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호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한반도 분단 원인과 관련해 제3의 시각을 제기하는 논고(論告)를 보내왔다. 기존의 소련 혹은 미국 책임론과 달리 일본에 주된 책임이 있다는 게 요지.
- 최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태평양전쟁 말기 전쟁에 패하더라도 천황을 보호하고 한반도를 계속 지배하겠다는 망상을 품었다.
- 그래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미국 대신 중립 관계인 소련을 활용하려 했다.
- 그 바람에 일본의 항복이 늦어졌고 소련군의 기만적인 참전(參戰)으로 분단이 일어났다는 주장이다.<편집자>
분단의 결정적 원인은 소련이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 대일전쟁 참전권을 확보한 데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은 막대한 인명과 자원을 희생해 거의 단독으로 태평양전쟁 승리를 성취했다. 일본과 소련은 사실 중립조약의 동반자였다. 최후의 순간에서 불과 1주일 전 소련은 북한 지역에 군사를 진입시켰다. 만약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이 끝났으면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입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랬더라면 한반도의 분단 또한 있을 수 없었다.
1945년 봄 전세는 일본에 극히 불리했다. 5월 초 독일이 항복했으며, 6월 오키나와가 함락됐다. 일본은 전쟁을 더는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인했다. 1945년 6월 일본은 패배를 인정하고 전쟁 종결의 길을 모색한다. 이때 일본이 미국과 접촉해 강화의 길을 찾았으면 소련의 참전 없이 전쟁은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은 미국을 기피하고 소련에 접근해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강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다. 일본의 이러한 선택은 스탈린에게는 황금의 기회였다.
日蘇중립조약의 운명
태평양전쟁 중 일본과 소련은 상호 중립조약을 맺고 있었다. 이 조약은 1941년 4월 비준됐는데, 중요한 내용은 세 가지다. △평화와 우호관계를 유지해 상대방 영토의 보전(保全)과 불가침(不可侵)을 존중한다 △제3국과 군사행동이 일어날 때 분쟁기간 중 중립을 지킨다 △조약의 기한은 5년이고, 만기 1년 전 폐기 통고를 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5년간 연장한다.
소련과 일본이 맺은 이 조약이 알려지자 세계 열강은 경악했다. 조약 체결 이전까지 소련, 일본은 서로 적성국이었다. 러일전쟁(1904~1905), 시베리아 출병(1918~1922), 장고봉 전투(1938), 노몽항 전투(1939) 등 군사적 충돌과 갈등으로 점철돼 있었다.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1937년 방공협정(防共協定), 1940년 삼국군사동맹(三國軍事同盟)을 체결했다. 독일, 이탈리아는 소련을 적성국으로 봤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은 중국에 무기를 제공하는 등 중국의 대일 항쟁을 직접 지원한 유일의 강대국이었다. 이렇듯 이해관계가 충돌하던 일본과 소련이 중립조약을 맺었으니 세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중립조약을 맺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본은 장고봉, 노몽항 전투에서 패배한 후 소련의 군사력을 재평가했다. 또한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유럽전쟁이 시작돼 세계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독일이 프랑스,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영국 본토를 위협했다. 그 결과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 지역이 주인을 잃고 힘의 공백지가 됐다.
일본은 중요한 선택에 직면했다. 이른바 ‘북진(北進)’ 혹은 ‘남진(南進)’ 중 택일하는 게 그것이다. 북진론은 소련과 대결해 만주, 몽고, 시베리아의 극동지역을 차지하자는 것이었으며, 남진론은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에 진출하자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앞으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면 동남아시아의 자원, 특히 석유가 필요하다고 봤다. 게다가 동남아시아는 주인 없는 공백지가 돼가고 있었다. 더구나 유럽전쟁 초기 대승리에 기고만장한 히틀러는 영국 세력을 약화하는 계략으로 소련에는 이란과 인도 방면, 일본에는 동남아와 버마(현 미얀마) 지역으로 진출하라고 권장했다. 이른바 립벤트롭(Ribbentrop) 복안이 그것이다.[‘대동아전쟁전사(大東亞戰爭全史)’ 56p]
일본은 결국 남진론을 택했다. 1940년 7월 27일 대본영은 어전회의에서 ‘시국처리요강(時局處理要綱)’을 채택하면서 “독일, 이탈리아와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고 대소국교(對蘇國交)의 비약적 조정(飛躍的調整)을 기도한다”고 결정했다.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우호적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동시에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공작과 조치를 취할 것을 결정했으며, 홍콩과 버마에서 영국 세력을 배제하기로 했다. 덧붙여 “남방 문제 해결을 위해 무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결정했다.[대본영기밀일지(大本營機密日誌) 38~40p]
이렇듯 ‘남진’ 정책을 결정한 일본은 궁극에 진주만 공격에 나서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다.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면서 가장 유의한 것이 소련의 태도였다. 일본은 소련의 행동이 전쟁 수행에 치명적 영향을 줄 것으로 봤으며, 소련과의 전쟁은 절대 회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소련과의 중립조약은 이 정책의 시발점이었다.
한편 소련은 히틀러의 독일로부터 항상 위협을 느꼈다. 1939년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일이 언제 공격해올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스탈린은 극동에서 일본의 위협을 제거해 양면 공격을 피하는 게 필요하다고 봤다. 일본이 이러한 시점에서 중립조약을 제의했으니 스탈린은 그것을 대환영했다.[보리스 스라빈스키, ‘일소중립조약(The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蔣介石)가 회담해 전쟁 후 동아시아의 새 질서를 논의했다. 세 정상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싸울 것을 약속했다. 또한 전후 일본 영토는 원래의 일본 열도에 한정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은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 독립시키기로 약속했다.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장래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연합국의 공식 합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대일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면담에 참석한 해리먼은 회고록(‘Special Envoy to Churchill and Stalin’)에서 스탈린은 유럽전쟁에 전력을 기울이느라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지 못해 유감이라고 밝히면서 독일을 패배하게 한 후 시베리아의 군사력을 세 배로 증강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1943년 11월 스탈린은 이렇듯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무시하고 일본과 전쟁을 하기로 미국에 약속했다.
소련의 참전 약속
1945년 2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얄타에서 제2차 거두회담을 가졌다. 독일의 패배가 눈앞에 보이던 터라 전후 유럽 문제가 주된 논의 대상이었다. 전후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합의를 내놓았는데, 우리는 이 합의에서 한반도 분단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다. 2월 11일 회담에서 세 정상은 ‘소련의 대일전쟁 참여에 관한 협정’에 합의했다.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한 후 2개월 혹은 3개월 이내에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첫째, 스탈린이 대일전쟁에 참전하겠다는 테헤란에서의 약속을 거듭 확인했으며 공식 조약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스탈린의 야망이다. 스탈린은 일본이 1904년 러시아를 상대로 ‘배신적 공격(treacherous attack)’에 나서 빼앗아간 러시아의 권리를 회복한다는 사실을 협정문에 명기하도록 했다. 스탈린은 러일전쟁의 패배를 역사적 치욕으로 봤으며 이를 설욕하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스탈린이 만주의 이익과 권리를 쟁취하려면 소련이 일본을 반드시 공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다면 얄타의 약속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한반도 분단의 씨앗이 있었다.
루스벨트는 왜 이처럼 양보했을까. 첫째 이유는,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있었다.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 등 일본의 특수한 저항을 살펴볼 때 미국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둘째는, 전후 세계 신(新)질서의 구상이다. 루스벨트는 국제연합(UN)을 조직해 5대 강국 주도로 세계평화를 유지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려면 소련의 협조가 필수라고 믿었다.
얄타에서는 한국을 신탁통치한다는 합의도 이뤄졌다. 2월 8일 루스벨트가 한국은 20~3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밝히자, 스탈린은 가능하면 짧은 기한이 좋다고 답하면서 신탁통치와 관련해 합의가 이뤄졌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얄타회담을 준비하며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전후 한국 문제(Post-War Status of Korea)’라는 제목이 붙은 문건이다. 이 문건에는 전쟁 직후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과 과도정부 수립 준비에 관한 복안이 들어 있다. 국무부는 군사적 점령에 참가할 수 있는 나라로 한국에 실제적 이익(real interest) 관계인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네 개의 강대국을 꼽았다. 다만 소련에 대해서는 “만약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을 경우(if it has entered the war in the Pacific)”라는 조건을 달았다. 다시 말해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할 것을 예기하고 있었지만, 참전하지 않을 경우 소련은 한반도 점령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소련의 중립조약 폐기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자 일본의 패전이 명확해졌다. 도조(東條) 내각이 무너지고 조선 총독이던 고이소(小磯國昭)가 총리가 됐다. 내각을 조직할 때 고이소는 패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내각서기관장 다나카(田中武雄)는 이렇게 증언했다. “조각 당시 고이소는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들다(至難)고 결론내리고 중국을 상대로 속히 화평공작을 진행하면서 소련 또는 기타 제3국을 통해 전전국화평(全戰局和平)의 길을 강구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일본 외무성 편, ‘종전사록 1’ 236~237p)
1945년 초 필리핀 함락을 눈앞에 두고 다급해진 천황(일왕의 일본식 표현, 필자 요청으로 이 글에서는 천황으로 표기했다.)은 중신(重臣, 주로 전 총리)들을 개인적으로 불러 당면한 사태에 관해 의견을 물었다. 고노에 전 총리는 2월 14일 직접 준비한 상주문을 천황 앞에서 읽고 전달했다. 그는 상주문 서두에 “패전은 유감스럽게도 필연적(必至)”이라면서 “하루속히 전쟁 종결의 방도를 강구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라고 말했다.
일본 최고위층에서는 이처럼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강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는 이를 적극 반대했고, 천황은 군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상황이었다.
1945년 4월 필리핀이 함락되고 오키나와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독일도 패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4월 5일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는 일본대사 사토(佐藤尙武)를 소환해 중립조약을 폐기한다고 공식 통고했다. 폐기 시효가 언제부터인지의 문제가 생겼다. 1941년 4월 25일 비준돼 5년간 유효한 중립조약에는 폐기 시 1년 전 통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사토는 이를 인용해 소련이 1945년 4월 폐기 통고를 했으니 조약은 1946년 4월까지 유효하지 않은가라고 지적했고, 몰로토프는 순간 주저하다가 사토의 지적에 동의해 중립조약은 이듬해까지 유효하다고 확인했다.(보리스 스라빈스키, ‘일소중립조약(The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150~162p)
중립조약 폐기는 일본에 치명적이었다. 일본은 소련과의 중립조약에 의존해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실질적으로는 이때 중립조약이 소련에 의해 폐기됐음에도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속이고 있었다. 중립조약이 1946년까지 유효하다는 몰로토프의 확인은 사기극이었다.
전 소련 육군참모총장 슈테멘코(S. M. Shtemenko)는 중립조약 폐기와 관련해 회고록(‘The Soviet General Staff at War, 1941-1945’ 408~409P)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소련이 중립조약을 계속 지킨다는 것은 어리석은(ridiculous) 짓이어서 폐기를 일본에 통보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폐기 통고는 일본에 심각한 경고를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일본은 전쟁에 광분(war hysteria)해 이를 무시했다. 동시에 스탈린은 대(對)독일 전쟁의 경험을 비축한 유능한 지휘관과 참모들을 극동 지역에 재배치하고 일본 공격 준비를 명령했다.”
일본은 이렇듯 소련의 기만에 말려들었다. 일본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관동군(關東軍)의 군력 상당 부분을 태평양 지역으로 돌려놓은 터라 소련과의 국경지대 군사력은 격감돼 있었다. 소련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일본의 이 대(大)실책이 궁극적으로 종전을 지연하고, 원자폭탄 공격과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것이다.
“소련에 중개의 노고를 맡기자”
1945년 4월 7일 고이소 내각이 무너지고 스즈키(鈴木貫太郞)가 새 총리에 취임했다. 많은 사람이 스즈키가 종전을 모색할 것으로 기대했다. 스즈키 자신도 전후의 구술에서 총리에 취임할 당시 “나는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의 멸망이 진실로 확실해진다”고 믿었다고 했다. 또한 “천황도 하루속히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고 회고했다.(‘종전사록 2’ 154~155p) 일본이 당장 직면한 위기는 소련의 참전이었다. 소련이 참전하면 일본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이 선택한 것은 소련과 협상해 공격을 방지하는 방안이었다.
최고전쟁지도회의(最高戰爭指導會議)는 5월 11~14일 ‘일소교섭요령(日蘇交涉要領)’을 채택했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 “제국의 죽음과 생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항이라고 규정하고, 그 대책으로 세 가지를 결정했다. 첫째, 소련의 참전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한다. 둘째, 소련을 ‘호의적 중립’으로 만든다. 셋째,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소련을 움직여 일본에 유리한 중개자가 되도록 유도한다. 일본은 소련과 교섭하기 위해 큰 양보를 각오했다. 그중에는 포츠머스 조약을 폐기하고 만주의 철도 이권과 뤼순(旅順)반도의 권리를 소련에 양도하겠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은 계속 지배하겠다고 명기한 점이다.[패전의 기록(敗戰の記錄) 278~279p]
6월 6일 최고전쟁지도회의는 당면한 시국의 모든 면을 토의한 후 ‘전쟁지도기본대강(戰爭指導基本大綱)’을 채택했다. 이 대강은 8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최종 재가를 받았다. 비록 정세가 절망적이었지만 “국체(國?)를 호지하고, 황토(皇土)를 보위하여, 정전(征戰)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는 결정이었다. 이른바 본토결전(本土決戰)이다. 일본 본토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육군 강경파의 주장에 스즈키 내각이 동조한 셈이다.[패전의 기록(敗戰の記錄) 256~276p]
사정이 이렇다보니 온건파가 초조해졌다. 천황의 최측근 인사인 기토(木戶幸一) 궁내대신(宮內大臣)이 움직였다. 기토는 ‘기본대강’을 본 그날 ‘시국수습대책시안(時局收拾對策試案)’을 작성해 천황에게 제시했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니 화평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군부가 화평을 제창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나, 이는 군의 반대로 불가능하니 천황이 직접 ‘어용단(御勇斷)’을 내어 전국을 수습해달라고 건의했다. 여기서 구상한 종전은 항복이 아니었다. 왕실을 보존하고 국체를 견지하는 이른바 ‘명예의 강화’였다. 기토는 “교섭상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 중립국인 소련에 중개의 노고를 맡기자”고 제의했다. 육군은 신중해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천황은 이를 뿌리치고 ‘명예의 강화’를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천황의 최종결정은 6월 8일 내려졌다.[기토일기 2(木戶幸一日記 2) 1208~1213p]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일본 최고 지도층이 시도한 강화는 항복이 아니라 국체를 보지하는 명예의 강화였다. 둘째, 일본은 강화를 위해 미국과의 직접 교섭을 거부하고 소련과 협상해 소련을 중재자 삼아 전쟁을 종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결정이 궁극으로 한반도를 분단하게 하는 운명을 가져온다. 만약 일본이 완전 패배를 인정한 이 시점에서 미국과 직접 교섭에 나섰더라면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는 없었을 것이고, 이로 인한 분단도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아직 참전하지 않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출할 명분이 전혀 없던 것이다.
한편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 전쟁을 시작해야만 했다.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해야만 얄타에서 약속받은 만주의 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련의 사정을 모르고 일본은 소련에 강화의 중재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당시의 모든 객관적인 여건을 고려할 때 결코 소련이 일본을 위해 중재자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은 이때 이성적(理性的) 판단력을 상실하고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일본이 추구한 이 외교를 호소야(細谷千博)는 ‘환상의 외교’라고 불렀다.[양대전간 일본외교(兩大戰間の日本外交) 303~336p]
對蘇 협상과 특사 파견
당시 일본 외교의 총책임자는 도고(東鄕茂德) 외무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간 도공의 후예로 그의 가문은 아버지 때까지 성이 박(朴)이었다. 도고는 당시 내각에서 가장 강력한 평화주창자였다. 소련과의 첫 접촉은 전 총리 히로타(廣田弘毅)와 일본주재 소련대사 말릭(Jakob Malik)의 회담이었다. 일본은 소련에 좀 더 적극적인 우방이 돼달라고 애걸하면서 만주를 중립화하고 소련이 석유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일본이 어업권(漁業權)을 포기할 것이며 소련이 원하는 다른 사항은 앞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소련은 이 제안을 무시했다.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말릭은 애초부터 회담을 회피하려 했지만, 구걸하는 히로타를 6월 4차례 만난 후 병을 핑계로 회담을 사절했다. 이 접촉은 67세의 노(老)정치인이 39세의 젊은 외교관에게 아양을 부리는 아첨의 회담이었다.
6월 13일 오키나와가 함락되고 7월에 들어서자 연합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중국의 행정원장(行政院長) 쑹쯔원(宋子文)이 모스크바에 가 소련 수뇌부와 7월 3일부터 회담을 하고 있었다. 7월 하순에는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포츠담에서 거두 회담을 개최한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히로타-말릭 회담에 아무런 진척이 없자, 곤경에 몰린 천황이 직접 나섰다. 7월 7일 특사를 모스크바에 보내 소련과 직접 교섭해 소련의 중재로 화평을 강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7월 10일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이안을 정식으로 채택하고 총리 직을 세 차례 맡았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특사로 임명했다. 저의는 스탈린이 포츠담에서 트루먼, 처칠을 만나기 전 고노에를 통해 강화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명예의 강화’는 천황을 보존하는 게 핵심이었다. 다시 말해 스탈린의 원조로 ‘천황’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소련은 특사를 수락한다는 것도, 거절한다는 것도 아닌 회답을 보냈다. 소련의 지상 목적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7월 26일 포츠담선언이 공포됐다. 항복하라는 연합국의 최후통첩이었다.
미국은 일본이 소련을 통해 강화를 시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초부터 일본의 모든 무전통신문을 도청해 암호를 해독했다. 미국은 이 정보망을 통해 일본의 종전 기도와 일본 내부의 갈등을 상세하게 파악했다. 육군의 강경파는 일본의 ‘국체’를 호지하기 위해 끝까지 싸워 이른바 옥쇄(玉碎)까지 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반면 주로 외무성과 해군을 중심으로 한 화평파는 일본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형편이니 이 상황에서 ‘명예로운 화평’을 모색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명예로운 화평’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국체’의 문제였다. ‘국체’는 일본인이 믿고 있는 일본의 독특하고 우월한 역사 문화 정신 종교 제도 등의 모든 전통이 집약된 개념이다. 이것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기관이 ‘천황’이라고 믿었다. 전쟁 막다른 골목에서도 끝까지 호지하겠다는 국체는 결국 천황을 지키겠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일본 내부의 의견 차이를 잘 아는 미국 내부에서도 일본을 항복시키는 방안을 두고 의견이 대립했다. 하나는 종래의 무조건 항복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 쉽게 항복하게끔 하자는 것이었다. 후자를 옹호한 이는 국무차관 그루(Joseph C. Grew)였다. 그는 5월 초 천황의 재위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하자고 제의했다. 일본 국민의 천황에 대한 감정을 고려할 때 이 조건을 내세우면 일본이 좀 더 빨리, 쉽게 항복할 것으로 내다봤다. 육군장관 스팀슨(Henry Stimson)과 해군장관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이 이 같은 제의에 적극 동조했다. 스팀슨은 7월 포츠담에 가는 트루먼에게 별도의 각서를 써 일본의 항복 조건 가운데 당시의 천황하에 입헌군주제를 용납하는 것을 명기하자고 건의했다.[그루, ‘격동의 시대(Turbulent Era)’ 1406~1473p]
항복 조건의 완화를 반대하는 세력도 강력했다. 당시 국무부 차관보이던 애치슨(Dean Acheson)의 생각이 그랬다. 새로 취임한 국무장관 번스(James Byrnes) 또한 천황에 더욱 강력하게 반대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여론이 천황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트루먼, 번스 같은 여론에 예민한 정치인은 여론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의 경쟁
트루먼, 처칠(나중에 애틀리가 대체), 스탈린이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3거두 회담을 했다. 회담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폴란드를 포함한 전후 유럽의 새로운 국제 질서였다. 여기에서 미국과 소련은 서로 갈등을 노출해 전쟁의 동반자에서 전후의 경쟁자로 탈바꿈한다. 유럽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일본의 항복이었다. 트루먼과 스탈린은 소련의 참전 문제를 두고 서로 암묵의 경쟁을 한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언급된 이권을 확보하고자 일본을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소련은 미국에 소련의 참전을 공식으로 요청해달라고 제의했다. 트루먼은 이것을 거부했다.
트루먼은 표면으로는 소련의 참전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이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었다. 독일 패전 이후 폴란드 등 유렵에서 취한 소련의 행동을 목격한 미국은 일본이 패배한 후 소련이 동아시아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미국은 얄타회담에서 소련에 만주의 이권을 양보한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소련이 참전하기 전 전쟁을 종결하면 얄타의 양보는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이를 위해 빼든 비장의 칼이 원자폭탄이었다.[스요시 히세가와, ‘적과의 경쟁(Racing the Enemy)’ 75~155P]
한편 스탈린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 일본이 항복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7월 18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고노에 특사에 대해 통보하고 천황의 친서를 보여주며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다. 암호 해독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알고 있던 트루먼은 내색하지 않고 일본을 신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스탈린은 일본이 제출한 안에 구체성이 없다는 핑계를 내세워 ‘일본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안고 잠들게 만들겠다(lull the Japanese to sleep)’고 회답했다.[해리먼, 특사(Special Envoy) 492p]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가 7월 16일 첫 실험에 성공했다. 이 소식은 포츠담에 도착한 트루먼에게 즉시 보고됐다. 7월 21일 폭탄의 위력에 대한 더욱 자세한 보고가 올라왔다. 이 보고를 접한 트루먼은 소련에 대해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되어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 소련 참전 이전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트루먼이 기대한 것이 원자폭탄이었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과시하면 일본이 속히 항복할 것으로 트루먼은 믿었다.[가르 알페로비츠, ‘원자폭탄 사용 결정(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 249~265p)
7월 24일 회담에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신무기에 대해 통고했다. 원자폭탄이라고 하지 않고 “보통이 아닌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a new weapon of unusual destructive force)”라고 했다. 스탈린의 반응은 무표정이었다. 스탈린은 이 신무기를 잘 알고 있었다. 스파이를 동원해 맨해튼 프로젝트를 초기부터 감시했을 뿐 아니라 첫 실험 날짜 역시 스파이로 암약한 물리학자 휴크(Klaus Fuchs)를 통해 탐지했다. 이제 스탈린이 급해졌다. 소련이 공격할 수 있을 때까지 일본의 항복을 늦춰야 했다.(‘Racing the Enemy’ 130~214p)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졌다. 선언문을 자세히 보면 그것은 결코 무조건 항복 요구가 아니었다. 일본군의 항복을 요구한 것이지 국가 전체의 항복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즉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한 것이다. 항복하면 일본이라는 국가를 존속시키며, 일본 국민의 자유의사로 평화적이고 책임 있는 정부를 수립할 수 있으며, 국민의 기본권과 언론 종교 및 사상의 자유도 회복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평화적인 산업과 통상 등 전후 경제 재건도 용허한다고 했다.
8월 9일 소련 총공격 시작
그런데 이 선언문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첫째는 천황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의 처벌, 존속과 관련해 아무런 말이 없다. 천황의 존속을 용허해 일본을 쉽게 항복시키자는 제의를 트루먼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둘째, 선언문은 미국 영국 중국 3거두의 이름으로 공포됐을 뿐 스탈린의 이름은 없다.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었기에 트루먼은 선언문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제외했을 뿐 아니라 선언문 준비 때도 그와 상의조차 하지 않았다.(‘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 375~389p)
일본은 선언문을 면밀히 검토했다. 외무성은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앞서 언급한 선언문의 두 가지 이상한 점에 주목했다. 도고 외무상은 소련과의 협상 여지가 남았다고 보고 모스크바와 교섭하면 천황 문제 등에 대해 더욱 유리한 조건을 얻을 수 있다고 가늠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을 천황에게 직접 설명해 그의 허락을 받았다.(‘종전사록 4’, 3~51p)
당시 일본 육군 수뇌부는 소련과 관련해 서로 다른 두 가지 가능성을 지적했다. 첫째, 전후의 세계정책을 고려할 때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해 일본을 영구의 적(敵)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둘째,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계획하고 있으면서 이 비밀을 감추고자 한다. 대본영은 전자의 가능성을 선택해 “스탈린의 현명함을 기대한다”고 결정했다. 소련이 끝까지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고 중립국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대본영기밀일지(大本營機密日誌) 306p]
7월 27일 최고전쟁회의에서 도고는 ‘유조건 강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을 주장했고 스즈키 총리도 동의했다. 그러나 육군이 강력히 반대했다. 내각서기장관 사코미즈(迫水久常)에 따르면 스즈키와 도고는 “포츠담 선언이야말로 당면한 화평의 기초로 활용해야만 할 유일의 것”이라면서 이 선언을 기반으로 강화를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합국의 요구를 즉각 수락하지는 않고 도고의 뜻에 따라 소련과의 협상 추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고노에 특사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포츠담 선언에 대해서는 수락 또는 거절에 관해 일절 외부에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포츠담 선언은 세계 각국의 언론 매체를 통해 일본에도 알려져 있었다. 이에 대한 보도를 막을 수 없어 군의 반대에도 총리가 기자들에게 논평 형식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스즈키는 포츠담 선언과 관련해 “정부로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묵살(默殺)할 뿐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묵살 사건’이다. 총리가 말한 “묵살”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도 거절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간을 얻기 위해 당분간 무시한다는 “no comment”의 뜻이었지, 당장 거절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등 외국에는 일본이 거절한다는 것으로 보도됐다. “묵살”이 “ignore”로 번역되고, 그것이 “reject”가 돼버린 것이다.[‘기관총하의 수상관저(機關銃下の首相官邸)’ 225~233p]
이러한 보도를 접한 미국은 일본이 아직 항복할 의사가 없다고 결론을 내고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공격을 했다. 그리고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북한 지역으로 총공격을 시작했다. 이것이 특사 파견 요청에 대한 소련의 최종 답변이었다. 이로써 소련은 정식으로 대일전쟁의 참전국이 됐고, 한반도에 군대를 보낼 수 있었다. 한반도 분단의 운명은 여기에서 결정된 것이다. 만약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지체하지 않고, 적어도 8월 6일 전에 수락했더라면 원자폭탄으로 인한 참상과 소련의 참전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으면 한반도 분단도 없었을 것이었다.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천황을 비롯한 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에게 있다.
일본은 왜 그랬을까?
하버드대의 일본인 역사학자 이리에(入江昭)는 “만약 일본이 1944년 말 모스크바를 선택하지 않고 워싱턴에 접근했더라면 미국은 평화계획을 가지고 일본을 환대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리에, ‘권력과 문화(Power and Culture)’ 225p) 그러나 일본은 미국 대신 소련에 접근했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천황의 문제다. 일본이 최후의 순간까지 추구한 것은 이른바 ‘명예의 강화’였다. 천황 측근 인사들이 소련에 매달려 천황을 보호하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둘째는 소련에 대한 일본의 독특한 인식이다. 일본은 이념적으로 소련과 갈등 구조에 있음에도 서로가 많은 공통점을 가졌다고 보았다. 소련이 공산국가로서 독일, 영국, 미국 등 서구 강대국에 차별받은 것처럼, 일본 역시 강력한 군사력을 육성했는데도 동양에 위치했기에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보았다. 또한 일본은 미국, 영국이 주도하는 자유,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 등의 사상은 일본이 지향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 사회공동체 등의 사상과 배치하며 일본은 오히려 소련의 이념, 체제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졌다고 봤다. 일본은 이렇듯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적인, 아니 환상적인 인식을 가졌기에 미국을 기피하고 소련에 매달려 강화를 추구한 것이다.
항복을 늦춘 또 하나의 요인은 일본이 꿈꾸던 전후 신(新)세계 질서다. 태평양전쟁 초 승승장구할 때 일본은 미국, 영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항한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구상했다. 서구 세력으로부터 동양인을 ‘해방’하고, 일본이 주도하고 일본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력권을 ‘공영’의 이름으로 아시아에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꿈은 종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소련의 중재로 강화를 시도한 저변에는 ‘공영권’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작용했다. 일본은 전쟁 후 미국과 소련이 서로 대립하면서 경쟁자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념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또한 실제 권력정치(Realpolitik)에서 미국과 소련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조종할 수 있는 여유가 아직 있다고 본 것이다. 소련이 전후 미국, 영국의 세력을 견제하는 데 일본이 필요할 것으로 봤으며,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소련의 도움으로 아시아를 계속 지배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이 꿈꾸던 전후 신질서는 미국·영국의 세력권과, 소련의 세력권, 일본의 세력권으로 분할한 세계 지배 구상이었다. 항복을 지연한 배경에는 이러한 망상이 있었다.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는 이른바 ‘우경화’의 움직임은 이러한 사상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은 일제의 최종 산물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을 분단하겠다는 계획은 어디에도 없었다.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한 카이로 선언이 한국의 장래에 관한 연합국 유일의 공식 합의였다. 그리고 얄타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한국을 해방한 후 과도정부 수립을 위해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대 강국의 신탁통치를 할 것을 합의했다. 이 합의에서도 한국을 분단하겠다는 고려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4대강국 신탁통치도 어디까지나 통일된 한국에 실시하겠다는 것이지, 분단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요약하면 한국의 분단은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한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다. 소련이 8월 9일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진입한 상태에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소련군이 이미 북한 지역에 진주한 상황에서 다급해진 미국이 소련이 북쪽, 미국이 남쪽을 점령해 일본군을 무장해제하자고 제의하자, 이를 소련이 받아들여 한국이 분단됐다. 불과 1주일의 전쟁으로 소련은 북한을 점령할 수 있었다. 수차례 강조했듯 만약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소련군이 북한에 진입하지 않았을 것이며 한국의 분단도 있을 수 없었다.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하려는 주목적은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고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에 빼앗긴 만주지역의 이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 권리는 얄타에서 대일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스탈린이 루스벨트로부터 약속받은 것이었다. 이 대가는 소련이 반드시 참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소련이 참전하기 전 일본이 항복하면 얄타에서의 약속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소련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일전쟁에 참가하려 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1945년 5월 초 독일이 완전히 패배했을 때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이 이제 일본 공격에 총집중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중립을 지켰던 소련도 일본을 공격할 것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래서 4월 초 소련은 중립조약을 폐기하겠다고 통고해 일본과 전쟁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천황을 비롯한 일본의 지도층은 인정하고 있었으며 더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강화를 모색했더라면 그때 쉽게 전쟁을 종결할 수 있었다. 미국은 당시 인명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에 전쟁을 마무리하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이 미국과 접촉했으면 원자폭탄도 소련의 참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위중한 시점에 일본은 미국을 기피하고 소련을 우방국으로 선택했다. 소련의 중재로 ‘명예의 화평’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소련의 도움으로 천황을 보호하고 일본 지배의 ‘공영권’을 지속하겠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의도는 이와 정반대였다. 스탈린의 최대 목적은 하루속히 일본과 전쟁을 시작해 얄타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항복을 백방으로 지연시켜야 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한 일본은 스스로가 만든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이다. 스탈린은 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 선전포고까지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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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피폐해 있었다. 육군은 군사력이 격감해 일본 본토에서 겨우 저항하고 있었으며, 해군은 유명무실했다. 미국의 무제한 공습으로 도시의 대부분은 폐허가 됐으며 많은 국민이 기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참혹한 상황에서 일본은 즉각적인 항복을 거부하고 미국을 기피하면서 소련을 통한 ‘명예의 화평’, 즉 ‘천황 보호의 평화’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가 원자폭탄 피폭이고, 한반도 분단이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전적으로 천황을 비롯한 제국주의 일본의 지도자에게 있다.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최종 산물이 한반도 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