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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눈으로 본 북한

‘金氏왕조’보다 더 무장투쟁 정통성

北 ‘2인자’ 최룡해 혈통과 미래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金氏왕조’보다 더 무장투쟁 정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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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이은 ‘절대 충신’ 본보기

최룡해는 한동안 외부 분석가에게 여럿 중 하나(one of them)일 뿐이었다. 특별한 위상에 처음 주목한 언론은 ‘신동아’다. 김정일 사망 6개월 후 ‘최룡해 핵심 실세로 급부상…장성택보다 공식서열 앞서’ 제하의 정성장 세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의 기고문을 실었다.(2012년 6월호)

정성장 연구위원에 따르면 최룡해가 ‘당중앙위원회 위원’이라는 당내 중요 지위에 오른 것은 1986년 12월로 장성택보다 6년 앞선다. 36세 때 100명 안팎의 파워엘리트 그룹에 진입한 것. 장성택은 46세 때(199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됐다. 최룡해는 2010년 9월 개최된 제3차 당대표자회 때도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당중앙군사위원회 명단에서 장성택 앞에 호명됐다. 제3차 당대표자회 때 김정일을 제외하고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서국과 당중앙군사위원회 직위에 모두 선출된 것은 최룡해가 유일했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비서국, 군사위원회에 모두 선출된 인물은 김일성과 김정일뿐이었다. 최룡해는 NYT의 표현처럼 ‘떠오르는 스타’라기보다는 ‘항일 빨치산 가계 2세대 실력자’라는 게 적확해 보인다.

북한 매체에서 ‘백두혈통’이라는 낱말이 본격 등장한 때는 2009년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다. 백두혈통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가계를 가리킨다. 백두혈통에 버금가는 게 항일 빨치산 혁명 가계다.

2012년 4월 8일 ‘노동신문’은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과 관련한 기사를 실었다. ‘자기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몸에 배인 사람’이라면서 “주체혁명위업 계승을 위한 조직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당의 영도체계를 튼튼히 세우는 데서도 언제나 앞장섰고 견결하였다”고 썼다. 이튿날(4월 9일)은 최현 사망 3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북한 당국은 4월 10일 ‘최현 서거 30주년 중앙추모회’를 개최했다. 최룡해는 이날 차수 칭호를 받았다. 노동신문은 4월 11일 5면 전체를 할애해 중앙추모회 관련 기사를 실었다. 장성택 처형 직후인 지난해 12월 14일 노동신문에는 ‘우리는 김정은 동지밖에 모른다’는 제목의 정론이 실렸다. 정론은 ‘누가 감히 우리 수령님을’이란 대목을 언급하며 “어제 날 종파 나부랭이들의 숨통에 권총을 들이대고 불을 토했던 투사들의 외침소리는 결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말 놓고 지내

최현은 소련파, 연안파가 김일성에게 반기를 든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장에서 박창옥, 윤공흠, 서휘 등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고 “누가 감히 우리 수령님을”이라고 말했다. 최룡해가 12월 16일 충성맹세에서 언급한, “반당분자들을 가차없이 쏴죽이겠다고 추상같이 외치며 권총을 뽑아들었던 항일혁명투사”가 최현이다.

노동신문은 지난해 12월 20일엔 최현에 대해 “두 대전(항일투쟁과 6·25전쟁)의 초연탄우(硝煙彈雨)를 헤쳐온 감때사나운 백전노장”인데도 “젊으신 장군님(김정일)의 선군 영장다운 풍모와 위대성에 매혹돼 장군님을 모실 때면 천하가 발밑에 있는 듯 더없이 기뻐했다”고 묘사했다. 최현과 종파 나부랭이(소련파, 연안파)를 대치하면서 최룡해를 띄운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한 ‘잡것’(북한 매체는 “백두의 혈통이 흐르는 조선노동당에는 잡것이 섞일 틈이 없다”면서 장성택을 ‘잡것’에 비유했다)과 대척점에 선 ‘절대 충신’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백두혈통과 항일 빨치산 가계의 나라, 북한의 실세로 부상한 최룡해의 특별한 위상을 파악하려면 최현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현은 북한 연구자 사이에서 최룡해처럼 여럿 중 하나(one of them)일 뿐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항일 빨치산 연구는 터부시됐으며 이후에도 최현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은 없었다. 최룡해가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최현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고조됐다.

‘신동아’는 최근 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작성한 A4용지 40매 분량의 미공개 논문을 입수했다. 논문 제목은 ‘최현의 재조명’. 정부 당국의 의뢰를 받아 북한 사료 등을 바탕으로 최현을 탐구한 것이다.

이 논문의 결론은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은 김일성보다는 최현에게 있다”는 것이다. 김씨왕조(金氏王朝), 그러니까 김정은가(家)보다 최룡해가(家)가 항일무장투쟁에서만큼은 역할이 더 컸다는 얘기다. 결론 부분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백두혈통의 순수성을 지켜내려는 북한정권의 고투(苦鬪)는 성공적으로 관철되기 어려워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은 김일성보다는 최현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최룡해가 현 정권의 2인자 노릇을 하고 있다. 최룡해는 과연 아버지 최현처럼 정권에 대한 절대 충신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장성택의 처형에서 교훈을 얻어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인가?”

1907년 태어난 최현의 아버지는 독립군이었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동료 중 독립군 집안에서 태어난 이는 최현이 유일하다. 최룡해의 어머니인 최현의 부인 또한 항일 빨치산이었다. 문순보 연구위원의 미공개 논문 중에서 그간 알려지지 않은 사실만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는 논문에서 인용한 것)

*김일성과 최현의 업적만을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면 오히려 김일성의 심복이자 절대 충신이었던 최현의 투쟁사가 더욱더 무장투쟁의 역사로 정통성을 지닌 것이었다. 최현은 출신 성분부터 독립군 집안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반일, 항일사상을 체현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전투에 직접 지휘 또는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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