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폭력·사기·살인 수배자 도피처 카지노·마약에 망가진 노숙자 수백 명

필리핀의 ‘어글리 코리안’

  • 필리핀 세부·마닐라=한상진 기자 │ greenfish@donga.com

    입력2014-04-23 0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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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피살자 지난해 13명, 올해 4명
    • 강도살인범 집에서 나온 여행용 가방 30여 개
    • 8년째 노숙 50대 한국인 “어머니가 보고 싶다”
    • 조양은 모친상에 문상 온 정치인·기자·경찰
    폭력·사기·살인 수배자 도피처 카지노·마약에 망가진 노숙자 수백 명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마닐라베이공원에서 만난 한국인 노숙자 이창후(50·가명) 씨와 그가 쓴 편지.

    필리핀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여대생이 피살된 채 발견됐다. 괴한들에게 납치된 지 한 달여 만이다. 현지 경찰에 붙잡힌 납치범 중 한 명은 살해 동기를 묻는 질문에 “한국인이고 젊고 예뻐 돈이 많은 줄 알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3월에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 인근의 휴양도시 앙헬레스에서 한인회 간부가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보다 몇 개월 전엔 마닐라의 대표적인 유흥가 말라테 지역의 한 공원에서 30대 한국인 가이드가 역시 총을 맞고 사망했다. 한 교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보복살인이었다. 죽은 가이드가 돈을 달라고 쫓아오는 어린아이를 몇 대 때린 모양인데, 그 아이의 부모가 따라가 총을 쐈다고 한다.”

    지난 한 해 필리핀에선 13명의 한국인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올해만 벌써 4명째다.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한인 대상 범죄는 대부분 관광객의 금품을 노린 것이거나 원한에 의한 범행이라고 현지 교민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범인이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아 구체적인 살해 동기는 확인하기 어렵다. 세부의 한 교민은 “일반 관광객이 현지인에게 당하는 범죄 피해는 대부분 절도다. 살인은 드물다.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한국인 피살사건 대부분은 청부살인으로 파악된다. 여기는 한국 돈으로 50만 원 정도만 주면 청부살인을 할 수 있는 곳이다. 10대 초중반의 어린아이가 오토바이로 접근해 총격을 가하고 사라지는 식이라 범인을 잡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교민은 “유흥가에서 현지인과 시비를 벌이다 살해당한 관광객이 많았다. 카지노와 유흥문화가 발달한 나라여서 범죄에 노출되기가 쉽다. 돈 자랑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다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체포돼 한국으로 압송된 살인범 최세용 사건은 한국과 필리핀 현지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최씨는 2007년 안양에서 환전소 여직원을 살해하고 2억 원가량을 빼앗은 뒤 필리핀으로 도주한 바 있다.

    문제는 최씨 일당이 필리핀에서도 여러 건의 납치강도와 살인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10여 건의 납치 강도, 살인이 확인됐다. 특히 최씨 일당은 2011년 9월 관광차 필리핀을 찾은 30대 회사원 홍모 씨를 납치 살해한 후 콘크리트 더미 속에 사체를 유기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홍씨의 시신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필리핀 경찰이 최씨 일당의 필리핀 은신처를 덮쳤을 당시 그들의 집에서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여행용 가방이 30여 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주인의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어 여죄를 밝히지 못했다. 필리핀 한인총연합회 관계자는 “최세용 일당의 범죄는 교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한국인을 상대로 한 좀도둑이나 강도는 종종 있었지만, 여러 명을 납치하고 살해한 범죄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씨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여행용 가방이 30개가 넘는다면, 최소한 그만큼의 사람들이 피해를 봤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한인총연합회 홈페이지에는 실종된 사람을 찾는 글 10여 개가 올라와 있다. 필리핀 한국대사관의 요청으로 한인연합회가 올려놓은 것이다. 지난해 1월 필리핀에 입국한 직후 실종된 김모(32· 여) 씨, 2012년 4월 사업차 필리핀을 방문했다 연락이 끊긴 이모(35·남) 씨, 2012년 9월 마닐라 소재 의류업체에 근무하다 실종된 박모(24·남) 씨, 2011년 3월 인터넷 관련 사업을 위해 필리핀에 들어간 직후 연락이 끊긴 조모(48·남) 씨 등이다. 동생을 찾는다는 한 실종자 가족은 “스스로 사라질 이유가 없다. 생사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종 사실을 알린 뒤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지만 별 도움이 안 됐다”고 말했다.

    범죄 가해자를 찾는 고발 글이나 경찰의 수배전단도 잔뜩 올라와 있다. 주로 필리핀 현지나 한국에서 금전 관련 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사람들이다. 인터넷 상품권 사기로 50억 원이 넘는 돈을 갈취한 뒤 도주한 박OO 씨, 2008년 서울에서 부동산 재력가를 납치, 필로폰을 강제로 투약한 뒤 78억 원가량을 갈취하는 등 범죄 행위를 해 공개 수배된 김OO 씨, 필리핀 세부와 마닐라 지역에서 교민을 상대로 투자 사기를 저지른 정OO 씨 등이다.

    범죄자들의 ‘은신 1번지’

    당연한 얘기지만, 필리핀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한 범죄는 주로 유흥가에서 벌어진다. 수도인 마닐라의 경우 카지노와 유흥가가 밀집한 말라테 지역이 주요 범죄 발생 지역이다. 오랫동안 살아온 교민들조차 “밤에는 혼자 다니기 무섭다”고 말하는 곳. 이곳엔 KTV(일종의 단란주점), 마사지숍이 즐비하고 길거리 성매매가 성행한다.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술집도 60여 곳이나 된다. 문제는 이런 우범지역을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찾는다는 점이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카지노 중 하나인 하얏트 호텔 카지노도 주변에 있어 한국인들의 출입이 더 잦다.

    기자는 3월 초 말라테 지역을 취재했다. 밤이 되면서 본격적인 유흥가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거리에 사람이 넘쳐났다. 몸을 파는 여성이 길거리를 메웠고 불량해 보이는 남자와 거지가 쏟아져 나왔다. 성매매가 이뤄지는 술집 주변에는 주로 남녀가 뒤엉켰다.

    기자는 성매매가 이뤄지는 곳으로 유명한 LA카페라는 이름의 술집을 찾았다. 이곳은 인터넷 사이트에도 관광객의 ‘후기’가 넘쳐날 만큼 유명한 곳이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몸을 파는 여성과 성을 사려는 남자로 술집은 인산인해였다. 남자보다 여자의 수가 몇 배는 많아 보였다.

    술집 곳곳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말로 자신의 몸값을 흥정하는 여성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찾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보통 2000~3000페소(5만~7만 원)에 젊은 여성의 하룻밤 성이 사고 팔린다. 한 필리핀 여성은 “한국 남자는 매너 좋고 돈을 잘 써 인기가 좋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기자와 동행한 한 교민은 “요즘은 많이 줄었다. 1~2년 전만 해도 이 술집을 찾는 남자 3명 중 한 명이 한국인일 정도였다”고 말했다.

    필리핀은 어느 도시에 가든 카지노가 즐비하다. 카지노만을 목적으로 필리핀을 찾는 한국인도 많다. 필리핀 카지노에서 고액 베팅을 즐기는 VIP 손님은 중국인 아니면 한국인이다. 필리핀 정부가 운영하는 카지노 회사 파코(parcor)에 등록된 한국인 에이전트만 500~6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중국인보다 한국인 에이전트가 많다. 참고로, 카지노 에이전트는 갬블러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한 대가로 카지노에서 고객이 쓴 게임비의 일정 비율(일명 롤링비)을 받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필리핀에서 발생하는 상당수 사건사고가 카지노를 중심으로 벌어진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죄를 저지르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많은 한국인 범죄자가 카지노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생태계를 만들어 생활한다. 한국 외교부 등에 따르면, 현재 필리핀으로 도주한 범죄자만 3000명 정도에 달한다. 대부분 폭력, 강도, 살인 등 강력범죄다. 필리핀 마닐라에 본부들 둔 교민보호단체 ‘필112’의 이동활 대표는 “필리핀 카지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의 폭력조직 수만 20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돼 한국 검찰에 압송된 50대의 이모 씨는 마닐라 하얏트 카지노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폭력조직의 두목이었다. 마닐라 한인회의 간부를 지내기도 한 그는 카지노를 중심으로 한국인 폭력조직을 운영하면서 많은 범죄 행위를 했다. 한국인 관광객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했고 살인에도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를 수사한 검찰 관계자의 얘기다.

    “이씨의 경우 공범들이 이미 체포돼 7년 정도의 실형을 받은 상태였다. 주범인 이씨를 검거하는 것이 급했다. 한국에서 저지른 사건도 많지만, 그보다는 필리핀에서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벌인 범죄가 많아 두고 볼 수 없었다.”

    과거 폭력조직의 대부로 통했던 조양은 씨도 2년이 넘는 도피생활의 대부분을 필리핀의 여러 카지노에서 지내다 지난해 12월 체포됐다. 조씨는 저축은행에서 수십억 원대의 사기대출을 일으켜 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검찰 조사를 받던 중 2011년 6월 중국을 거쳐 필리핀으로 도주한 바 있다. 그 역시 앞서 소개한 이모 씨처럼 카지노에서 각종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기자는 필리핀 현지를 취재하면서 조씨의 필리핀 도피생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조양은의 위세

    최근 보도에 따르면, 조씨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변호사 선임에도 애를 먹는 모양이다. 그러나 기자가 필리핀 현지에서 확인한 것은 이런 소문과 상당히 달랐다. 조씨가 필리핀에 들어간 건 도피 직후인 2011년 8~9월이다. 그는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 세부에 자리를 잡았다. 세부에 머물 당시 그는 최고급 휴양시설로 꼽히는 크림슨리조트의 스위트룸에 3개월 넘게 머물렀다. 폭력조직 선후배 5~6명이 그와 함께했다. 당시 조씨를 여러 번 만난 한 사업가는 “필리핀 전역에서 한국 조폭들이 조 회장에게 인사를 왔다. 조씨가 건달들을 모아 이런저런 모임을 주도했다. 나도 3~4번 불려나갔다”고 말했다.

    2012년경부터 조씨는 주로 마닐라, 휴양도시 앙헬레스 등을 오가며 지냈다고 한다.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조씨 일행은 여러 번 범죄행위를 했다. 주로 카지노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폭력, 갈취를 일삼는 식이었다. 조씨가 체포되기 전날 마닐라의 한 카지노에서 그를 만났다는 한 한국인 에이전트는 이렇게 말했다.

    “조씨가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나쁜 짓을 한다는 말이 계속 들렸다. 잡혀간 뒤에 들어보니 한번은 필리핀에 놀러온 한국인 노부부를 협박해 1억 원가량을 갈취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마도 그분들이 한국에 돌아가 조씨를 고소해 한국 경찰이 움직인 게 아닌가 싶다. 체포되기 전날 저녁 조씨는 내가 일하는 카지노에 왔었다. 한쪽에 앉아 조용히 머신게임을 하다가 차 한 잔을 하고 나갔다. 운전하는 동생을 데리고 왔던 것 같다.”

    지인들에 따르면, 조씨는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모친과 함께 생활했다. 2012년 필리핀으로 건너온 조씨의 모친은 지난해 가을 현지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앙헬레스에서 치른 조씨의 모친상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찾아온 문상객도 많았다고 한다. 조씨 주변인사들은 “선후배 건달들, 조씨와 평소 친분이 있던 정치인, 언론인, 경찰 관계자도 여러 명이었다”고 전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조씨의 지인은 “경찰 관계자도 찾아와 조문을 했다. 조씨의 귀국 문제로 심각한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음만 먹으면 조씨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조문만 하고 조용히 돌아갔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조씨의 체포 소식은 국내에서 큰 뉴스로 다뤄졌다. 그의 입국 장면이 생중계될 정도였다. 그런데 조씨가 체포된 뒤 필리핀 한국영사관 관계자 Q씨가 조씨 사건과 관련, 국내로 송환돼 조사를 받은 사실이 최근 취재과정에서 확인됐다. 필리핀 현지에서는 그가 조씨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금품과 향응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조씨의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Q씨가 양은이 형님하고 자주 만나고 가깝게 지낸 건 여기 사람들이 다 안다. 동향이어서 그런지 많이 도와줬다. 자주 만나 밥 먹고 술 먹고 그랬다.”

    Q씨는 보름가량 국내에 들어와 조사를 받은 뒤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영사관 업무에서 손을 뗀 것으로 전해진다. 한 현지 교민은 “원래 세부에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조사를 받고 온 뒤부터는 마닐라로 옮겼다. 조만간 귀국하는 걸로 안다. 조씨 사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사를 받고 온 뒤부터 업무를 보지 않았다. Q씨가 조씨에게 1만 달러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Q씨의 해명을 듣고자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범죄자들은 필리핀으로 모여드는 것일까.

    현지 교민들과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그 이유를 대략 두 가지로 꼽는다. 첫째, 한국과 가장 가까운 영어권 국가라는 점이다.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태국 같은 동남아 국가와 달리 영어권 국가라 생활하기가 편한 게 큰 이유라는 것이다. 한 교민은 “아무리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Yes, No, Okay는 안다. 건달들도 금방 적응한다”고 말했다. 수천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여서 숨을 곳이 많다는 것도 이유다. 실제로 한국에서 범죄를 일으키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한국인 상당수가 필리핀 현지인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 그들과 같이 생활하며 은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가는 물론이고 여성의 몸값이 싸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폭력·사기·살인 수배자 도피처 카지노·마약에 망가진 노숙자 수백 명

    다수의 한국인 노숙자들이 생활하는 마닐라베이 공원.

    거리 노숙, 카지노 노숙

    마닐라 지역에서 취재를 하는 동안 기자는 현지 교민들을 통해 필리핀 마닐라에 한국인 노숙자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로 말라테 인근에 있는 마닐라 베이 공원에서 노숙을 하거나 카지노 주변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한인연합회 관계자는 “한국인 노숙자가 수백 명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민들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한국인은 대부분 관광이나 사업을 목적으로 필리핀에 입국했다 눌러앉은 사람들이다. 카지노, 여자, 마약에 손을 댄 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는 것.

    기자는 한국인 노숙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자정 무렵 마닐라 베이를 찾았다. 길이 2km가량 되는 마닐라베이 공원에는 잠을 자는 노숙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30여 분을 찾아 헤맨 끝에 8년째 노숙을 한다는 한 50대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름은 이창후(50·가명), 고향은 춘천이라고 했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 체육학과를 나와 IMF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경 사업차 필리핀을 처음 방문했다는 그는 도박에 손을 댔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돈이 많았다. VIP룸 바카라 테이블에서 한 판에 1만 달러씩 베팅을 했다. 그러다 돈을 다 잃고 가이드 생활을 했다. 돈을 벌면 또 카지노로 가고, 마약에도 손을 대고, 그러다 보니 10여 년 만에 이렇게 됐다. 필리핀 거지들한테 밥 얻어먹으며 산다. 가족들과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기자가 보기에 이씨의 몸무게는 50kg도 안 돼 보였다. 마약 중독이 심한 것 같았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이렇게 살아야지, 갈 곳도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대화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에게 자신이 쓴 글이라며 편지 몇 장을 보여줬다. 편지의 제목은 ‘나의 역마살’.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지난 세월을 후회하는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문구가 여러 번 등장했다.

    마닐라 베이 인근 말라테 지역의 교민들에게 이씨에 대해 물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했다. 말라테 지역에서 유명 한식당을 운영하는 김OO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씨가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부터 쭉 봐왔다. 건강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카지노에 손을 대고 여자에 빠져 지내다 저렇게 됐다. 마약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다. 밥을 사 먹으라고 돈을 주면 그걸로 마약을 사니 돈을 줄 수도 없다. 여기선 200페소(약 4600원)만 주면 필로폰을 살 수 있다. 이씨는 ‘200페소로 밥을 사 먹으면 하루밖에 못 먹지만, 마약을 맞으면 3일은 밥을 안 먹고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마닐라엔 이씨 같은 사람이 많다.”

    폭력·사기·살인 수배자 도피처 카지노·마약에 망가진 노숙자 수백 명

    필리핀 마닐라의 대표적인 유흥가인 말라테 지역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 카지노.

    노숙자 쉼터 절실

    마닐라에는 현재 한국인 노숙자를 위한 쉼터가 4년째 운영되고 있다. 교민보호단체인 ‘필112’가 만든 시설이다. 이동활 대표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이 쉼터를 거쳐간 사람은 76명에 달한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이들도 대부분 사업이나 관광을 목적으로 필리핀을 방문했다 노숙자로 전락했다. 이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인 노숙자가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필리핀이 유일할 것이다. 카지노에서 돈을 다 날리고 노숙자가 된 사람, 사업을 하려고 왔다가 노숙자가 된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기업 임원 출신, 퇴직금을 가지고 사업을 하려던 전직 공무원 등 다양한 사람을 봤다. 4년 전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국인 노숙자를 발견한 뒤 충격을 받아 쉼터를 만들게 됐다.”

    노숙자 문제는 현지 교민들에게도 큰 고민거리다. 노숙자가 늘면서 교민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속출하기 때문. 필리핀 한인총연합회도 대사관이나 필리핀에 진출한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인 노숙자를 위한 시설을 건립해줄 것을 호소한다. 장형준 한인총연합회 부회장은 “마닐라에만 한국인 노숙자가 수백 명이다. 풍찬노숙은 아니어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형편이 안 돼 카지노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헤아리기도 어렵다.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이들이 제2, 제3의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 교민들로서는 가장 두려운 일이다. 대사관에서 쉼터 건립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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