 주요 출판사 5곳과 아이패드를 통한 전자책 판매 계약을 맺었다. “전자책 가격은 출판사가 자유롭게 정하되 판매 이익의 30%를 애플이 가져간다”는 조건이었다. 애플은 당시 출판사들에 권당 12.99~14.99 달러의 가격을 제시하면서 협력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애플이 내건 조건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서점이 갖고 있던 전자책 가격 결정권을 출판사에 돌려준 것부터가 달랐다. 당연히 출판사들은 애플의 제안에 환호했다. 애플은 가격 결정권을 출판사에 주면서 동시에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핵심은 출판사가 애플의 매입가보다 낮은 가격으로는 다른 곳에 전자책을 팔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최혜국 대우조항’이었다. 이런 윈윈 전략 덕분에 출판사들은 거대한 독점기업인 아마존에 대응할 수 있었고, 애플 또한 신규시장에 손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끝에 애플은 시장에 진출한 직후 10%가량의 시장점유율을 보이며 아마존에 맞섰다. 9.99달러로 묶여 있던 미국의 전자책 가격도 서서히 상승했다.
아마존과 애플의 싸움
미국 법무부가 애플을 상대로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과징금(civil penalty) 청구 소송을 제기한 건 2012년이었다. 당시 미 법무부는 애플이 출판사들과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 가격을 담합하고, 출판사가 아마존과 전자책 계약을 맺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33개 주 소비자단체는 애플의 담합행위로 전자책 가격이 올라가면서 소비자가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됐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제기하면서 소비자단체가 문제 삼은 법은 바로 1890년 제정된 미국 최초의 독점금지법인 셔먼법이다. 셔먼법은 국내외에서 정상적인 시장거래를 제한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생산주체들 간에 벌어지는 어떤 형태의 연합(카르텔)도 불법이라고 판단한다. 또 거래나 통상에서 어떤 형태의 독점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애플은 셔먼법을 어긴 것일까.
이번 애플의 전자책 담합 사건은 여러 가지 점에서 검토할 부분이 많다. 만약 이번 사건의 쟁점을 제조사(출판사) 간 담합으로 판단한다면, 이는 분명한 셔먼법 위반에 해당한다. 미국의 출판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출판사 5곳이 카르텔을 형성한 것이 되기 때문에 법적인 판단은 단순해진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판매사(애플) 제조사(출판사) 간 수직적 담합으로 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비록 담합이 이뤄졌다 해도 합리성(rule of reason)을 갖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리고 합리적인 담합이었다고 판단되면 적법한 경영활동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미국 법원은 이번 사건을 판매사인 애플의 주도하에 벌어진 출판사들 간의 수평적 담합, 곧 셔먼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소송에서 부각된 각각의 쟁점에 대한 애플과 법원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애플은 “출판사와 애플이 담합을 했다 해도 이는 수평적인 담합이 아닌 수직적인 담합이기 때문에 위법 법리보다 합리적 법리에 의해 판단돼야 한다. 또 애플의 행위는 전자책 시장의 경쟁을 촉진한 긍정적 면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법원은 “애플이 출판사와 직접 합의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는 수직적 담합이 아니라 수평적인 담합으로 명백한 위법”이라고 밝혔다. 또 “출판사가 가격을 인상하도록 공모할 의사가 없었고, 애플과의 계약을 이용해 전자책의 소매가격을 인상한 것은 출판사이기 때문에 애플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애플의 주장에 대해서도 법원은 “상호 협업에 의해 전자책 가격을 인상하려고 한 합의가 명백하게 확인된다”고 판시했다.
애플은 이외에도 “실제 가격 인상은 없었다”는 주장을 폈지만 법원은 “애플이 전자책에 대한 소비자가격 인상을 유도했다는 점이 인정된다”며 애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애플이 담합합의에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참가하고, 나아가 담합행위 전체에 명시적으로 참여했다”며 애플의 주장을 배척했다.
우리나라에선 쉽지 않은 소송
이번 판결은 새로운 시장에 진입하는 기업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줬다. 카르텔(담합행위)이 어떤 경우에 위법한지, 카르텔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던진다. 기존 독점자의 기득권을 타파하기 위해 이뤄진 담합이 과연 공정거래법의 테두리 안에서 허용될 수 있을지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고민스러운 주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사건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법원이 셔먼법을 과도하게 확대 해석했다는 주장도 많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주로 특정 기업의 시장독점이 가져올 폐해를 우려한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아직은 독점적 시장지배자인 아마존이 낮은 가격정책을 유지해 다행이지만,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향후 얼마든지 소비자의 권리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이번 판결은 디지털 콘텐츠 시장에 진입하려는 신규 기업의 경영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이번 판결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기존의 독점구조에 대응하는 기업의 시장 진입을 막는 논리로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 법무부는 이런 종류의 사건을 주로 형사(刑事)적으로 해결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사적인 소추 대신 민사소송을 통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법조계에서는 미국 법무부가 이번 사건을 민사적으로 다루는 이유에 대해 ‘형사소추 시 공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시장에 진입하려는 기업의 노력을 감안해 법무부가 형사적인 제재보다 민사소송을 택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어떤 경우이든 간에 법원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란 분석이다.
판결이 나온 직후 애플은 항소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이번 판결이 파기될 확률은 높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일반적인 전망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 출판사들이 사실상 백기투항하며 법무부와 화해하고 사건을 종결한 것도 이번 판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번 미국 법원의 판결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본다. 집단소송제 도입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우리나라의 사정 때문에도 그렇지만, 3200억 원 이상(2013년 기준) 규모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전자책 시장을 생각해도 그렇다. 단순히 남의 나라 얘기로만 볼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미국에서와 같은 소송이 벌어졌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과연 미국에서처럼 담합 사실을 인정받아 소비자가 천문학적인 금액의 배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그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란 게 필자의 판단이다.
우리나라 법원은 기업의 담합 여부, 특히 담합 합의 여부 판단에 대해 유독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 이미 여러 차례 대형 담합 의혹 사건이 제기됐지만 법원의 엄격한 입증 요구 때문에 번번이 과징금 처분이 취소됐다. 심지어 담합에 관여한 기업 중 하나가 스스로 담합을 시인해도 이를 담합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례가 있을 정도다. 최근 여러 대기업이 관련된 ‘가격담합에 대한 과징금부과처분취소’ 사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담합에 참여한 구성원 전체의 직접적 합의가 없어도 개별적 합의의 집합만으로도 담합 혐의를 인정(합의인정법리, Hub and Spoke Conspiracies)하는 미국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게 현실이다.
애플의 담합소송에 대한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소송이 가능하고, 또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아 소비자가 거액의 배상금을 기업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한 우리의 법 현실을 생각하면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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