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길’은 1989년 김현식이 ‘신촌블루스’ 2집에 객원 보컬로 참여하며 대중에게 선보인 노래다. 유난히 음악과 술을 사랑했던 김현식, 그는 1990년 11월 서른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개척했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흘렀지만, 그의 노래는 지금도 꾸준히 전파를 탄다. 갈라지고 탁한, 거칠게 토해내는 듯한 특유의 음색이 돋보이는 ‘골목길’은 포크, 팝, 솔, 록, 블루스, 발라드, 펑크에 이르는 다채로운 사운드를 구사한 싱어 송 라이터 김현식이 레전드리 피겨(전설적 인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1958년생이니 안타깝게도 고작 서른을 조금 더 살다 갔다. 김광석과 마찬가지로 일찍 세상을 떠난, 이 거칠고 삐딱한 젊은 가객을 우리는 정녕 잊지 못한다. 그래서 김장훈, 김정민, JK김동욱, 김범수, 임재범, 싸이(Psy), 라디(Ra.D), 박효신, 바비킴, 김조한, 윤종신, 이은미 등 수많은 후배 가수가 그의 노래를 불렀고, 지금도 부른다.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병실에서 음악을 놓지 않고 끝까지 노래한 그다. 김.현.식.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땅 위에 가왕 조용필이 있다면 땅 밑에는 가객 김현식이 있다”라고. 이 경우 땅 밑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라는 의미가 된다.
김현식이 활동한 1980년대는 민주화가 완성된 시기다. 386세대가 시대의 주류로 진입했고 예전의 순수했던 운동이 언제부터인가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 교정엔 늘 운동권의 북소리,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고 김현식의 노래를 듣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곤 했다. 대중가요를 듣는 것이 사치로 치부되던 그런 시대, 상처 입은 짐승의 목소리로 세상의 모든 고독과 울분을 저 혼자 짊어진 것 같은 노래들이 그로부터 터져 나왔다. 저항적이고 불온한 그의 노래는 민주화 과정에서 상처가 많았던 386들을 위무했다. 김광석, 들국화와 더불어 김현식의 음악은 그런 의미를 지닌다.
‘땅 밑의 가객’ 김현식
알려진 대로 김현식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밴드부 활동을 하며 명지고등학교를 다녔으나 1975년 자퇴한 뒤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얻게 된다. 1982년에 결혼, 동부이촌동 공무원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린 그는 인근에 피자 가게를 열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결혼이 가져다준 행복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음악은 그를 평범한 일상에 놔두지 않았다. 아내 몰래 밤무대 활동을 시작해 우여곡절 끝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1987년 11월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다. 1988년 2월 삭발을 한 채 오른 재기 콘서트에서 용기를 얻고, 이후 ‘신촌블루스’ 멤버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며 라이브 무대의 황제쯤으로 인정받았다.
‘골목길’은 1989년 ‘신촌블루스’ 2집에 객원 보컬로 참여하며 대중에게 선보인 노래다. 그러나 유난히 음악과 술을 사랑했던 그는 1990년 11월 서른셋의 나이에 신혼의 둥지를 틀었던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또 하나의 명곡이 된 ‘내 사랑 내 곁에’는 사후 발표된 노래다.
이런저런 이유로 김현식은 1980년대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개척한 인물이자 종결자쯤으로 자리매김된다. 그 시절 그는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았어도 이미 언더그라운드의 황제였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흘렀지만 그의 노래는 꾸준히 전파를 탄다.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등은 자타가 공인하는 발라드 음악의 보석이다.
그런 가운데 등장한 노래가 바로 ‘골목길’이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로 시작되는 노래는 묘한 상상과 함께 사내들의 술자리에서, 대학생들의 동아리 모임에서,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를 끝내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밤늦은 귀가길에서 가만히 터져 나온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 수줍은 너의 얼굴이 창을 열고 볼 것만 같아 / 마음을 조이면서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 만나면 아무 말 못하고서 헤어지면 아쉬워 가슴 태우네 / 바보처럼 한마디 못하고서 뒤돌아가면서 후회를 하네 / (하략)”(신촌블루스 ‘골목길’, 1989, 서판석 작사, 엄인호 작곡)
고즈넉한 골목길 풍경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포효하듯 묘사했던 가객 김현식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노래다. 갈라지고 탁한, 거칠게 토해내는 듯한 특유의 음색이 돋보이는 ‘골목길’은 포크, 팝, 솔, 록, 블루스, 발라드, 펑크에 이르는 다채로운 사운드를 구사한 싱어 송 라이터 김현식이 이른바 레전드리 피겨(전설적 인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왜 골목길이 노래의 배경이 되었을까. 왜 그럴까. 사랑에 빠진 남녀가 만남 후 헤어지는 공간적인 무대는 도회의 경우 대개 골목길이 된다. 남자는 기회를 포착해 한번 포옹해본다든지 아니면 입술을 훔쳐볼 수 있는 절호의 공간인 셈이다. 물론 그러다가 여자친구의 부모에게 들켜 혼나기도 하겠지만, 골목길은 그런 장소다. 어쨌든 남자들에게 골목길은 이 같은 욕망의 공간이 된다. 묘한 상상을 하며 여자친구의 방 창밖을 서성이거나, 아니면 여자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골목길을 배경으로 한 노래가 끊임없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신촌 명물골목에 위치한 미네르바 다방. 대학로의 학림다방과 함께 1975년 개업 이래 오랜 세월을 간신히 견뎌오고 있다.
김현식과 신촌블루스
신촌로터리에 위치한 어느 결혼식장. 한때 장안의 선남선녀가 몰려들었던, 딕패밀리가 운영했던 나이트클럽 ‘우산속’이 있던 자리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데다 신촌에서 하숙 생활을 한 나는 지금도 실내장식이 엄청 기괴하고 퇴폐적 느낌이 풍겼던 술집 ‘레드 제플린’을 잊지 못한다. 지금의 명물골목 초입에 위치한 카페 ‘레드 제플린’은 ‘러시’와 함께 그 시절 히피의 아지트였다. 신촌 일대에서 카페나 소극장을 꾸려가던 낭만 히피들은 영업시간이 끝난 뒤인 새벽 2시쯤이면 ‘레드 제플린’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맥주를 마셨으며 누군가는 구석에 숨어 대마초를 돌려가며 피우던 혼돈스러운 주점이었다. 아래층에는 ‘감격시대’라는 또 다른 주점이 있었고 옆에는 ‘미선옥’이라는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외에 ‘크로스 아이’ ‘장밋빛 인생’ ‘판’ ‘레지스탕스’ ‘추바스코’ ‘섬’ ‘고박사 냉면’ 등등 1980년대 신촌을 주름잡았던 명소는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시절 신촌 일대를 방황하던 젊음이 또렷이 기억하는 글귀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지금은 없어진 카페 ‘섬’에 가면 볼 수 있었던 흰 광목천에 검은 묵필로 커다랗게 쓴 정현종의 시 ‘섬’이다.
1980년 문을 열어 자리를 서너 번 옮긴 끝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러시’는 그 시절 불량한(?) 대학생들이 가장 열광했던 록 카페였다. 엄동설한 러시에 몰려든 젊음들은 벽난로 가득 활활 타는 통나무 장작을 바라보며 떠나가는 청춘을 노래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연세춘추에 “신촌의 겨울은 러시 담 옆에 쌓여가는 장작더미에서 시작되며 그 장작이 사라질 때쯤이면 봄이 온 것을 안다”는 내용의 에세이를 기고한 적도 있다. 그런 술자리에서 가끔 전인권, 김현식, 남궁옥분, 정미조 등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뿐인가. 꽃다운 젊음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는 그 시절 신촌에서 곧잘 조우한 젊은 시인이었다. 신촌의 골목길은 그런 곳이다. 골목길 곳곳에는 숨은 술집이 있고 만화방이 있고‘장미여관’ ‘은하수 여관’이 있었다. 김현식의 ‘골목길’은 바로 그런 풍경을 고스란히 상상하게 해주는 마력을 지닌 노래다. 그의 노래에 등장하는 그 시절 신촌 골목길들은 이른바 1980년대 낭만 히피들의 ‘나와바리(영역)’였던 셈이다.
그래서 김현식, 신촌블루스의 무대는 신촌이 제격이라고 한다. 지난해 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응답하라 1994’도 ‘신촌 하숙’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의 서울 생활과 순정을 다루었다. 비록 김현식이 술로 외로움을 달래던 그 시절과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지만 1980년대 신촌의 풍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신촌은 신촌이다. 나도 그랬지만 신촌 하숙생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가까이 있는 이화여대생을 한번 꾀어보려는 음흉한 목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신촌 하숙집에는 이대생이 없었다. 그들은 여학생 전용 하숙집에 있거나 아니면 친척집에 기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386세대에게는 하숙집을 매개로 한 결혼도 많고 모임도 많다.
신촌구락부라는 모임도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면 “신촌 밤무대를 주름잡는 건달들의 모임”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나온다. 언뜻 들으면 무슨 조폭단체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1980년대 초입 대학 시절, 신촌 언덕배미, 같은 하숙방에서 나뒹굴던 나의 하숙집 친구들의 모임이다. 하기야 친구 부친상에 ‘신촌구락부’ 이름으로 조화를 보냈더니 그동안 괴롭히던 직장 상사가 “조직”의 일원인 줄 알고 놀라 고분고분해졌다는 실제 상황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름만 거창한, 하숙친구 모임일 뿐이다.
천박한 소비 문화의 각축장
요즘 세대에게는 생경하겠지만 하숙이란 말은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속옷 바꿔 입기는 보통이고, 고향에서 꿀이라도 올라오면 하루 밤 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지금의 세대가 소·돼지고기를 칭하던 육군, 달걀과 닭고기를 칭하던 공군, 생선을 칭하던 해군의 속뜻을 알기나 하겠는가. 모두가 곤고했던 시대, 반찬으로 육군을 요구하다 하숙집 아줌마에게 손이 닳도록 살살 빌고 쫓겨나지 않은 하숙집 풍경은 이제는 빛바랜 전설이 된 지 오래다.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이 없어’ 방황하던 김현식 시대의 신촌은 가고 없고 지금의 신촌은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다. 한때 이 땅에서 ‘젊음의 거리’ 또는 ‘해방구’쯤으로 인정되던 신촌은 2000년대 이후 홍대입구에 밀려 완연히 사양길이다. 신촌시장 자리에는 현대백화점이 우뚝 서 있고 그 많던 하숙집도 대부분 사라졌다. 독수리다방, 일명 ‘독다방’은 2005년에 문을 닫았다가 지난해 1월 인테리어를 새롭게 바꾸고 다시 문을 열었다.
이른바 신촌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 2000년대 이후 신촌은 더는 대학 문화가 숨 쉬는 공간이 아니다. 혼잡하고 몰개성한 거리로 천박한 소비문화의 천박한 각축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3050세대 ‘기쁜 우리 젊은 날’ 추억의 장소는 왜 항상 신촌이고 첫 키스는 왜 늘상 골목길에서만 이루어졌을까. 김현식의 노래에 그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