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명예’보다 ‘소신’ 택한 현대 경제학계의 양심

폴 크루그먼 美 프린스턴대 교수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4-04-21 14: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현존하는 경제학자 중 최고의 독설가’ ‘부시 정권의 영원한 저격수’ ‘참여형 지식인의 표상’….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에게 쏟아진 평가다. 그는 경제학자 중 최초로 뉴욕타임스(NYT)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감세 정책, 이라크 전쟁 등에 날선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2014년 2월 28일 폴 크루그먼(61)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의 블로그(krugman. blogs.nytimes.com)에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2015년 8월부터 뉴욕시립대(CUNY)에서 일할 것이다. 프린스턴이라는 최고의 대학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다. 분배와 정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다. 뉴욕타임스(NYT) 기고도 계속하겠다.”

    미국 예일대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박사 학위를 딴 후 예일, 스탠퍼드, MIT,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 등을 거쳐 프린스턴대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해온 크루그먼은 소위‘엄친아 중 엄친아’다. 또 프린스턴대는 경제학 분야에서 하버드대, 시카고대와 함께 독보적인 ‘빅3’로 꼽힌다. 일반 경제학자도 아니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교수를 하고 싶어 하는 프린스턴이라는 아이비리그 명문대를 떠나 한국의 전문대와 유사한 커뮤니티 칼리지인 뉴욕시립대로 옮긴다는 사실이 큰 화제가 된 이유다.

    게다가 거액의 연봉을 받고 사기업으로 옮기는 것도 아니고, 하버드나 예일처럼 프린스턴에 견줄만한 다른 명문대로 옮기는 것도 아니니 사람들의 놀라움은 더했다. ‘간판’과 ‘스펙’에 목숨 거는 나라가 아닌 미국 내에서도 이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크루그먼 교수가 새롭게 일할 뉴욕시립대의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는 소득, 부, 고용 등 사회 불평등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대학원 과정을 두고 있다. “현재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 수준이 대공황 직전인 1920년대 수준이다. 미국이 자랑해온 ‘중산층 신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해온 만큼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관심사인 분배 및 정의 문제를 더욱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재닛 고르닉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 소장은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인 크루그먼 교수가 우리 학교에 온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출 수 없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일각에서는 ‘부시 저격수’로 불릴 정도로 조지 W 부시 행정부 및 공화당의 감세, 규제 완화, 전비 지출 등에 날선 비판을 해온 그의 이력을 감안할 때 뉴욕시립대로의 이적은 예견된 행보였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크루그먼 교수는 상아탑에 갇혀 현학적인 고담준론을 즐기기보다는 현실의 부조리를 바꿔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다. 단순히 공화당과 보수주의 진영만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당도 예외는 없다. 크루그먼 교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원일 때부터 “실천 방안이 없는 당신의 비전과 정책은 공허하다”며 직격탄을 날려 화제를 모았다.



    평생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 그가 왜 분배 정의와 소득 불평등 연구에 집착하며 미국 주류 사회와 전쟁을 벌이고 있을까.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지치지 않고 미국 정치권과 월가 전체에 독설을 퍼붓는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 배경을 탐구해보자.

    ‘新무역이론’의 탄생 배경

    크루그먼은 1953년 미국 뉴욕 주 알바니에서 폴란드계 이민자 후손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1974년 예일대 경제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크루그먼은 1977년 불과 24세의 나이에 MIT에서 변동환율제도를 주제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고 2년 후 명문 MIT의 교수가 됐다. 그가 박사 과정 학생일 당시 지도교수였던 루디 돈부시 교수는 훗날 크루그먼에게 노벨상의 영예를 안긴 ‘신(新)무역이론’의 실마리를 제공해줬다. 크루그먼 또한 돈부시 교수를 ‘경제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고 칭송했다.

    크루그먼이 주창한 신무역이론(New Trade Theory)은 19세기 이후 국제무역이론에서 절대 진리로 여겼던 비교우위 이론의 허점을 보완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르도가 제시한 비교우위 이론은 ‘국가 간 무역이 발생하는 이유는 각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더 잘 만들 수 있는 상품이 있고, 이를 서로 교환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일본처럼 기술이 발달한 나라는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남미 칠레처럼 농산물이 풍부한 나라는 농산물을 싸게 생산해 서로 교환하므로 무역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현실의 무역이 반드시 비교우위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기술 수준이 비슷한 여러 나라가 기술 수준이 비슷한 동종 제품을 사고파는 거래가 훨씬 많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미국과 독일은 다 자동차 강국이지만 미국 소비자도 벤츠를 사고, 독일 소비자 또한 제너럴모터스(GM)나 포드를 산다. 왜 그럴까.

    크루그먼은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로 ‘규모의 경제’와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를 들었다. 생산 규모를 늘리면 상품을 만들어내는 비용이 줄어 가격 경쟁력이 생긴다. 그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선진국은 더 다양하고 많은 상품을 개발할 수 있고, 여러 나라에 수출할 수 있다. 소비자의 기호 또한 천차만별이기에 국산품과 수입품 중 자신이 선호하는 상품을 고르다보면 무역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신무역이론을 통해 국제무역 전문가로 급부상한 크루그먼은 1982~1983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도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공화당 비판자인 크루그먼의 첫 공직 생활이 공화당의 거두인 레이건 정권에서 이뤄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크루그먼은 1991년 38세의 나이로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는다. 미국 경제학회가 2년마다 독보적 업적을 남긴 40세 이하 경제학자에게 주는 이 상은 ‘예비노벨경제학상 후보가 받는 상’이라 불릴 정도다. 그 때문에 크루그먼 교수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아시아 외환위기 예측

    1994년 경제학자 크루그먼의 명성을 높이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그는 같은 해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11~12월호에 ‘아시아 기적의 신화(The Myth of Asian Miracles)’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 소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승승장구하고 있음에도 아시아 신흥국가의 경제성장이 곧 한계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잘 알려진 대로 경제성장의 3가지 요인은 노동, 자본, 기술이다. 크루그먼은 “아시아 국가의 경제성장은 기술 진보 없이 값싼 노동력과 정부 주도의 대규모 자본 투입으로만 이뤄졌기 때문에 성장 한계가 분명하며 조만간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일갈했다.

    대다수 경제학자가 아시아 신흥국을 ‘제2의 일본’이라 칭송하고 있을 때 등장한 그의 부정적 전망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결국 3년 후인 1997년 아시아 전역에 외환위기의 폭풍이 몰아쳤고 한국은 건국 이후 최초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한국 외환위기 당시 20%에 육박하는 살인적 고금리 등 IMF의 혹독한 구제금융 조건도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이 모두가 그가 창안해낸 신무역이론에 따른 분석의 결과였다.

    독설가로 명성을 날리다

    뛰어난 학문적 성과 못지않게 ‘독설’이 크루그먼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시점은 2000년 조지 부시 행정부 출범 때부터다. 그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시 정권이 벌인 연이은 전쟁과 막대한 재정 지출은 물론 감세, 규제 완화 등 친(親)기업 정책이 미국 사회의 건전성을 해치고 소득 불평등을 확대한다고 부시 정권을 맹공격했다.

    그는 대형 방위산업체, 네오콘 등 소수의 지지자에 둘러싸여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부시 행정부의 행태는 정권과 몇몇 재벌이 결탁한 ‘연고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및 정실 인사의 폐해로 금융위기를 겪은 아시아나 남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부시 정권의 거의 모든 정책이 ‘재앙’이라고도 일갈했다.

    특히 크루그먼은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연준) 의장 또한 부시 대통령 못지않은 책임이 있다며 그린스펀을 ‘부시의 맹목적 추종자’ ‘역대 최악의 연준 의장’이라고 둘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린스펀이 저금리 정책이라는 손쉬운 수단으로 경기 부양에 ‘올인’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그는 2005년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를 메워주던 외국인 투자 자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이것이 금융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고 예견했다.

    크루그먼의 직설적 언사에 불편함을 느낀 일부 경제학자들은 “그가 학문의 순수성을 왜곡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부시 정권과 공화당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는 그의 칼럼 또한 “명쾌하다”는 호평과 “균형감각을 잃었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영국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가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동시에 가장 미움 받는 칼럼니스트”라고 말한 이유다.

    하지만 아시아 외환위기 예견 때와 마찬가지로 부시 정권 및 그린스펀에 대한 그의 비판은 물론 금융위기 예측은 결국 사실로 드러났다. 미국은 2014년 현재까지도 부시 정권의 잔재인 막대한 쌍둥이 적자에 신음하고 있으며 금융위기의 후폭풍에서 완전히 헤어나지도 못해 연방정부 폐쇄(셧다운)라는 극단적 상황까지 맞은 바 있다. 재임 당시 ‘마에스트로’로 불리며 역대 연준 의장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그린스펀 전 의장 역시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평가받으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인기 없는 연준 의장으로 전락한 상태다.

    활발한 기고와 출간 등 크루그먼 교수의 저술 작업 또한 그의 명성에 날개를 달아줬다. 그는 현재까지 ‘통화와 위기’ ‘경제학의 향연’ ‘대폭로’ ‘불황 경제학’ ‘미래를 말하다’ ‘자유주의자들의 양심’ 등 20여 권의 베스트셀러와 200여 편의 논문을 썼다. NYT는 물론 ‘포춘’ ‘슬레이트’ 등 각종 언론에도 750여 편의 글을 기고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자신의 모든 저술을 홈페이지에 올리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부인 로빈 웰스 또한 경제학자이며 크루그먼과 몇 권의 경제학 교재를 공동 집필했다.

    ‘명예’보다 ‘소신’ 택한 현대 경제학계의 양심


    준비된 노벨상 후보의 수상

    2008년 10월 13일 아침 크루그먼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오늘 아침 내게 묘한 일이 벌어졌다”는 한 줄짜리 짤막한 문장을 올렸다. 바로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을 알리는 문구였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수상 이유로 “신무역이론을 통해 국제무역과 세계화의 영향을 설명했고 국제무역에 게임이론을 접목해 ‘전략적 무역’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또 이전에는 별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던 국제무역과 경제지리학 분야를 통합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밝혔다. 두세 명의 공동 수상이 관례로 굳어진 요즘 보기 드물게 단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점도 큰 화제였다. 그만큼 한림원이 크루그먼의 업적을 인정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크루그먼의 수상 시점이 전대미문의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이란 사실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정부 개입보다 시장의 자율성을 중시해온 소위 신자유주의학파(시카고 학파)는 1990년대 이후 노벨경제학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금융위기 발발 후 이들의 이론이 금융위기의 배후로 불리며 그 세가 상당 부분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시장에서의 정부 역할을 중시하는 신케인스 학파에 속하는 크루그먼 교수가 금융위기가 발발한 2008년 노벨상을 단독 수상했다는 점을 예사롭게 볼 수 없다.

    경제학자의 영역을 단순히 순수 학문 연구뿐 아니라 칼럼니스트, 사회운동가 등으로 확대한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동시에 열정적인 저술 활동 와중에도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학문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다른 경제학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크루그먼 교수는 수상 직후 NYT와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이날이 오리라는 예감은 하고 있었다”라는 너무나도 솔직한 소감을 밝혀 화제를 모았다. 다만 그 역시 “노벨상 수상 소식만을 평생 기다리고 사는 경제학자가 너무 많다. 마냥 수상을 기다리는 게 내 정신 건강에도 이롭지 않다고 생각해 그간 노벨상에 대해서는 일부러 아무런 생각을 않고 지내왔다. 영예로운 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지금 당장은 나에게 삶을 바꿔놓는 경험”이라며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노벨상 수상 직후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 회의에 참석한 그의 손에 ‘세계 제1의 경제학자’라는 문구가 새겨진 컵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도 한동안 화제가 됐다. 천하의 크루그먼이라도 노벨상 수상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 앞에서는 다소 유치한 면모를 보인 것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는 당시 NYT에 기고한 ‘폴 크루그먼을 기리며’라는 글을 통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중 크루그먼처럼 상을 받기도 전에 유명했던 경제학자는 없었다”며 그의 예견된 수상을 축하했다.

    양극화 해소 없는 미국 미래 암울

    크루그먼 교수가 바라보는 미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는 매우 암울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가 탄탄한 중산층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대부분의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로 크게 걱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집을 소유한 채 죽을 때까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고, 이것이 미국 번영의 근원이었다는 논리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보수주의자들이 급부상하면서 미국 사회의 평등을 지지하던 각종 제도가 무너졌고 상위 1%가 가진 부가 나머지 99%보다 많은 극단적 불평등 시대가 도래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는 게 크루그먼의 주장이다.

    그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 노동운동의 몰락이다. 1960년대 미국노동자 중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은 30%가 넘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이 비율은 11%로 뚝 떨어졌다. 노조의 몰락은 단순히 임금 수준의 전반적 저하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척도와 규범의 변화를 불러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최근 미국 정치권의 화두인 최저임금 인상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둘째, 기독교 근본주의의 급부상이다. 기독교 우파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공화당이 감세, 규제 철폐, 작은 정부를 부르짖으며 미국 사회를 좌지우지한다는 것. 선거 때마다 위력을 발휘하는 공화당 극우파 모임 ‘티파티’ 등이 대표적이다.

    과연 해법은 있을까. 크루그먼 교수는 은행의 부분 국유화 등을 포함한 정부의 강도 높은 금융권 개입, 의료보장제도를 포함한 사회복지제도 개혁을 거론한다. 하지만 오바마케어 도입 논란 이후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민주당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오는 데서 보듯 제도 개혁에는 극심한 반발과 진통이 따른다는 게 문제다.

    크루그먼 교수는 현재 미국 연준이 펼치는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 정책에도 분명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2014년 1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한 그는 “미국 연준과 유럽중앙은행(ECB)이 과도한 긴축 정책을 편다. 특히 미국 정부의 긴축재정 정책은 2013년 경제성장률을 1.5~2.0%포인트 떨어뜨렸다. 미국 경제는 아직 경기부양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미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 불황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미국 경제가 과거 평균 성장 추세에 여전히 크게 못 미치기 때문이다. 크루그먼은 “2009년 이후 4년째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2%에 못 미치는 저성장 국면이 이어지고 높은 실업률에 따른 민간 소비 현상이 여전하다”며 통화완화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0년대는 고금리 때문에 소비가 둔화된 측면이 있었지만 현재는 저금리에도 소비가 늘지 않으며 이는 미국 경제가 부진에서 벗어나는 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멍청한 ‘자기파괴적’ 정부 정책이 사라져야 미국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현재로선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이 맞을지 연준의 행보가 맞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리 그가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라 해도 공직에 몸담지 않은 일개 자연인인 그의 주장이 정책 집행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분명한 건 그의 독설엔 성역이 없으며 그가 한 말 중 꽤 많은 부분이 훗날 맞아떨어졌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 워싱턴의 유력 정치인, 월가 황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결제은행(BIS)의 고위 관료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그가 경제학자 겸 칼럼니스트로서의 열정을 오랫동안 불태워주기를 바라는 이유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