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많은 부모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자식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한다. 많은 돈을 교육비에 쏟아 부으며 허리띠를 조인다. 그런데 고통과 성공은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대입수능시험을 앞두고 학부모들이 두 손 모아 절을 하며 수험생 자녀의 고득점을 바라는 불공을 드린다.
게으른 교수의 전형인 필자는 1학기 내내 여름방학을 기다린다. 6월 말에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 처리까지 마치고 나면, 그 시기가 바로 7월 초다. 이때는 학교도 가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편안하게 쉬면서 놀러 다니고 싶다. 그래서 약속도 잡지 않고 아내에게 놀아달라고 조른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쇼핑도 다니자고.
하지만 바로 이때가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아들의 기말고사 기간이다. 두 아들이 시험을 보러 학교에 가고 나면 놀아 달라고 조르는 나를 아내는 철저하게 거부한다. 영화도 안 보러 갈 거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싫다고 한다. “도대체 왜”그러느냐고 묻는 나에게 아내는 “애들이 시험 본다”고 답한다.
그래서 나는 되묻는다. “당신이 시험 보냐? 학교에서 시험 보는 애들이랑 집에 있는 우리가 무슨 상관있는데?”라고. 아내는 대답한다. “애들이 오늘 시험 보고 와도 내일 시험을 위해 오늘도 밤새고 계속 공부해야 하는데, 엄마 아빠가 놀러다니고 자기들끼리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닌다고 생각하면 공부할 기분이 나겠어? 공부가 잘되겠어?”라고. 이 대답은 매우 논리적이고 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거 말이 된다. 일리가 있다. 그러니까 몰래 놀자. 재미있게 놀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집에 와서 안 논 척하자.” 그래도 내 아내는 나랑 안 놀아준다. 내가 왜 몰래 노는 것도 안 되느냐고 조르면, 내 아내는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고 얘기한다.
부모도 수험생?
이게 한국의 부모, 특히 엄마의 마음이다. 나의 어머니도 그러셨고, 현재를 사는 어머니 대부분의 마음이 그렇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만 보면 내 아내의 행동은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두 아들이 모르기만 한다면, 아들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동안 부모가 집에서 무엇을 하건 아무 상관이 없다. 집에서 기도를 하건, 절을 하건, 굿을 하건, 노래방을 가건, 등산을 가건, 낮잠을 자건 상관없이 시험을 잘 볼 아들은 잘 볼 것이고, 못 볼 아들은 못 볼 것이다.
물론 종교건 미신이건 뭔가 초자연적인 존재가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실제로 자녀의 시험 성적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를 통해 특정 종교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시험에서 더 나은 결과를 얻을 리가 없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실제 기독교적 믿음이 사회를 지배하는 미국에서도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학생과 그들 부모의 종교를 조사한 연구 결과 명문대 진학과 종교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대학 진학뿐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내 아내의 비합리적인 행동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 자원을 낭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두 아들과 우리 가족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더 문제다. 두 아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내내, 내 아내는 초조하게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빈다. 사실 믿는 종교가 없으니 누구한테 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음속으로 매우 간절하고 처절하게 빈다. 결코 한순간도 즐겁거나 행복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로워지려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두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가 물어본다. 시험은 어떻게 봤느냐고. 10번 중 9번은 실망스러운 대답이다. 나의 두 아들뿐 아니라 대한민국 아들의 성적은 항상 부모에게 만족스럽지 않다. 10등을 한 아들에게는 왜 5등을 못 했느냐고, 5등을 한 아들에게는 왜 1등을 못 했느냐고, 1등을 한 아들에게는 왜 100점을 못 받았느냐고 아쉬워하는 것이 한국의 엄마다. 아들의 실망스러운 대답에 내 아내는 억장이 무너지고 다리가 풀린다. 그 순간부터 나와 아들들은 심기가 불편해진 아내의 눈치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
나는 내 아내에게 전혀 다른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아들들이 시험 보는 동안 나와 함께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기분 전환을 하고, 어차피 기대에 못 미치는 시험을 볼 아들을 기분 좋게 맞이하자고. 그래서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며 내일의 시험을 더 잘 준비하게 도와주자고. 아들이 시험 보는 동안 우리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어차피 아들의 시험 성적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이렇게 합리적이며 건설적인 제안을 하는 기특한 나에게 내 아내는 오히려 화를 낸다. 부정 타게 이상한 소리 한다고. 내 아내뿐 아니라 한국의 부모 중에 그렇게 합리적으로 사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이런 한국 부모의 비합리성의 중심에는 바로 인고의 착각이 있다.
소원 성취는 드문 일
2015 대입 합격전략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와 학생들이 강사의 설명을 집중해 듣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첫째, 그런 고생을 한 사람, 더 심한 고생을 한 사람이 무지하게 많은데도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라는 사실이다. 둘째, 성공한 사람도 그들의 고생이 후일의 성공에 도움이 됐을 경우에만 해당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부모가 자녀의 성공을 바라고, 특히 한국의 부모 대부분은 자녀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일부분이다.
더구나 그 극히 드문 경우에도 부모가 열심히 빌었기 때문에 자녀가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열심히 비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더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이 밤을 꼴딱 새면서 졸고 있는 자녀를 깨워준다든지, 더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해준다든지, 심지어 자녀가 모르는 문제를 미리 공부해서 가르쳐주는 고생은 분명히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냥 마음속으로 열심히 빌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행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녀를 짜증나게 만든다. 그래서 이런 헛짓은 결국 자녀와 부모 모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인고의 착각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인고의 착각을 하게 되는 걸까. 바로 불안을 다스리는 착각적 통제감과 바람을 반영하는 비현실적 낙관주의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중요한 본능 중 하나가 바로 통제 욕구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조정하려는 욕구가 있다. 원하는 일을 일어나게끔, 원하지 않는 일을 일어나지 않게 막는 영향력을 발휘해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 한다. 이는 실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기본이 된다.
이러한 욕구는 너무 강해서 때로는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통제감을 갖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놀이동산에 가면 정해진 철로를 따라 도는 모형 자동차가 있다. 이런 모형 자동차에는 한결같이 돌아가는 핸들이 달려 있고, 아이들은 이 모형 자동차를 타는 동안 열심히 이 핸들을 돌린다. 사실 그 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퀴에 연결돼 있지도 않고, 어차피 그 자동차는 철로와 같은 궤도를 따라 돌게 돼 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때로는 그 핸들을 차지하려 싸우고, 그 핸들이 없다면 그 모형 자동차를 타는 재미도 반감될 것이다.
이런 통제의 착각은 일상에서 재미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불안을 다스리는 구실을 한다. 인생의 수많은 일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운이라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것을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불안해서 못 산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게 된다. 일상에서 우리가 겪는 수많은 미신적 행동이나 징크스에 대한 믿음도 이런 착각적 통제감을 위한 것들이다.
이런 착각이 우리의 심리를 편하게 해주는 원리는 간단하다. 한국에서는 수능날 아침에 하면 안 되는 수많은 것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미역국이다. 수능날 아침에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준다면 계모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수능날 아침에 미역국을 먹으면, 실제로 그 미역국 때문에 대학에 떨어진다고 믿으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무도 믿지는 않는데 먹이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미역국 때문에 자녀가 대학에 떨어진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역국을 먹이지 않으면서 자녀가 대학에 떨어져야 할 이유 하나가 마치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세상에 미역국을 먹은 수험생이 있다면, 최소한 그 학생보다는 자신의 자녀가 떨어질 이유가 하나 줄어든 것 같은 착각을 즐기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나의 불안감을 조금씩 덜어준다.
이런 착각적 통제감은 미래에 대해 근거 없이 낙관적으로 믿는 우리의 착각과 깊이 연결돼 있다. 사람들은 미래를 실제보다는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자기고양적 성향을 갖는다. 긍정적인 일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고 부정적인 사건은 자신을 피해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암에 걸릴 확률, 교통사고나 벼락과 같은 사고로 사망할 확률, 이혼할 확률에서는 자신이 경험할 확률을 실제 일어날 확률이나 타인이 경험할 확률보다 더 낮게 추정한다. 자녀가 명문대에 들어갈 확률, 자신이 임원이 될 확률, 심지어 복권이 당첨될 확률에서는 실제보다, 타인보다 자신의 경우를 더 높게 예상한다. 이런 자기 멋대로의 비현실적 낙관주의는 인간이 가진 본능적 성향 중에 가장 강력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현실적 낙관주의 또한 착각적 통제감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완화해주고, 긍정적인 기대를 갖고 미래를 위해 정진하도록 만드는 심리적 기능을 한다. 하지만 이 두 기능이 협동해서 바로 인고의 착각을 일으킨다. 즉 지금 고생한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뭔가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제 그것이 미래의 성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와 상관없이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는 것처럼 믿는 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마치 지금 더 고생해야지 더 성공할 거라는 믿음에 현재를 더 고생스럽고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한국의 부모와 외국의 부모는 사실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외국의 부모도 자녀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고, 잘하면 좋아하고, 가능한 한 학업을 지원하고, 자녀가 여러 면에서 성공하길 바라고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데 큰 차이는 한국의 부모는 청소년인 자녀가 즐거워하는 걸 보면서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종종 한국의 부모는 자녀를 보며 이런 말을 한다. “너무 즐거운 거 아니니. 너무 천진난만하게 즐겁고 행복한 게 문제야”라고. 마치 몹시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무 생각이 없다는 듯이, 미래의 행복을 미리 당겨 써서 나중에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빠진다. 그러면서 자녀를 설득하려고 한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는 지금의 행복과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고. 왜? 과연 이런 주장은 근거가 있을까?
두 아들의 다른 삶
필자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두 아들의 얘기로 한번 미래를 그려보자.(물론 실제 나의 두 아들과는 전혀 상관없다.) 큰아들을 요즘 한국의 부모가 키우는(키우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교육시킨다고 가정해보자. 어려서부터 영어와 수학 학원을 보내고, 가능하면 영어유치원과 같은 조기교육에 소홀히 하지 않고, 성적만 따라준다면 명문 초등학교와 중학교, 특목고를 보낸다. 물론 대치동과 같은 곳의 명문 학원을 찾아서 전 과목을 수강하게 하고 과외를 시키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도 억세게 운이 좋아야만 상위 1.5%에 들어가서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영문 약칭) 대학에 입학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가능하면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의 경험을 하고, 지속적인 영어학원 수강과 각종 취업 준비를 위한 학원비 등을 포함하면 최소한 1억5000만 원, 쉽게 2억 원이 넘는 금액이 들 것이다. 이렇게 들이고도 원하는 직장, 대기업이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중견기업, 공기업, 전문직종에 취업할 확률은 높지 않다. 사실 100명 중에 5~6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2억 원이 넘는 교육비를 들여 그나마 그런 좋은 데 취업하면 보람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해줄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다. 물론 1억 원쯤 들여 결혼도 시켜주고, 2억 원쯤 들여 집도 한 채 사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두 아들을 생각하면 12억 원이라는 큰돈이 있어야 해줄 수 있는 꿈같은 얘기다. 그래서 부모 대부분은 취업한 자녀는 이제부터는 알아서 살아가길 바란다.
이제 둘째 아들 얘기를 해보자. 둘째 아들은 어려서부터 공부에 재주가 없었다. 공부로는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이 매우 명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부모는 영어나 수학, 다른 사교육을 포기하고 별로 교육비도 들이지 않고 둘째 아들을 키우게 된다. 다행히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고 나쁜 친구를 사귀지도 않아서 착하고 순한 학생으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성적으로는 전교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 최하위권의 성적으로도 등록금만 낸다면 합격시켜줄 대학은 많다. 하지만 부모는 그런 대학에 가서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아들에게 좋은 기술을 배우라고 권한다. 어떤 특수 기술일 수도 있고, 포클레인과 같은 중장비 운전면허일 수도 있다. 이 부모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큰아들에게는 2억이 넘는 교육비를 썼는데 둘째 아들에게는 교육비가 2000만~3000만 원도 안 들었다. 고민하던 부모는 미안한 마음에 둘째 아들에게 2억짜리 집을 한 채 사주었다.
20년 후 이 아들들이 40대가 됐을 때, 과연 누가 더 행복할까. 대기업에 취업한 큰아들이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2억 원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이미 2억짜리 집을 가진 둘째 아들은 한 달에 100만 원에서 200만 원씩 형보다 덜 벌어도 사는 형편은 거의 비슷하다. 집을 살 돈을 저축하지 않아도 되니. 아마 그런 큰아들 중 대부분은 40대 중반이 되면 회사에서 퇴직할 것이다. 그리고 치킨집, 김밥집을 하거나, 동생이 배운 기술을 그때서야 배우겠다고 시작할지 모르겠다.
가난의 대물림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영어학원 수강과 각종 취업 준비를 위한 비용이 든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하지만 우리의 부모는 나중에 무슨 일을 하게 되건 상관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과 돈을 자녀의 사교육에 쓴다. 특히 수학과 영어 교육에. 그리고 나중에 포클레인 운전기술을 가진 아들을 도와줄 여력이 없어서, 그 아들은 다른 사람 소유의 포클레인 기사로 취업한다. 그리고 집을 구할 돈도, 다른 어떤 도움을 줄 여력도 없다. 그래서 그 자녀는 더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부모도 그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데도 더 어려운 노후를 보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얘기할 거다. 부모는 자녀에게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내가 그 고생을 해서 공부를 시켰건만…”이라고. 자녀는 부모에게 “내가 공부 안 한다고 했지요. 왜 내 말을 무시해요. 부모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는데. 사업자금도 안 대주고, 집도 못 사주고….”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많은 사람이 사교육비가 많이 든다, 대학등록금이 비싸다고 하면서 우리 사회의 교육과 연관지어 소득양극화, 가난의 대물림을 걱정한다. 이러한 한국 사회 문제의 중심에 교육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단순히 절대적 금액이 큰 게 아니라, 그것이 얼마이건 상관없이 투자한 교육비의 본전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실제로 대학졸업장이 필요한 사무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40%를 넘지 않는다. 현재 대학을 졸업하는 청년의 50%는 지금까지 들인 돈과 노력의 본전을 찾을 길이 없다는 얘기다.
이 사실은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그 어떤 정책을 도입하더라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반값등록금을 시행한다 해도 엄청난 교육비 들여 대학 가면, 전체 교육비 2억 중에 마지막에 한 2000만 원 깎아주는 셈이다. 그 효과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거니와 대학등록금이 싸졌으니 이제 더 대학을 안 갈 이유가 없어져서 아마 대학 진학률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지금 우리 사회가 청년실업과 중산층의 붕괴를 막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과연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까? 어떠한 작은 도움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들어가는 비용을 조금 덜어주는 형태의 정책은 궁극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대부분 본전을 찾을 길이 없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는 백해무익할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궁극적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막는 방법은 공짜로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은 본전을 못 찾을 바보 같은 투자나 소비를 좀 해도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자동차, 옷, 백을 사고, 말도 안 되는 고액 사교육을 시킨다. 그들은 거기서 본전을 못 찾아도 그리 치명적이지 않다. 하지만 가용자원이 얼마 되지 않는 중산층 이하에게 잘못된 판단의 결과는 너무나 처참하다. 가용한 모든 자원을 자녀의 사교육에 쏟아 부었는데, 그 자녀가 그 본전을 찾을 능력이 원천적으로 없었다면 그 자녀뿐이 아니라 그 부모도 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에 사람들은 불안하니까 그냥 아무거나 한번 해보려고 한다. 지금 자녀의 사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많은 부모는 사실 그거 외에는 뭘 해야 할지 모르기에, 아무것도 안하고 있자니 불안해서 그런다. 그러니 스스로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면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자녀를 키우면 나중에 자녀가 성공할 것이라는 인고의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지금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새로운 뭔가를 시도할 용기가 없어서 한 모든 고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무지와 비겁의 대가는 자신이 치르는 것이지, 사회가 책임지거나 보살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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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결코 자원이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고스톱을 쳐도 패가 나쁘면 광을 팔면서 쉬어야 한다. 포커를 쳐도 손에 쥔 패가 나쁘고 가능성이 낮으면 빨리 포기해야 다음에 좋은 패가 왔을 때 투자할 자본이 남는다. 놀면 뭐하냐며 나쁜 패를 가지고도 계속 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쪽박을 차게 돼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인고의 착각이다. 제발 이제 고통을 즐기지 말자. 그런다고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