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타국의 형식에 우리의 정신을 담는다는 것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4-04-21 17: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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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국의 형식에 우리의 정신을 담는다는 것

    우리 한시 삼백수<br>정민 평역, 김영사

    대학생들의 글쓰기 수업을 진행할 때,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시험이 바로 한자 시험이다. 늘 한국어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한자에 독음(讀音)을 달라’고 하니 새내기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하지만 나는 한자 시험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어는 순 한글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어 자체가 국한문혼용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만약 표음문자인 한글의 형식에 따라 모든 표기법을 소리 나는 대로 적도록 한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문자 체계가 일시에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모든 것을 소리 나는 대로, 또는 언중의 발음에 따라 바꾸다보면 원래 우리말이 갖고 있던 고유의 결들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삯월세’가 ‘사글세’로 바뀔 때 나는 그 아름다운 ‘삯월세’의 울림과 모양새가 그리워 불현듯 슬퍼졌으며, ‘돐잔치’가 ‘돌잔치’로 바뀔 때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돐’과 ‘돌’이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돐’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 자신도 모르는 글자가 나올 때마다 매번 자전을 찾아가며 헤매곤 하는 한자를 그래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한문으로 만들어진 우리 문학과 기록들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역사 자료인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해 한용운의 한시에 이르기까지, 한문으로 창조된 우리 문학의 보물창고는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대장경’이 한자로 표기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남의 나라 문화유산인가. 한문으로 집필된 시나 소설, 수필류는 물론 한글과 한문이 섞여 있는 시조에 이르기까지, 한문을 통째로 덜어내고 나면 우리 문학은, 우리 가락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국문학 전공자라서가 아니라,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한문은 소중하다고 믿는다. 한문은 남의 나라에서 겉꼴만 빌려온 문자 표기법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보이지 않는 주춧돌이며 영혼의 모세혈관이다.

    우리 정신의 주춧돌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주장해도 아이들은 짜증을 낼 것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이 생겼다. 바로 한문으로 직조된 우리 문학이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을 주는지를 매번 깨닫게 해주는 정민 선생의 ‘우리 한시 삼백수’다.

    예민한 사람들은 제목에서부터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한시가 어떻게 우리 거야?’ ‘한시는 중국 거 아니야?’ 하지만 이 땅에서 ‘글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 쓴 한시를 모두 합치면 조선시대만 해도 엄청난 분량이 될 것이다. 이 땅에서 태어난 문인들이 쓴 한시는 분명 한문으로 기록되었지만, 분명히 한국문학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쓴 한시는 중국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잘 이해되고, 훨씬 깊은 울림을 줄 수밖에 없다. 문학은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것이지만, 그 보편성 자체도 지역성 혹은 토착성이라는 최초의 토양 위에서 발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다

    흰 머리의 어버이가 근심할까 염려되어,

    그늘진 산 쌓인 눈이 깊기가 천 길인데

    올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적었네.

    欲作家書說苦辛 恐敎愁殺白頭親

    陰山積雪深千丈 却報今冬暖似春

    -‘편지를 부치며’

    집 떠나 지내면 가장 서러울 때가 아플 때와 배고플 때, 그리고 추울 때다. 뭔가 고차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육체를 옥죄어올 때, 인간은 뼛속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당장의 추위와 배고픔,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하나만 있다면 그 설움이 위로될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시의 주인공은 어버이께 편지를 보내려 한다. 어머니, 여긴 눈이 너무 많이 와요. 춥고 외롭습니다. 하지만 백발이 성성한 어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나보다 더 힘든 이는 자식을 먼 곳에 떠나보낸 어버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편지를 쓴다. 어머니, 올겨울은 어찌 된 일인지 봄날처럼 따스하네요. 저는 이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냅니다. 응달져 더욱 추위가 매서운 산골에 푹푹 쌓인 눈을 바라보며, 자식은 자신의 추위와 설움보다 부모님의 근심, 걱정을 염려할 줄 안다. 사람은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철드는 최고의 방법은 부모와 떨어져 지내며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보는 것인가보다.

    蓮子와 憐子

    가을날 맑은 호수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두고.

    님 만나 물 저편에 연밥을 던지고는

    행여 남이 봤을까 봐 한참 부끄러웠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부끄러워’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의 절창, ‘채연곡(採蓮曲)’이다. 연꽃의 열매, 연밥을 따는 노래다. 연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호수 깊숙한 곳에 숨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여자가 있다. 나는 여기 있는데, 눈치 없는 내 님은 내가 있는 곳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다. 아직 조심스럽고, 아직 부끄러운 두 사람 사이. 그녀는 나 여기 있다고, 연밥을 하나 뚝 따서 조심스레 님 계신 쪽에 던진다. 연밥을 따서 님의 발치에 던지는 행위, 그것은 바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의 은유다. 이 시는 평역자의 해설로 더욱 빛을 발한다.

    “가을날 물 맑은 긴 호수에 벽옥의 강물이 넘실댄다. 연꽃은 피고 지고, 연잎은 키를 넘고, 연밥도 주렁주렁 매달렸다. 조그만 쪽닥배를 몰고 님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먼저 온 그녀는 부끄러워 연잎 속에 배를 매어두고 아까부터 숨어 있다. 이윽고 방죽 저편으로 님이 보이더니, 연잎 속에 숨은 나는 못 보고 자꾸 엄한 곳을 두리번거린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님의 발치에 작은 연밥을 하나 따서 던진다. 연자(蓮子)는 연밥을 말하지만, 음으로 읽으면 연자(憐子), 즉 ‘그대를 사랑해요!’가 된다. 그녀의 두 볼에 반나절 동안이나 홍조가 가시지 않았던 이유다.”

    연자(蓮子)와 연자(憐子)는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르니, 님은 그녀의 수줍은 몸짓에 어린 사랑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누가 그것을 보고 자신만의 은밀한 ‘사랑의 암호’를 알아챌까봐 두려웠다는 그녀의 고백은 읽는 이의 마음을 한껏 설레게 한다. 그래, 어느 시대에나 처음 시작되는 사랑은 이토록 수줍고 짜릿하고 해맑았구나.

    다정다감한 해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저절로 이해되는 한시도 많다. 정온의 ‘귀뚜라미’는 한달음에 읽어도 금방 시인의 진심이 만져진다. “밤새도록 귀뚤귀뚤 무슨 뜻이 있는가/맑은 가을 저절로 소리 냄이 기쁘도다/ 미물도 또한 능히 계절 따라 감응커늘/ 나는 아직 어리석어 때 기다려 우는구나” 밤새 쉬지 않고 울어대는 귀뚜라미는 가을의 서정을 자극한다. 겨울도 봄도 여름도 아닌 꼭 가을에 정확히 ‘제때’를 알고 우는 귀뚜라미처럼, 우리도 진정 울어야 할 때를 알고 때맞춰 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감성의 해방이고 영혼의 자유일 것이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고생스러운 백성의 삶은 친절한 설명 없이도 곧바로 폐부를 찌른다. 김약수의 ‘산새’를 읽으면 ‘근심 겨운 백성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목이 우거진 옛 시내에 와보니/집집마다 푸성귀로 배조차 못 불리네/ 산새는 근심 겨운 백성 맘도 모른 채/ 다만 그저 숲 속 향해 마음껏 노래하네.” 곡식은커녕 푸성귀로도 배를 채우지 못한 배고픈 백성은 힘차게 울어예는 산새들의 노랫소리조차 야속하다. 우리는 이토록 배가 고프고 힘겹고 희망이 없는데, 산새들은 무슨 기쁨에 겨워 저리도 신나게 지절대는 것일까.

    이렇듯 가슴 절절한 슬픔의 시가 있는가 하면, 그저 자연의 일거수일투족을 덩그러니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유머가 넘치는 시도 있다. 이인로의 ‘군밤’이 그렇다. “서리 뒤에 터진 밤톨 반짝반짝 빛나니/ 젖은 새벽 숲 사이엔 이슬 아니 말랐네/ 꼬맹이들 불러와 묵은 불씨 헤집자/ 옥 껍질 다 타더니 황금 탄환 터지누나” 밤 껍질이 다 타고나니 황금 탄환처럼 팍, 팍 터지는 밤 알갱이의 모양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희로애락애오욕

    나는 한시는커녕 한문에도 젬병이지만 이 책은 흥미진진하게, 게다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한시의 유려한 번역과 흥미로운 해설은 마치 현대시를 읽는 듯한 참신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읽다보면 ‘역시 한시는 우리 문학이기도 해!’라는 식의 자기만족을 뛰어넘어, ‘한시를 빼면 우리 문학이 얼마나 허전해지겠는가!’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게다가 수백 년 전의 주옥같은 시편들이 시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이토록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이 책에는 부모님께 안부 편지를 보내는 자식의 심정을 노래하는 일상적 이야기부터, 연인과 영영 이별해야 하는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는 수많은 이별의 시편은 물론, 서릿발 같은 지조와 정치적 신념을 지켜내는 지식인의 고뇌,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속세를 떠나 오직 자연만을 벗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봉인한 은둔자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희로애락애오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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