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변호사 심부름꾼 아닌 전문성 갖춘 특급 해결사

‘원조 사립탐정’ 패러리걸

  •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4-04-22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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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립탐정 제도 도입에 찬반논란이 일지만, 이미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패러리걸(Paralegal).’ 변호사의 법률 업무를 지원하는 법무사, 사무장 등이 그들이다. 법정에서 직접 소송에 참여하진 못하지만 소송을 위한 자료 수집, 증거 확보, 목격자 면담, 서면 작성 등을 한다. 일반인에게 생소한 패러리걸의 직업 세계.
    변호사 심부름꾼 아닌 전문성 갖춘 특급 해결사
    지난해 중국 국적 선박이 부산항에 입항하다 일명 ‘뜬 부두(비고정식)’를 들이박아 파손된 사고가 발생했다. 고객의 연락을 받은 25년 경력의 패러리걸 송재성(가명) 부장은 직원 한 명을 데리고 급히 서울에서 부산 현장으로 출장길에 올랐다. 사고 선박이 사후조치 없이 그대로 출항해버리면 채권 확보가 안 돼 피해자 측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

    송 부장은 도착 즉시 항만청에 사고 선박의 출항 정지를 요청하고 법원을 통해 선박 감수보전 조치를 받아냈다. 그의 말이다.

    “우리 업무 중 선박 관련 사건은 특수한 경우다. 대응이 늦어져 사고 선박이 출항하면 공해상까지 잡으러 가야 한다. 도주 선박이 10층 건물 높이의 대형 배면 작은 통선 위에서 흔들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실제 그런 경우가 있었다. 외국 배였는데 일단 배에 오르면 선박국적증서부터 확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말이 통하지 않고 실랑이를 벌이는 등 위험한 순간을 겪기도 했다.”

    대형 로펌에 근무하는 송 부장의 직책은 ‘패러리걸(Paralegal).’ 우리말로 ‘법률가 보조원’ ‘변호사 사무원’ 등으로 해석되는 이 직종은 변호사 자격증은 없지만 그들의 법률 업무를 돕는 일을 한다.

    선진국에선 유망 직종



    미국 등 선진국에서 유망 직종으로 알려진 패러리걸은 소송에 기초한 자료 수집부터 증거 확보, 목격자 면담, 서면 작성 등 변호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을 맡는다. 다만 법률적 조언이나 법정에서 직접 소송을 수행하는 건 변호사의 영역이다.

    국내에선 패러리걸이 법무사,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과 유사한 일을 하지만 법무사처럼 자격증은 없다. 증거 조사 및 수집도 미국의 패러리걸과 달리 국내에선 재판 등을 통해 일반적으로 공개된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주민등록법 등 법률로 정한 요건에 해당하는 경우 외엔 증거 조사 및 수집을 할 수 없다.

    일반인에게 낯선 패러리걸이 최근 관심을 끄는 이유는 외국계 로펌이나 국내 대형 로펌의 직원 모집 때 패러리걸이란 명칭을 쓰는 곳이 늘면서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흔히 패러리걸을 통·번역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국내 패러리걸의 업무 영역은 통·번역, 법무, 송무 세 분야로 나뉜다.

    번역 분야 업무는 영문으로 된 판례나 비즈니스 계약서 등을 한글로 옮기고 한글 문서를 영어로 옮기는 식이다. 외국 변호사로 국내 로펌에서 패러리걸로 활동 중인 여성 성영아(가명) 씨는 “통·번역 패러리걸이라고 해서 단순히 번역 업무만 하지는 않는다. 기업 고객인 의뢰인을 면담하는 것도 우리 일이다. 또 기업 간 거래에서 한국 기업이 영문으로 작성한 계약서와 미국 기업이 영문으로 쓴 계약서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관련법도 양국 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계약서를 쓸 때 미국 법과 한국 법 중 어느 법을 적용하는 게 고객에게 유리할지 조언도 한다. 그뿐 아니라 외국환거래 규정은 사례마다 다르기에 금융감독원과 시중은행, 한국은행 실무자들과 접촉해 관련법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판단해서 법률자문을 하기도 한다. 기업 고객의 양해각서(MOU) 체결, 매매, 주식양수도 같은 계약서를 리서치해서 금감원 등 관련 기관에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를 알아보는 등의 업무도 한다”고 말했다.

    법무 분야 패러리걸은 법률 관련 사무를 주로 본다. 대형 로펌의 법무 패러리걸 팀장인 김선무(가명) 부장은 “법무 패러리걸은 주로 국내 법무사가 처리하는 업무인 법인 설립부터 청산까지의 업무, 부동산 업무 등을 한다. 예를 들면 외국 기업이 국내 투자를 고려할 때 투자자들이 입지, 환경 등을 사전 검토하는데 우리나라 사정을 잘 모르니 우리가 특정 지역을 선정해 임대가계약을 해주고, 외국인투자촉진법에 따른 투자 신고와 투자자금 들여오기, 외국인투자법인 설립과 등록 업무를 해준다. 그 과정에서 외국 임원이 입국할 때 비자를 발급받아주는 일도 한다”고 했다.

    투자, 상표권, 특허, 사업자등록, 인허가 사업 등도 법무 분야 패러리걸의 업무다.

    대형 로펌의 패러리걸 수요 증가

    송무 분야 패러리걸은 각종 분쟁과 민·형사상 소송, 가사소송 등 소송 관련 사무를 지원한다. 송무 분야 팀장인 송재성 부장은 “빌딩 같은 건물 경매 업무를 맡다보면 공사 현장을 누벼야 할 때가 있다”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신축 중인 건물은 채무변제가 안 되면 등기부가 없다. 그 상태에서 경매를 하려면 법원의 압류, 가압류 절차를 밟고 건축물대장을 만들어서 등록해야 한다. 그러려면 원래 건물 신축 신청서와 동일하게 지어졌는지를 일일이 측량해 우리가 직접 대장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야 경매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7~8층 높이의 건축물대장을 만들려고 한 달 가까이 현장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혼소송에서 친권과 양육자 지정, 양육비 산정 절차를 돕기도 한다. 가족관계등록부상 친권자 변경 절차나 정정신청 등도 송무 분야 패러리걸의 일이다.

    법무법인 넥서스의 신동윤 변호사는 “형사사건의 경우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 패러리걸에게 현장조사를 맡기기도 한다. 교통사고 사건을 예로 들면, ‘○년 ○월 ○일 ○시에 ○○장소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날이 어두워 전방 주시가 힘들었다’고 상대방이 주장하면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공소장에 나온 내용과 같은 시기, 같은 시각에 현장에 직접 가서 사진을 찍는다. 상대방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증거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증거 수집 등을 위해 패러리걸이 임의로 신용조사를 하는 건 불법”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수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법률시장을 개방해왔다. 이는 국내 법률문화와 법률서비스 시장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 국제교류 확대와 외교통상의 중요성도 날로 커지는 시대인 만큼 앞으로 법률시장의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패러리걸에 대한 대형 로펌과 기업의 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변호사 심부름꾼 아닌 전문성 갖춘 특급 해결사

    패러리걸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는 팀워크다.

    대형 로펌의 한 임원은 “과거 법률회사들은 소송을 전제로 했지만 요즘은 소송보다 인수합병(M·A), 기업지배권구조, 기업 구조조정, 공공계약 등 기업 분야 수임이 많아졌다. 그 비율을 따지면 6대 4 혹은 7대 3으로 기업 분야 일이 많다. 한마디로 종합컨설팅 로펌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대형 로펌 소속 패러리걸의 업무 변화는 경기 흐름에 민감하다. 경제 활황 시기에 투자가 늘면 해외 PF(Project finance)로 출국자가 늘면서 비자나 외국환 신고 등의 업무가 느는 반면 불황 땐 도산이나 파산하는 기업이 늘어 그와 관련한 업무가 많아지는 것. 그는 “패러리걸의 업무는 갈수록 영역이 넓어지고 다양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패러리걸 업무는 세분화하고 있다. 15년차로 로펌의 통·번역 분야 팀장인 여성 김주연(가명) 씨는 “나를 포함해 우리 팀원이 7명인데 업무 특성상 영어, 중국어, 독일어 등 외국어 전공자가 많다. 나도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법학을 전공했다. 공통된 업무는 통·번역이지만 각각 공정거래와 일반 기업 법무, 지적재산권, 중재, 조세, 소송을 전담하는 식으로 업무영역이 세분화돼 있다. 조세 전문 변호사가 사건을 맡으면 조세 전담 패러리걸에게 일을 맡기는 식”이라고 밝혔다. 그는 “복잡한 사안이 얽힌 대형 소송 사건의 경우 증거자료 등 훑어보고 번역해야 할 자료가 많은데 마감시간에 쫓기면 여러 명이 팀워크를 발휘해 자료를 100쪽씩 나눠 번역하는 식으로 일을 분담, 처리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법무 분야에서 부동산을 전담하는 유원규(가명) 과장은 “빌딩 매매계약 체결에서 소유권 이전까지의 업무를 비롯해 근저당권 설정, 상속등기 등의 업무가 우리 일이다. 가령 소유권 이전만 해도 토지 또는 건물을 구입한 뒤 구청에 부동산거래신고를 하고 취득세 신고와 납부, 소유권이전등기 신청서 작성과 등기소 제출, 그리고 등기권리증이 나오면 등기소에서 그걸 찾아 직접 고객에 전달하기까지 수많은 기관을 드나들고 그 과정에 필요한 서류도 다 준비해야 한다. 농지를 사기 위해 필요한 농지취득자격증명서 발급과 그에 필요한 서류 준비도 한다”고 말했다.

    2010년 특허법원 사건에 이어 2011년 민사 본안 및 조정신청 사건에 대해 인터넷 전자소송서비스가 시행되면서 최근 한 대형 로펌은 송무 분야 패러리걸팀에 전자소송팀을 추가하기도 했다.

    ‘사무장’ 아닌 ‘국장·팀장·부장’

    선진국에선 변호사와 패러리걸이 파트너로 법률회사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패러리걸의 위상이 높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패러리걸이란 용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무장’이란 명칭이 통용됐고, 그들은 변호사의 ‘심부름꾼’ 정도로 인식됐다. 지금도 몇몇 대형 로펌을 제외하면 법률사무소나 변호사 사무실, 일반인 사이에 ‘사무장’으로 불린다. 반면 대형 로펌 패러리걸은 경력에 따라 국장, 팀장, 부장 등 일반 기업과 같은 직함을 단다. 업무 영역이 전문화, 다양화하면서 학벌과 역량이 과거보다 월등히 높아졌기 때문. 일명 ‘법조타운’을 중심으로 교통사고, 해난사고, 의료 전문 등을 내세운 패러리걸이 수년 전부터 등장해 활동 중이다. 이들을 잡으려는 변호사들 간 경쟁도 흔하다.

    패러리걸이 되기 위해 반드시 법학이나 영어 등 특정 과목 전공자여야 한다는 조건은 없다. 로펌마다 선발 기준이 제각기 다르고 업무 분야도 다양하기 때문. 다만 법학이나 어학을 전공하면 취업에 좀 더 도움이 된다. 김선무 부장은 “법무 분야를 담당하는 우리 팀엔 법학과 출신이 많지만 반드시 법을 전공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상법과 부동산 관련법을 꿰고 있으면 일을 하기가 좋다. 하지만 일단 신입으로 입사하면 당장 실무에 투입되는 게 아니라 등본 발급부터 시작해서 단순하고 자잘한 업무가 많다. 그 사이 충분히 실무를 익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패러리걸 업무는 통·번역, 법무, 송무팀뿐 아니라 같은 팀 내에서도 전문 분야가 따로 있어 이들 간 협업이 중요해 면접 시 팀워크에 대한 자질이 중요하다. 송재성 부장은 “변호사가 나무의 굵은 줄기라면 패러리걸은 그걸 떠받치는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엔 ‘변호사를 산다’고 했지만 요즘은 ‘선임한다’는 표현을 쓴다. 그 정도로 고객이 믿고 일을 맡긴다는 이야기다. 패러리걸에겐 변호사를 도와 승소할 수 있도록 끝까지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닌 서포터이자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이 일에 뛰어드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현재 국내 로펌에선 적게는 2~3명, 많게는 수십 명의 패러리걸이 근무한다. 신입 연봉은 대략 3000만 원 안팎. 하지만 경력이 쌓이면 능력별로 천차만별이다. 10년 경력이면 4000만~5000만 원 받는다.

    양성 교육과정 속속 개설

    대형 로펌 패러리걸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은 뜨겁다. 법률시장 수요도 많아 이들을 겨냥한 교육과정도 속속 생겨난다.

    전주대는 재작년 총 75시간에 걸쳐 패러리걸 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은 지난해 9월 ‘법률번역 전문가 과정’을 새롭게 개설했다. 상명대 법무교육원은 200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소재 한 사립대학과 패러리걸 양성에 대한 협약을 맺어 상명대와 미국 대학에서 각각 1년간 교육을 이수하고 인턴십을 거치면 현지 취업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밖에 관련 학회와 사설학원도 패러리걸 양성과정을 운영한다. 교육 내용은 소송실무, 등기실무, 부동산경매실무, 강제집행실무, 법인회생실무, 채권실무 등과 민법총칙, 법조윤리 등으로 이뤄진다.

    10여 년 경력의 여성 패러리걸 이선정(가명) 씨는 “올해 초 우리 회사에서 번역 분야 패러리걸 한 명을 채용했는데, 접수된 서류가 100통을 넘었다. 지원자 중엔 로스쿨 졸업자, 사법시험에 실패한 뒤 ‘일단 패러리걸로 들어가 실무를 경험하자’는 이도 있었다. 단 5일 만에 예상 외로 너무 많은 지원자가 몰려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다.

    패러리걸로 일하다 뒤늦게 사법시험을 통과해 법조인이 되거나 미국 공인회계사(AICP) 자격을 딴 사람도 나온다. 로스쿨에 진학해 외국 변호사 자격증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제53회 사법시험에 최고령으로 합격해 화제가 된 59세의 오세범 변호사는 사무장 출신. 그는 사시 합격 후 자신이 몸담았던 법무법인에 재입사해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취재 도중 만난 패러리걸들은 한결같이 직업 전망과 미래에 대해 낙관했다. 하지만 몇몇 변호사는 조심스레 부정적 전망도 내놨다. 서울 서초동의 종합법률사무소 소속 한 변호사는 “최근 변호사 3~4명이 공동 사무실을 내고 사무장을 따로 채용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참 변호사에게 사무장 일을 대신 맡겨 인건비를 줄이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신동윤 변호사는 “국내 법률시장은 한정돼 있는데 로스쿨이 도입되면서 변호사 수가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다. 장차 변호사가 패러리걸로 활동할 수도 있다. 현재 외국 변호사도 국내에 많이 들어와 번역 분야 패러리걸의 업무도 그들에게 한국어 번역을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정도로 축소될 수 있다”고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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