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성 업무과장 윤기철은 개성공단 지도총국 오영환 국장의 초대로 평양에서 온 고위간부 전성일과 만찬을 한다.
- 이후 본사 호출로 서울에 온 윤기철은 자신이 남북 비선의 연락책이 됐음을 알게 된다.
- 한편 정순미는 윤기철로부터 화장품을 선물 받고 얼굴이 빨개지는데….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어서 오십시오. 자,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40대쯤의 사내는 안내인 같다. 앞장서 걷는 사내의 뒤를 따라 윤기철과 정순미는 건물로 들어섰다.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넓다. 그러나 불을 환하게 켜놓았지만 인기척이 없어서 대리석 바닥에 셋의 발걸음소리만 울렸다. 사내가 멈춰 선 곳은 복도 오른쪽 방이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을 연 사내가 비켜서면서 말했다. 방안으로 들어선 윤기철은 원탁 안쪽에 앉아 있는 오영환을 보았다. 오영환의 옆쪽에도 사내 하나가 또 있다.
“아이고, 윤 선생, 어서 오시라요.”
커다란 목소리로 말한 오영환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옆쪽 사내도 웃음 띤 얼굴로 조금 늦게 일어난다. 오영환보다 직급이 높은 것 같다.
“평양에서 오신 전성일 동지시오.”
오영환이 사내를 소개했다.
“윤 선생 말씀을 듣고 만나보시겠다고 하셔서.”
“반갑습니다. 윤 선생.”
손을 내민 전성일은 50대쯤 되어보였다. 오영환과 비슷한 연배였는데 마른 체격에 후줄근한 양복 차림이다. 전성일은 정순미에게 머리만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원탁에는 이미 요리가 가득 놓여 있었지만 마치 전시품 같았다. 김치 접시는 꽃무늬가 박혀 있고, 꽃병으로 보인 것은 술병이다.
“자, 드십시다.”
전성일이 윤기철에게 권하고는 수저를 들었다.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역시 전성일이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갖가지 요리가 있었지만 어디 맛을 볼 여유가 있겠는가? 건성으로 먹고 건성인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밥그릇이 절반쯤 비워졌을 때 전성일이 물었다.
“부친께서는 뭘 하시지요?”
“예, 개인택시를 하십니다.”
선뜻 대답한 윤기철이 덧붙였다.
“한국에는 개인택시라고 개인 소유의 택시가 있지요. 일반 택시하고는 다른….”
“압니다.”
웃음 띤 얼굴로 전성일이 말을 받았다.
“오래 택시를 하셨습니까?”
“예, 한 30년….”
“개성에 오실 때 부친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예, 잘 갔다 오라고….”
이미 뒷조사는 다 해놓았을 것이므로 윤기철은 똑바로 전성일을 보았다. 아버지 윤덕수는 6·25 같은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당장이라도 총 들고 나설 양반이다. 윤덕수가 자신의 월남전 참전과 윤기철의 개성공단 파견을 같은 맥락으로 본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그때 전성일이 된장국을 떠 먹고나서 다시 물었다.
“윤 선생은 북조선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요.”
수저를 내려놓은 윤기철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대답했다.
“그 핵을 한국에다 쏠 건 아니지요?”
“아, 당연히.”
손까지 저었던 전성일이 풀썩 웃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미제 침략에 대한 방어용인데.”
“솔직히 전 실감이 안 납니다.”
머리를 내저은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관심이 없어요.”
“그것이 남조선 인민들의 생각인가요?”
“모릅니다.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전성일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우리하고 저녁을 먹었다는 것이 곧 남조선 정보기관에 알려질 겁니다.”
“…”
“그들이 곧 윤 선생한테 묻겠지요. 누구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말입니다.”
“…”
“내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오늘 모임은 여기 있는 오 국장이 윤 선생을 특별히 초대해서 일 잘하라고 격려하는 자리였습니다. 윤 선생은 공장 대표의 추천을 받은 것이지요.”
옆에 앉은 정순미는 전성일을 응시한 채 눈도 깜박이지 않는다. 경직된 분위기를 의식한 듯 전성일이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더니 얼굴을 펴고 웃었다.
“물론 정순미 동무도 안내만 하고 이 자리에는 없었던 것으로 하십시다. 그리고 앞으로는.”
전성일이 윤기철과 정순미를 번갈아 보았다.
“정순미 동무가 윤 선생 업무에 적극적으로 협력해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언제라도 정순미 동무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돌아오는 차에는 윤기철 혼자만 탔다. 오후 10시 40분이다. 차량 통행이 뚝 끊긴 도로를 달리는 차 뒷좌석에 앉아 윤기철이 창밖을 본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고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전성일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이름도 가명일 것이다. 아무래도 북한 측이 정순미를 매개체로 삼아 뭔가 공작을 꾸미려는 것 같다. 혹시 미인계인가? 윤기철의 머릿속에 정순미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그런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머리를 기울였던 윤기철이 곧 길게 숨을 뱉었다.
“시바, 내가 거물이 된 것 같군.”
혼잣소리였지만 목소리가 커서 운전사의 시선이 백미러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벤츠는 잘 달린다. 앞쪽에 회사 건물이 보였을 때 윤기철은 자신의 컨디션이 나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간지 기자인 임승근의 얼굴이 떠올랐으므로 윤기철은 머리를 내저었다. 이건 기삿감이 아니다. 여긴 다른 세상이다.
“오 국장이 일 잘하라고 격려하는 자리였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김양규에게 윤기철이 보고했다. 전성일이 시킨 말에서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공단 북쪽의 흰색 대리석 2층 건물이었어요.”
윤기철이 화제를 바꿨다.
“사무실 건물 같았는데 요리상이 잘 차려져 있었습니다.”
“정순미는?”
“안내만 해주고 사라졌습니다.”
“오 국장이 다른 이야기는 안 해?”
“저를 좋게 본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
“조 대표가 저를 추천했다는군요.”
“내가 서울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알 거야. 나하고 정순미 씨는 연락만 하는 위치니까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지.”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희미하게 머리만 끄덕였다. 그때 윤기철이 다시 옆에 놓인 종이봉투를 집어 정순미에게 내밀었다. 꽤 묵직한 종이봉투다.
“이건 내가 정순미 씨 주려고 사온 선물이야. 화장품이 들었어.”
그 순간 정순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순식간에 빨개진 것이다. 시선을 주는 동안에 빨개져서 윤기철은 어리둥절했다.
“받아, 어서.”
내민 종이봉투를 흔들면서 말했더니 정순미가 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머리를 내저었다.
“안 돼요.”
“안 받으려면 그 서류도 이리 내. 그것도 받지 말라고.”
“서류하고 그건 다르죠.”
정순미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시선을 든 정순미의 두 눈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그때 윤기철의 목소리가 창고 벽에 부딪혀 울렸다.
“받고 보고를 하든지 말든지 해. 그리고 안 받는다면 이렇게 딱딱한 관계로 지낼 수는 없다고 보고하겠어.”
이 대사는 미리 연구해놓은 터라 술술 나왔다. 못 하겠다고 하면 북측에서는 정순미를 설득해서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정순미 또한 판을 깨뜨리지 않으려면 받고 보고를 하든지 말든지 할 터였다. 과연 정순미가 종이봉투를 받았는데 시선이 올라오지 않았다. 봉투를 건네준 윤기철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나서 말했다.
“화장품 가게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처음 여자 화장품 샀다고.”
거짓말이다. 조하나를 따라가서 한 시간 동안이나 화장품 가게 안에 서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돈도 윤기철이 냈다.
“정순미 씨한테 맞는 화장품을 고르면서 행복했어. 고르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어.”
윤기철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피부가 근질거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화장품은 홍대 앞 가게에서 5분 만에 샀다. 중국 관광객 전문 가게에서 미리 포장된 세트를 고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때 시선을 든 정순미가 윤기철을 보았다. 아직도 얼굴이 빨갛다.
“고맙습니다.”
목소리의 끝부분이 떨렸다.
용성은 중국 칭다오(靑島)에도 현지법인 공장이 있다. 인원은 1500명 정도, 지금은 섬유산업이 중국에서도 밀리는 상황이지만 생산량 및 품질 수준에서 1등급 평가를 받는다. 개성공단의 용성 수준은 2등급인데 생산량이 칭다오의 75% 수준이다. 품질은 85%.
그런데 용성 내부, 즉 한국 측에서 분석한 결과는 개성 용성의 가능성이 칭다오를 압도한다. 만일 지금이라도 개성 용성을 칭다오 공장처럼 경쟁체제로 전환한다면 2개월 내에 칭다오의 125%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1인당 생산 평가를 말한다. 개성 용성의 임금이 칭다오 용성의 28% 수준인 터라 임금 대비 생산량 비교는 칭다오의 2배 이상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이러니 개성공단의 한국 기업들이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음 날 오전, 근로자 대표 조경필과 총화를 마친 김양규가 사무실로 들어와 말했다.
“큰일 났는데, 이거 언페이드(unpaid) 당하겠다.”
사무실 안에는 윤기철과 과장 셋, 보조사원까지 대여섯 명이 있었지만 김양규는 개의치 않았다.
“야근 못 하면 이건 몇 십만 달러 깨지는 거야. 이거, 망했어.”
법인장쯤 되면 본사 공장장급으로 이런 소리를 부하직원 앞에서 투덜거리면 안 된다. 체면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꾹 참고 해결책을 찾는 자세를 보이다가 망하는 것이 옳다. 윤기철은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김양규는 대놓고 하소연을 한다. 체면이고 지랄이고 없는 것이다. 윤기철은 심호흡을 했다. 선적은 업무과 소관이다. 생산과장 고형민이 죽을 쑤고 있지만 마무리는 업무과가 한다. 그때 김양규가 사무실 바닥이 내려앉을 만큼 한숨을 뱉었으므로 윤기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막은 이렇다. 프랑스로 수출할 제품 750박스가 원자재 공급에서 사고가 일어나 선적 스케줄에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제품은 시즌용품이어서 납기를 맞추지 못하면 당장 지급 정지를 받게 되어있다. 45만 달러 물량이니 5억 가까이 깨진다. 방법은 있다. 공장에서 3교대로 철야 작업을 하는 것, 15일간만 철야를 하면 예정된 배에 선적이 가능하다. 비행기로 실어 나를 방법이 있지만 항공요금을 내면 배보다 배꼽이 커진다. 그런데 김양규는 조경필과의 총화에서 철야작업을 거부당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야근, 특근을 밥 먹듯이 해온 용성 관리자 책임이다. 지금도 오후 10시까지 야근을 하는 터라 3교대 철야는 체력적 한계 때문에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제가 해볼까요?”
저녁을 먹으려고 숙소로 돌아온 김양규의 방으로 찾아간 윤기철이 불쑥 물었다. 저고리를 벗던 김양규가 충혈된 눈으로 윤기철을 보았다. 놀란 표정이다. 순간 윤기철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김양규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법인장 체면 따위를 내세울 환경이 아니다. 중국도, 베트남, 미얀마, 인도도 아니다. 전혀 다른 세상이다.
“자네가?”
갈라진 목소리로 김양규가 겨우 묻자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시발, 제가 누굽니까? 총국 국장하고 밥 먹은 놈 아닙니까?”
“…”
“안 된다면 총국에라도 가보지요.”
“그렇게 해준다면.”
김양규가 간절한 표정으로 윤기철을 보았다. 입안의 침까지 삼킨 김양규가 말을 이었다.
“백골난망이지, 자네한테.”
“안됩니다.”
윤기철의 말을 들은 조경필이 머리부터 내저으며 말했다. 어느덧 굳어진 표정이다.
“우리 근로자를 짐승처럼 혹사할 수는 없습니다. 안 되겠습니다.”
“한국에서도 3교대 철야를 합니다. 대표께서는 과장이 심하십니다.”
불쑥 윤기철이 말하자 조경필이 눈을 치켜떴다. 오후 9시, 현장 옆쪽의 총화실에는 둘뿐이다. 현장에서 울리는 재봉틀 소리가 희미하게 울린다.
“과장이 심하다고 하셨소?”
조경필이 되물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두 눈이 번들거린다.
“나한테는 과장이죠. 한국 본공장은 물론이고, 중국 베트남 공장도 3교대를 밥 먹듯이 합니다.”
작심한 터라 윤기철이 쏟아내듯 말을 이었다.
“물론 철야수당, 시간외수당을 지급하지요. 다른 점은 그것뿐입니다.”
어깨를 편 윤기철이 똑바로 조경필을 보았다. 자, 이것이 내 카드다.
“지난번 오영환 국장께서 저한테 말씀하시더군요.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라도 말하라고. 그리고 평양에서 오신 분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다음 날부터 3교대 철야 작업이 시행됐는데 그 사연은 김양규와 윤기철, 조경필 셋만 알기로 했다. 김양규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조경필이 마침내 고독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한 것이다. 철야를 시작하고 이틀째 되는 날 밤, 수출품 창고로 들어서던 윤기철이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정순미가 따라오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는다. 머리를 돌린 윤기철이 창고 안으로 들어섰고 정순미가 따라 들어왔다. 정순미도 창고 열쇠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윤기철이 머리만 돌려 정순미에게 물었다.
“박스 체크하려고?”
“아뇨?”
“그럼 왜?”
“과장님께 드릴 게 있어서요.”
걸음을 멈춘 윤기철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창고 안 중간 부분에 뚫린 폭 2m 정도의 통로 중간에 둘이 마주 보고 선 모양이 되었다. 양쪽은 선적용 박스가 5, 6m 높이로 쌓여있고 뒤쪽 출입구는 보이지 않는다. 밀실에 둘이 서 있는 셈이다.
“뭔데?”
윤기철이 묻자 정순미가 몸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잠깐만요.”
정순미가 사라졌을 때 윤기철이 호흡을 가누었다. 전성일이 한국 측에 보낼 물건이 있는 모양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락원 노릇을 하게 되었는가? 그때 정순미가 모퉁이를 돌아 다가왔는데 손에 종이봉투를 쥐었다. 지난번에 정순미에게 준 화장품을 담은 봉투다.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수수한 색깔로 고른 봉투, 다가선 정순미가 윤기철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세요.”
정순미의 목소리는 맑고 떨림이 조금 있다. 그래서 긴장하면 떨림이 강해진다.
“이게 뭔데?”
받으면서 윤기철이 물었다. 정순미가 몸을 비틀면서 수줍게 웃기만 했으므로 윤기철은 봉투 안에서 종이에 싼 내용물을 꺼내었다. 종이를 벗기자 가죽지갑이 나왔다. 그런데 검정색 가죽 지갑은 한 땀 한 땀 손으로 꿰맨 흔적이 있다. 수제(手製)다. 카드꽂이도 있고 면허증 넣는 곳도 있다. 머리를 든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이거, 직접 만들었어?”
“네.”
정순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몸을 반쯤 돌린 정순미가 말을 이었다.
“일주일 걸렸어요.”
“날, 날 주려고?”
“그건 아니고요.”
이제는 정순미의 다리가 조금 꼬였다. 붉어진 정순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있다.
“그냥 만들다가….”
“나한테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지?”
“아이, 참.”
“고마워, 죽을 때까지 쓸게.”
“아이, 참.”
정순미의 다리가 더 비틀어졌다. 그래서 더 위험해지기 전에 윤기철이 서두르듯 물었다.
“그, 화장품 괜찮아?”
여러번 묻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다. 그때 정순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정말 좋아요. 아껴 쓰고 있어요.”
사람은 행복해질 때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 상태가 깨지기 전에 얼른 보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바로 지금의 윤기철이 그렇다. 안으로 더 들어가 박스를 체크해야 되었지만 몸을 돌린 윤기철이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러고는 앞쪽에다 대고 다시 말했다.
“고마워, 내가 받은 선물 중 최고야.”
더 좋은 치사가 있겠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2시가 되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선 정순미가 윤기철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섰다. 잠깐 시선을 마주쳤지만 정순미는 곧 외면했다. 벌써 두 볼이 달아올랐다. 사무실 안에는 둘뿐이다. 정순미가 둘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서울로 가져가실 물건이 있어요. 지금 제가 받아놓았는데 내일 가져가시래요.”
정순미가 맑고 울림이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집안일로 휴가 신청하고 가시는 게 낫겠다고 하시네요. 오늘 신청하시면 총국에서 내일 나가시게 해드리겠답니다.”
그제야 윤기철은 정순미의 시선을 잡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마주쳤던 시선이 떨어졌지만 윤기철은 만족했다. ‘연락원’끼리의 교감이 충분히 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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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꿍꿍이 속셈이 뭐야?”
“제가 월북하기를 바랄까요?”
“나한테 그걸 물으면 어떻게….”
말을 그친 김양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 정말 그럴 생각이 있나?”
“있으면 그걸 말하겠습니까?”
말문이 막힌 김양규가 심호흡을 하고나서 잇사이로 말했다.
“하긴 나쁜 일은 아냐. 총국 국장이 우리 직원을 격려했다는 게 말야.”
잘못을 합리화하면 쓸모없는 직장인이 되지만 이런 반응은 건설적이다. 윤기철은 김양규의 장점 하나를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숙소에서 같은 내용을 들은 과장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건 조경필이의 파워를 강조해주는 거야.”
시설과장 오석준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 시발놈은 내일부터 더 어깨를 펴고 다닐 거라고, 틀림없어.”
“내 생각도 그래.”
일단 동조한 자재과장 장원석이 말을 이었다.
“시발놈들이 쇼를 하는구먼. 앞으로 잘하면 용성의 윤기철이처럼 총국 국장이 불러서 한턱 낸다는 걸 세계만방에 알린 거야.”
“그럼 앞으로 근로자 몇백 명쯤 증원시켜주겠군.”
생산과장 고형민이 끼어들었지만 모두 입을 다물어버리는 바람에 머쓱해졌다. 그때 잠자코 있던 기계과장 백종호가 물었다.
“정순미는 데려다주고 그냥 갔다고?”
“예.”
백종호는 머리만 끄덕였는데 장원석이 불쑥 말했다.
“이제 그년도 고분고분해지겠군 그래. 조경필이한테 즉각 보고도 안 할까?”
그 순간 윤기철은 숨을 들이켰다. 그 생각은 안 해보았기 때문이다. 과연 정순미는 앞으로 어떻게 나올 것인가?
“식사 잘 하셨습니까?”
아침에 만난 조경필이 그렇게 물었는데 아침밥 잘 먹었느냐고 묻는 것 같다. 조경필의 은근한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으므로 윤기철이 대답했다.
“대표님 덕분에 저녁 잘 먹었습니다.”
“아이고, 그게 제 덕분이 아닙니다.”
펄쩍 뛰는 시늉을 한 조경필이 다가와 섰다. 둘은 이제 아이롱반 검사 때 옆에 마주 보고 서 있다. 주위의 시선이 모아졌지만 떨어진 곳이어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모두 윤 과장님 평가가 좋았기 때문이지요.”
“글쎄, 그 평가를 대표님이 해주신 것 아닙니까?”
“제 역할은 아주 적습니다.”
정색한 조경필이 바짝 다가섰다.
“앞으로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정순미한테 언제라도 말씀해주시지요.”
그러더니 조경필이 발을 떼어 옆쪽으로 멀어졌다. 사무실로 들어왔더니 자리에 앉아 있던 김양규가 눈을 조금 크게 떠보였다. 조경필과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사무실에서는 대형 유리창을 통해 생산 현장이 다 보이기 때문이다. 다가간 윤기철이 한마디만 하고 지나갔다.
“어젯밤.”
당신이 들은 이야기하고 똑같다는 표시였는데 알아들었는지 김양규는 가만히 있었다.
‘달라졌다.’ 정순미의 시선이 떼어졌을 때 윤기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우선 표정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같은 얼굴이었어도 그렇다. 정순미의 등에 시선을 준 채 윤기철이 호흡을 가누었다. 선입관도 작용했겠지만 분명히 다르다.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상대방과 시선이 일직선이 되면 그것을 시선이 마주쳤다고들 한다. 그동안 정순미와 수백 번 시선이 마주쳤지만 이렇게 깊숙한 느낌은 처음 받는다. 자신의 시선이 정순미의 눈 속으로 한참 더 들어가는 느낌. 그것은 정순미가 이쪽 시선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그때였다. 정순미가 머리를 돌려 윤기철을 보았다. 다시 시선이 일직선이 되었고 이번에는 더 깊게 들어갔다. 윤기철은 정순미의 눈 주위가 붉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럼 일주일 후에 출항하는 선박을 알아보겠습니다.”
정순미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까지는 생산이 끝날 수 있습니다.”
사무실 안에는 생산과 여직원 하나만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을 뿐이다. 윤기철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오전 10시반이 되어가고 있다. 어젯밤의 모임에서는 정순미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지만 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당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서로 어긋나다가 지금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것이다. 다시 머리를 돌린 정순미를 향해 윤기철이 낮게 물었다.
“잘 들어갔어?”
그때 뒷모습만 보인 정순미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거리가 2m도 안되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네.”
앞쪽에다 대고 대답한 정순미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옆쪽 문으로 나갔다. 그동안 얼굴을 이쪽에 보이지 않았다.
본사에서 연락이 온 것은 오후 3시가 되어갈 무렵이다. 연락은 법인장 김양규가 받았는데 자재과장 장원석과 윤기철이 의료보험료 갱신을 위해 귀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놈의 의료보험.”
김양규한테서 통보를 받은 장원석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 투덜거렸다.
“왜 처음에 잘 해놓지 지금 와서 줄여주느니 어쩌느니 귀찮게 하는 거야?”
윤기철의 시선이 옆쪽 정순미에게로 옮겨졌다. 정순미는 책상에서 뭔가를 적고 있었지만 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사에서 귀사 통보를 했다고 바로 개성을 떠날 수는 없다. 총국에 신청해서 허가를 맡고 나가려면 최소한 이틀이 걸린다. 윤기철이 자리로 돌아가면서 장원석을 달래듯이 말했다.
“몇 만 원이라도 돈 굳히는 것 아닙니까? 겸사겸사 며칠 놀고요.”
그 순간 장원석은 간호사인 부인과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차라리 부인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지금은 나을지도 모른다.
“저 좀 보세요.”
하면서 정순미가 다가섰을 때는 다음 날 오후 7시 40분, 오늘은 야근이어서 저녁을 먹고 난 근로자들이 다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윤기철은 창고에 쌓인 완제품 박스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마침 창고 안에는 둘뿐이다. 정순미가 혼자 있을 때를 기다렸다가 온 것 같다. 몸을 돌린 윤기철 앞으로 정순미가 다가와 섰다. 창고 안은 썰렁하다. 너무 컸기 때문에 목소리도 울린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두 발짝쯤 앞에 선 정순미가 똑바로 윤기철을 보았다. 창고 천장에는 형광등이 세로로 길게 붙어 있어 밝다. 정순미가 말을 이었다.
“국장님이 잘 다녀오시라고 했어요.”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북측의 반응도 예상했지만 김양규의 귀사 통보를 받은 순간부터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측도 정보를 얻겠지만 한국 기관도 어디 귀 막고 눈 가리고 있는 집단인가? 자신이 지도총국 국장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의료보험 갱신 건은 기관에서 만든 핑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장원석은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장식용이다. 윤기철이 웃음 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맙다고 전해드려.”
“그리고.”
정순미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더니 반 걸음쯤 다가섰다.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아신다고….”
“알고 있어.”
전성일의 저녁 초대 이후로 어제 아침부터 윤기철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썼고 정순미도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것은 비밀을 공유한다는 유대감 때문일 것이다. 박스에 몸을 기대고 선 윤기철이 정순미를 지그시 보았다.
“그러고 보면 정순미 씨하고 내가 지금 가장 길게 이야기한 셈인데.”
정순미가 윤기철의 시선을 깊게 받았다가 머리를 숙였다. 윤기철이 호흡을 고르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난 정순미 씨한테 선입관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정순미 씨도 그렇게 대해줘.”
“알겠습니다.”
“어쨌든 이 일도 같이 하게 되었으니까 말야.”
그때 정순미가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몸을 돌렸다. 윤기철이 날씬한 정순미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아직도 뭔가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것은 금방 될 일이 아니다.
본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 반이었는데 2시 반에 윤기철은 전화를 받았다. 거래처 최 사장이라는 사람이다. 응답했더니 사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예, 놀라실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국정원 직원입니다.”
“아, 예, 그러세요?”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윤기철도 부드럽게 대답하자 사내가 물었다.
“저기, 오늘 오후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간과 장소를 정해주셔도 됩니다.”
“아니, 그쪽에서 정해주시죠. 6시 이후에 시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6시 반에 회사 근처에서 뵙기로 하죠.”
사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렸다.
오후 6시 반, 양재동의 일식집 ‘화원’의 방 안에서 윤기철은 두 사내와 인사를 나누었다. 하나는 전화를 했던 ‘최 사장’이었는데 명함을 보니 이인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박도영, 명함에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만 적혀있다. 방 안에는 이미 회와 술병까지 놓여 있어 종업원이 들락거릴 필요도 없다. 준비를 다 해놓고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사를 마쳤을 때 이인수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왜 뵙자고 했는지 아시지요?”
“예? 예, 대충은.”
쓴웃음을 지은 윤기철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연락이 오지 않았으면 더 불안했을 겁니다. 그게 보통 한국인의 반응 아닙니까?”
“그렇죠.”
잠자코 있던 박도영이 말했다. 40대 중반의 박도영은 둥근 얼굴에 호인 인상이다. 박도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소주병을 쥔 박도영이 윤기철의 잔에 술을 채웠다.
“북측에서도 윤 과장님이 우리하고 만나는 것을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의료보험 때문에 귀사 통보를 받은 다음 날 조심하라고 전해왔더군요.”
“누구를 만나셨지요?”
박도영이 묻자 윤기철이 정색했다.
“총국 국장 오영환하고 평양에서 왔다는 전성일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박도영이 묻지도 않았지만 윤기철은 전성일의 인상착의를 길게 묘사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제 부친의 직업에다가 제가 개성 발령을 받았을 때 뭐라고 하시더냐는 것까지 묻더군요. 그래서 대충 이야기해줬습니다.”
“…”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기에 한국으로 쏠 것이 아니라면 실감이 안 나고 관심이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
“솔직히 제 생각은 그 시발놈들이 핵 가지고 공갈치는 것이 짜증나고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대놓고 어떻게 그렇게 말합니까? 영화에서나 그렇게 떠들어대겠죠. 나중에 총 맞고요.”
둘은 웃음 띤 얼굴로 시선만 주었으므로 윤기철의 목소리가 열기를 띠었다.
“그들은 자기들하고 저녁 먹었다는 것이 남조선 정보기관에 알려질 것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리고 곧 제가 불려가서 무슨 이야기했느냐고 질문을 받을 것이라는 것까지 말해주었습니다.”
“…”
“평양에서 온 전성일이는 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코치하더군요. 저녁 산 것은 총국 국장이 일 잘하라고 초대한 것으로 하라고요.”
“…”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수시로 말하라는 겁니다. 제 보조 여사원을 통해서요.”
“정순미지요?”
불쑥 박도영이 물었으므로 윤기철은 심호흡을 했다. 이번은 기분이 꺼림칙했다. 정순미가 더럽혀진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놈이 북측 연락원인 셈이군요.”
숨만 들이켠 윤기철에게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윤 과장님은 남측 연락원이 된 것이고요. 다시 말하면.”
상반신을 편 박도영이 이제는 정색하고 윤기철을 보았다.
“윤 과장님은 남북한 대화 창구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렇죠. 이 경우는 북측이 주선해서 만들어졌다고 봐야겠군요.”
박도영이 건배하자는 듯이 술잔을 들었으므로 윤기철은 서둘러 술잔을 쥐었다.
“자식아, 이 시간에 연락하면 어떡해?”
털석 앞쪽에 앉은 임승근은 한잔 마신 모습이다. 눈자위가 충혈됐고 자세가 흐트러졌다.
“안녕하세요?”
옆쪽에 앉으면서 여자가 인사를 했는데 파마한 머리가 물결처럼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맑은 얼굴, 날씬한 몸매, 선수인 임승근이 최근에 낚은 대어 같다.
“어, 인사해라. 신이영 씨. 골드미스다.”
임승근이 소개했을 때 여자가 풀썩 웃었다.
“거짓말 마. 나 이혼녀올시다.”
윤기철이 반쯤 입을 벌리고는 신이영의 얼굴을 보았다.
“얀마, 뭐해?”
하고 임승근이 불렀을 때 겨우 입을 다문 윤기철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개성에서 온 윤기철이올시다.”
“흐흐흐.”
술을 따르며 임승근이 웃었다.
“몇 달 굶은놈 상통이구먼.”
밤 10시 반이다. 국정원 직원들과 헤어진 윤기철이 다른 데서 술을 마시고 있던 임승근을 불러낸 것이다. 이곳은 비싼 값을 하느라고 분위기가 좋은 카페다. 건물 고층에 위치해서 강남의 야경이 내려다보인다. 전에 조하나하고 와본 곳이다.
“갑자기 왜 온 거냐?”
위스키 잔을 든 임승근이 묻자 윤기철은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아,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응?”
“내가 연락책임을 맡아서.”
“지랄하고.”
입맛을 다신 임승근이 한 모금 술을 마시더니 옆에 앉은 신이영을 보았다.
“이놈 괜찮어, 진국이야.”
“개성공단에 계시다면서요?”
신이영이 묻자 윤기철은 심호흡을 했다.
“예, 개성공단이야말로 남북 간 소통과 화해의 연결 고리입니다. 내가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지요.”
“이놈이 진짜 미쳤구먼.”
임승근이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신이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러자 눈가의 잔주름이 드러났다. 신이영 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인 윤기철이 열띤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살면서 지금처럼 내 존재 가치를 소중하게 느낀 적이 없습니다.”
이제 임승근은 입을 다문 채 눈만 끔벅였지만 신이영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신선해요. 북한 남자 같아.”
북한 남자가 신선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또 신선해서 이렇게 되지도 않았다. 오전 1시 반, 신이영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던 윤기철의 머릿속을 잠깐 동안 스치고 간 생각이다.
“아유, 죽는 줄 알았어.”
거친 숨을 뱉으면서 신이영이 말했는데 립서비스 같지는 않다. 알몸의 사지를 쩍 벌린 채 누운 신이영이 말을 이었다.
“자기, 너무 잘해.”
우연히 분위기가 맞았기 때문이다. 분위기라기보다 타이밍이다. 필요한 때 옆에 있었다. 세상 인연이 이렇게 만들어진다. 침대에서 나온 윤기철이 씻고 나왔더니 신이영은 이미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우는 중이었다. 어느새 옷을 차려입은 것이다. 눈을 크게 뜬 윤기철을 향해 신이영이 벙긋 웃었다.
“자기야, 나 가봐야 돼.”
잠자코 팬티를 찾아 입은 윤기철의 앞으로 다가선 신이영이 두 손으로 허리를 감아 안았다.
“집에 아이가 있어.”
“…”
“아들인데 다섯 살이야. 내가 키우고 있어.”
“…”
“친정엄마가 봐주시지만 내가 있어야지, 안 그래?”
“그럼.”
윤기철은 아직 신이영의 직업도 모른다. 나이는 말할 것도 없다. 임승근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기철이 신이영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내가 남북 경협자금이 좀 있는데, 좀 줘도 돼?”
그 순간 눈을 치켜떴던 신이영이 곧 소리 내어 웃었다.
“줘.”
“3억 달러쯤 있는데, 괜찮아?”
“인민들 반 년분 식량은 살 수 있을 거야.”
몸을 뗀 윤기철이 바지 주머니에 넣은 지갑에서 30만 원을 꺼내 내밀었다. 10만 원권 수표 석 장을 받은 신이영이 윤기철의 입술에 입을 맞추더니 말했다.
“고마워, 잘 쓸게.”
신이영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있다.
“거기, 잘되고 있는 거냐?”
윤덕수가 물었으므로 콩나물국을 깔짝거리던 윤기철이 머리를 들었다. 오전 6시 40분, 2시 반에 집에 돌아와서 네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윤덕수가 밥 같이 먹자고 깨웠기 때문이다. 보통 6시에 일을 나가는 윤덕수는 윤기철하고 밥을 같이 먹겠다면서 한 시간쯤 기다린 셈이다. 윤덕수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심호흡부터 했다. 질문의 의도가 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개성공단에 부정적이었다. 괜히 친북 정권이 북한에 돈을 퍼주려고 만든 장치라는 것이다.
“잘돼요. 아버지.”
일단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냥 물러날 윤덕수가 아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월남 파병에 지원한 것처럼 개성에 가라고 하더니 시간이 지나자 아들을 빼앗긴 느낌이 든 것 같다. 윤덕수가 상반신을 폈다.
“뭐가 잘돼?”
“생산이, 그리고 남북 간 협조가요.”
“무슨 협조?”
“서로 조금씩 이해를 해갑니다. 분단된 지 68년 아닙니까? 서로 다른 세상에 살아가 개성에서 함께 부대끼면서….”
“야.”
말을 자른 윤덕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윤기철을 보았다.
“너, 그런 말 누구한테 들었어?”
“듣다니요?”
“배웠냐?”
“누구한테요?”
“글쎄, 내가 물었잖아?”
“아버지도 참.”
입맛을 다신 윤기철이 의자에 등을 붙였을 때 방을 치우던 어머니가 나왔다. 가까운 주방에 있었다면 진즉 둘의 말을 끊었을 것이다.
“왜들 그래? 무슨 일 있어요?”
어머니가 둘에게 번갈아 물었을 때 윤덕수의 젓가락이 윤기철을 가리켰다.
“이자식이 좀 이상해졌어.”
“뭐가 말요?”
“글쎄, 좀 빨갱이 물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에이, 여보세요.”
“내가 괜히 개성에 가라고 했나?”
“도대체 이 양반이.”
하면서도 이정옥의 시선이 윤기철을 훑어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불안한 표정이다.
의료보험은 회사에서 서류를 재작성했는데 매달 3만 원 가까운 혜택을 보았다. 같이 온 장원석은 5만 원 정도 절약이 되었지만 시큰둥했다. 회사 안이어서 집안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도 아닌 터라 윤기철은 모른 척했다. 그런데 오전 11시경 윤기철은 임승근의 전화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늦게 불러낸 데다 신이영까지 소개받은 인사를 하려던 참이어서 윤기철은 사례부터 했다.
“형, 백골난망이야. 내가 다음에는 꼭 은혜 갚을 테니까….”
“얀마.”
말을 자른 임승근이 불쑥 물었다.
“너, 신이영이한테 돈 줬다면서?”
숨을 삼킨 윤기철의 귀에 임승근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30만 원 줬어?”
“…”
“남북 경협자금에서 떼어줬다면서?”
임승근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지만 윤기철의 이맛살은 찌푸려졌다. 그때 임승근이 말을 이었다.
“야, 걔 몇 백억대 재산가다. 빌딩이 두 채가 있고, 요리학원 원장이야.”
“….”
“내가 취재하다 알았지. 기사도 내주었고.”
“…”
“너한테서 받은 돈 액자에다 넣어서 사무실에 걸어놓는다고 하더라.”
“좆 까라고 해.”
“깔 게 있어야지, 인마.”
그러더니 임승근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6시 윤기철은 양재동의 한식당에서 박도영과 이인수를 만난다. 이번에도 둘은 한정식 요리를 다 시켜놓고 윤기철을 기다렸다. 윤기철은 내일 개성공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박도영이 본론을 꺼내었다.
“내일 가실 때 저 서류봉투를 가져가시지요.”
그때 이인수가 옆에 놓인 가방에서 노란 서류봉투를 꺼내더니 윤기철에게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서류가 10여 장 든 것처럼 가벼웠다.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개성에 가시면 그분이 부를 겁니다. 그때 그 서류를 주시면 됩니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박도영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무슨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소주잔을 쥔 박도영이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자세한 내막도 모르면서 양측 심부름만 하는 것이 불안하시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안전합니다.”
“…”
“차츰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어느덧 정색한 박도영이 어깨를 폈다가 숙이면서 말을 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침내 윤기철이 박도영의 말을 잘랐다. 이번에는 윤기철이 박도영을 똑바로 보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걸려들었다고 해도 내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의외로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박도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선택은 북측이 한 겁니다. 만일.”
잠깐 시선을 내렸던 박도영이 윤기철을 보았다.
“부담이 되신다면 이 일을 맡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도영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심호흡을 두 번 하는 동안 수많은 장면과 대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경필 대표와 오영환 국장, 전성일과 아버지 윤덕수의 얼굴과 이야기, 그리고 정순미의 모습까지. 몸이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발을 잘못 디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손은 밧줄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그렇다. 양쪽 끝은 북측과 남측이 쥐었구나. 이윽고 어깨를 부풀린 윤기철이 말했다.
“아니, 합니다. 한번 물어본 겁니다.”
“시발, 집에 안 들어갔어.”
자유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장원석이 말했다. 장원석이 운전하는 승용차는 시속 130㎞로 달리고 있다.
“그 여자는 내가 서울에 온 줄도 몰라.”
평일 오전 10시 반이어서 자유로는 잘 뚫렸다. 오늘은 1차선을 차지하고 버벅거리는 초짜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사흘 밤은 어디서 보낸 겁니까?”
예의상 물었더니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홍대 앞 모텔.”
“…”
“하룻밤은 여자 꼬여서 잤고 이틀 밤은 술 마시고 뻗었어.”
“…”
“개성에 있을 때는 잊어버릴 수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안 되더라. 통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더 불편했어.”
“…”
“아무래도 이혼해야 할 것 같다.”
차의 속력을 늦춘 장원석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잘 왔다 간 거야. 사람은 최악의 환경까지 닿아봐야 결정이 돼. 어중간한 상황에서는 주춤거리게 된다니까.”
장원석의 이번 서울 출장은 최악의 환경이었던 셈이다. 하긴 통화가 가능한 지역, 마음대로 갈 수 있었던 상황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사흘 밤을 보낸 것이다. 술 마시고 오입도 했지만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사흘 밤을 보내고 결정을 했다.
김양규와 한국 측 과장들은 잘 다녀왔느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선을 딴 데로 옮겼지만 북측 근로자 대표 조경필의 인사는 은근했다.
“별일 없으시지요?”
현장 재봉대 옆에서 바짝 다가선 조경필이 그렇게 묻더니 눈웃음까지 쳤다.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조경필은 이런 식의 허튼소리는 안 하는 인간이다. 더구나 수백 명 근로자의 주시하에서 남조선 관리자한테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드물다.
“예, 덕분에….”
조금 당황한 윤기철이 멋쩍게 웃어보이고 지나쳤다. 그리고 세 발짝도 떼기 전에 조경필의 오버액션이 시사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윤기철이 ‘우리 편’이라는 것을 전 종업원에게 공개한 것이다. 윤기철에게는 그것이 압박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오후 8시 반, 오늘도 야근이어서 윤기철은 선적 박스를 체크하려고 수출품 창고로 들어섰다.
수출품 창고는 담당 직원 외에는 출입금지다. 업무과 보조사원 정순미도 상황판을 들고 따라왔는데 자연스러운 동행이다. 격납고 같은 창고의 쪽문으로 들어선 윤기철이 전등 스위치를 켜자 산더미처럼 쌓인 수출품 박스가 드러났다. 그런데 사람은 둘뿐이어서 숨소리도 들린다. 윤기철이 구석 쪽 박스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더니 옆에 놓인 서류봉투를 집어 정순미에게 내밀었다. 미리 창고 안에 갖다놓았던 것이다.
“이거, 서울에서 가져온 건데. 그날 만난 전성일 선생한테 드리라고 했어.”
윤기철이 말하자 정순미가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있다.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