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내 축구 인생은 최강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35세 國代 이동국

  •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입력2014-10-21 14:0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겹 쌍둥이 아빠… 11월 다섯째 출산
    • “군인의 본분 체험케 한 은인 영표 형”
    • “정환이 형이 축구한 것은 시간 낭비”
    • “해외 진출 실패? 돈 받고 ‘유학’한 것”
    “내 축구 인생은 최강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새로운 사령탑 울리 슈틸리케(60·독일) 감독이 9월 29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파라과이(10월 10일), 코스타리카(10월 14일)와의 평가전에 나설 대표팀 명단을 발표하는 날, 가장 관심을 모은 선수가 이동국(35·전북 현대)이다.

    ‘홍명보호’로 명명된 올해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에서는 외면을 받았고, 대표팀 감독이 공석인 상황에서 신태용 코치 체제로 치른 9월 평가전에서 다시 태극 마크를 달았지만, 과연 외국인 감독이 선발한 대표팀 명단에 이름이 오를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슈틸리케 1호’에 이동국을 승선시켰다. 명단 발표 후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를 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26세부터 32세지만, 35세의 이동국을 선발한 것은 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또 “대표팀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내년 1월 아시안컵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을 대비하는 것”이라며 “사실 베테랑 선수는 3∼4년 후 (월드컵에 출전하기엔) 힘들 수도 있으나 경험과 노하우를 어린 선수에 전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나이가 많다는 이유와 ‘국내용’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대표팀 선발 때마다 논란의 대상이 됐던 이동국으로선 슈틸리케 감독의 인터뷰 내용에 깊은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79년생으로 올해 나이 35세. 그러나 그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올 시즌에도 프로축구 K리그 득점(11골)·도움(6도움) 부문에서 1위를 달리고, 후배들과의 거친 몸싸움에서 좀처럼 밀리지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축구선수의 진가를 발휘하는 이동국을 전북 완주군 봉동읍에 위치한 전북 현대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다.

    나이를 잊게 하는 공간



    이동국이 인터뷰 때마다 ‘지겹도록’ 받는 질문이 있다. 대표팀 은퇴 여부가 그것이다. 물론 슈틸리케 감독이 이동국을 대표팀 명단에 올리며 베테랑의 역할을 강조한 만큼 적어도 슈틸리케 감독이 지휘봉을 잡는 대표팀에서는 이동국의 은퇴 여부가 화제가 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평소 인터뷰 때마다 단골 메뉴로 나오는 대표팀 은퇴에 대한 이동국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었다.

    ▼ 대표팀 은퇴가 단골 레퍼토리처럼 인터뷰에 등장한다. 이젠 지겨울 듯도 싶다.

    “처음에는 이런 질문이 불편했다. 은퇴는 기자가, 팬이 정하는 게 아니라 선수가 고민해 결정하는 문제다. 그런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참들한테 은퇴 얘기를 쉽게 꺼낸다. 이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대표팀은 은퇴의 대상이 아니다. 난 스스로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선후배들이 공식적으로 대표팀 은퇴를 발표한 것을 지켜봤지만, 난 그걸(대표팀 은퇴를) 굳이 선수가 먼저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없으면 뽑히지 못하는 데가 대표팀이다.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선수가 대표팀 은퇴를 먼저 발표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 그래서 한 인터뷰에서 “대표팀은 내 나이를 잊게 하는 공간”이라 했나.

    “그라운드에서는 양 팀 선수들이 계급장 떼고 승부를 낸다. 그 안에서는 선후배도 없고, 학연, 지연도 없다. 오로지 실력으로만 승부를 겨룰 뿐이다. 무엇보다 그라운드에서는 내 나이를 잊을 수 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사회 친구들보다 내가 훨씬 더 젊어 보인다고 하더라.(웃음) 아이가 다섯 명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 까무러친다.”

    ▼ 슈틸리케 감독이 대표팀 새 사령탑으로 임명됐다. 전임자이던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이동국 선수를 제외했기 때문에 과연 새 감독은 이동국 선수를 뽑을지에 관심이 쏠렸다.

    “언론이나 일부 팬은 내가 홍명보 감독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다. 내가 그분에게 도움을 받으면 받았지, 대표팀에 발탁되지 않았다고 해서 기분 나쁠 게 뭐가 있겠나.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과 인연 맺지 못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난 그 당시 홍 감독의 결정을 존중했다. 감정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 지난 일에 연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이젠 새로운 출발이다. 대표팀을 이끌어나갈 슈틸리케 감독은 침체한 대표팀의 분위기를 잘 살릴 지도자라고 본다. 코칭스태프부터 훈련 방식, 대표팀 내 생활 등 모든 면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할 것”

    이동국은 2009년 1월 10일, 미드필더 김상식과 함께 성남 일화에서 전북 현대로 트레이드됐다. 성남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터라 당시 언론에서는 두 ‘노장’을 데려간 최강희 감독을 향해 ‘지나친 모험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동국은 그해 29경기 20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전북 현대는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동국은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생애 처음으로 MVP와 베스트11, 득점상을 수상했다. 또한 팬 투표를 통해 ‘팬타스틱 플레이어(FAN-tastic Player)’로도 뽑혔다. 당시 이동국의 수상이 더욱 크게 와 닿은 것은 그의 굴곡 많은 축구 인생 때문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선수가 불과 1년 만에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 잉글랜드 리그 미들즈브러에서 성남 일화로 복귀할 때 구단과 1년 5개월의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다.

    “어찌 보면 내 축구 인생은 최강희 감독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미들즈브러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후 국내 무대로 복귀했을 때는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성남에선 내가 예상한 만큼의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위축됐고, 결국 ‘퇴물’ 취급받으며 벤치에 머무르다 ‘다른 팀을 알아보라’는 구단의 얘기를 전해 들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때 내게 손을 내밀어준 분이 최강희 감독님이다. 감독님께서 내 소식을 듣고 영입 제안을 하려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 당시만 해도 전북 현대는 선수들 사이에서 지금처럼 매력 있는 팀이 아니었다. 클럽하우스도 없었고, 지방 구단인 데다 우승 전력을 갖추지 못한 팀이라 대부분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점이 마음에 걸리진 않았나.

    “그때는 전북의 팀 환경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당장 뛸 수 있는 팀을 알아봐야 했다. 물론 다른 팀의 제안도 있었지만, 최 감독님이 보인 진심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감독님이 해주신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다시 선수로 뛸 수 있게끔 만들어주고 싶다. 경기장에서 더 이상 뛰기 힘들다고 손을 들 때까지 뛰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남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하며 90분 풀타임 출전에 대한 갈증이 있던 나로선 최 감독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동국은 전북 현대 입단 후 곧장 일본 전지훈련에 합류했다. 전지훈련 중 일본 클럽 팀과 여덟 차례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단 한 골도 터뜨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최강희 감독은 이동국을 주전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매 경기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 그 후 정규시즌이 시작됐고, 최 감독의 약속은 변함이 없었다. 이동국이 공격수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해도 계속 주전으로 내보냈다. 그때 이동국은 이런 결심을 굳혔다. ‘앞으로 난 이분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할 것’이라고.

    성남 일화에서 상처만 안고 나온 이동국에게 최강희 감독은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실수를 해도, 나락에 떨어져도 한없이 기다려주고 믿어주는 아버지 같은 존재 말이다. 결국 이동국은 전북 현대로 이적한 첫해 K리그 득점왕과 MVP에 오르며 성적으로 최 감독에게 보답했다. 당시 최 감독은 “처음에 동국이를 영입할 때만 해도 구단이나 전북 팬은 ‘감독이 미친 거 아니냐’며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난 동국이를 굳게 믿었다. 누구보다 재기 의지가 강했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재기를 확신했다”고 말한 바 있다.

    돈을 좇기보다 돈이 따라오게

    전북 현대와 재계약을 앞둔 2011년 11월, 이동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클럽으로부터 40억 원 넘는 몸값을 제시받는다. 그러나 이동국은 제안을 거절하고 전북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을 구해준 최 감독에 대한 의리 때문이다.

    ▼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나. 물론 전북과 고액 연봉 재계약을 맺었지만, 외국 팀의 오퍼와는 금액 차이가 아주 컸다.

    “돈을 좇아가기보단 돈이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다. 돈에 얽매이다보면 내가 할 일을 놓치게 되고, 돈 때문에 축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었다. 특히 최강희 감독님과 더 오래 인연을 맺고 싶었다. 주위에서 반대했는데도 전북과 재계약을 하고 나니 감독님이 대표팀으로 가버리시더라.(웃음)”

    최강희 감독은 조광래 감독의 대표팀 사퇴로 인해 갑자기 대표팀 감독으로 ‘차출’돼 1년 6개월간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성남 일화에서 방출되다시피 했을 때 사령탑이 신태용 전 감독이었다. 그런데 그를 ‘슈틸리케호’(현 대표팀 코치)에서 다시 만났다. 슈틸리케 감독이 오기 전 신태용 전 감독이 대표팀의 임시 사령탑을 맡았는데, 이동국 선수를 선발해 A매치 경기를 치렀다. 그 경기에서 A매치 100경기 출전을 달성, 센추리클럽에 가입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인연이다.

    “베네수엘라와의 친선경기에서 2골도 기록했다.(웃음) 신태용 감독이 비록 임시였지만, 대표팀을 맡아 나를 선발해주셨고, 그 경기에서 축구 인생에 기록으로 남을 만한 센추리클럽에 가입했다. 신 감독님, 아니 코치님께서 내게 오해를 풀라고 하셨다. 성남 일화에서 날 내보낼 때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구단의 결정이었고, 자신은 ‘초짜’ 감독이라 구단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이동국을 내보낸 것처럼 알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하셨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다. 나로선 오히려 성남의 그 결정 때문에 지금까지 선수생활을 오랫동안 이어가고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만약 그곳에 계속 남았다면 일찍 은퇴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남 일화에는 전혀 감정이 없다.”

    “내 축구 인생은 최강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내 축구 인생은 최강희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9월 5일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베네수엘라와의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2-1로 앞선 후반 17분 자신의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킨 뒤 기뻐하는 이동국.

    ▼ 1998년 5월 16일 자메이카와의 평가전에서 후반 34분 황선홍 선수 대신 투입되면서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경기를 뛰었다. 그로부터 5957일 만에 1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이동국에게 센추리클럽 가입은 어떤 의미인가.

    “브라질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을 때, 최강희 감독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 ‘내가 널 이란 전에 데리고 갔더라면 이미 100경기 출전을 했을 텐데’라고. A매치 출전 기록이 ‘99’에서 멈춘 걸 상당히 안타까워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100이란 숫자를 채웠고, 그 경기에서 2골을 터뜨렸으니 감독님이 얼마나 기뻐했겠나. 나로선 감독님의 부담을 덜어드렸고, 기쁨까지 선물했으니 충분히 만족한다. 만약 센추리클럽 가입을 위해 경기 수를 채우는 데 급급했다면 100경기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5957일 만에 100경기를 채웠다는 데 대해 ‘느낌표’가 생겼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오랜 시간이 걸려 도달한 만큼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이동국은 운이 좋다?!

    결정적인 순간 부상을 당하면서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고, 대표팀에 뽑힐 때마다 논란거리를 양산했지만, 이동국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 이동국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힘든 일을 워낙 많이 겪지 않았나.

    “그렇지 않다. 난 타이밍을 잘 잡고 태어난 듯하다. 1998년 포항에 입단했을 때, 마침 (황)선홍이 형, 아니 황 감독님이 일본으로 이적하는 바람에 데뷔 첫해부터 선발로 뛸 수 있었다. 만약 선홍이 형이 포항에 계속 남았더라면 그해 신인왕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해외 진출을 ‘흑역사’라고 말하는 분이 계신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은 돈 내고 가는 유학을 난 돈을 받으면서 한 셈이다. 독일 유학 6개월, 영국 유학 1년 6개월, 영국에서는 쌍둥이 딸까지 선물로 태어났다. 해외에서의 축구 생활은 나에게 ‘유학’이었다. 소속 팀을 위해 해준 것 없이 나만 공부하고 돌아왔다.”

    이동국은 2001년 1월 푸스발-분데스리가 팀 SV 베르더 브레멘으로 6개월 임대 형식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무릎 부상의 여파로 SV 베르더 브레멘 구단이 선수 건강 보호 차원에서 출장 기회를 제한하자, 그해 6월 포항 스틸러스로 복귀한다. 그 뒤에 FA컵 2회 준우승(2001년, 2002년)에 공헌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은 그를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이후 이동국은 2007년 1월 23일 프리미어리그 팀 미들즈브러에 입단했다. K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직행한 첫 번째 선수가 된 것. 그러나 골을 기록하지 못하며 현지에서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08년 6월 귀국해 7월부터 성남 일화 유니폼을 입고 다시 K리그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성남과는 3개월 만에 헤어져야 했지만 말이다.

    ▼ 해외 리그를 경험하면서 어떤 점을 느꼈나.

    “해외 진출은 몸 상태가 좋을 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진출은 무릎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강행했다. 미들즈브러도 십자인대 수술 후 K리그에서 2경기 뛰고 영국으로 넘어갔다. 경기 감각이 좋을 리 만무했지만, 외국에 나가고 싶은 욕심에 내 몸 상태를 자신했고, 경기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결국 주전에서 멀어지면서 벤치에 앉는 시간이 많았고, 훈련 양이 많지 않아 체중이 불어났다. 아픔을 안고 돌아와야 했는데, 외국에서의 그런 경험이 선수 생활하는 데 좋은 베이스를 형성한 것 같다. 한 번도 그 시간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절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축구 인생의 소중한 추억이다.”

    ‘능력자 이동국’ 1남 4녀의 아빠

    이동국은 겹 쌍둥이 아빠다. 2007년 딸 쌍둥이에 이어 2013년 두 번째 딸 쌍둥이를 얻어 현재 슬하에 4녀를 뒀고, 11월 다섯째 아이(아들)가 태어난다.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권인 상황에서 이동국이 보인 자녀 사랑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이동국은 아이가 많아 힘들면서도 그 덕분에 느끼는 행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 축구선수 중 최고의 ‘능력자’ 아닌가. 겹 쌍둥이도 신기하지만, 지난해 출산에 이어 올해 다섯 번째 아이를 갖는다.

    “계획한 일이 아닌데, 이렇게 됐다. 아내로부터 다섯째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쌍둥이가 아니라고 하니까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 출산할 때마다 두 명씩 낳아야 하는데, 한 명만 임신이 됐다고 하니….(웃음) 육아는 부모의 책임이니 감당할 수 있지만, 아이가 많아질수록 한 명에게 집중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첫 번째 쌍둥이와 두 번째는 7년이란 터울이 있지만, 두 번째 쌍둥이와 다섯째는 연년생이라 엄마, 아빠가 사랑해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미안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 사실 육아는 아내 이수진 씨의 몫 아닌가. 남편은 합숙과 경기 출전으로 육아를 돕기가 어려운 현실인데….

    “홈경기 때는 숙소에서 안 자고 집에서 출퇴근한다.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한꺼번에 다섯 명의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3명씩 묶어서 교대로 데리고 다닐 계획을 세웠다. 요즘 TV에서 가장 재미있게 보는 프로그램이 ‘슈퍼맨이 돌아왔다’다. 특히 송일국 씨가 세 쌍둥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방송을 볼 때마다 내가 송씨에게 동화되는 느낌이 든다.”

    ▼ 다섯째가 마지막인가.

    “하하, 당연하다. 아들을 낳으려다 이렇게 된 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막내가 아들이라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이동국은 아빠가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사인을 요청할 때 무조건 해주려 한다는 것. 아빠가 되고 나서 다른 아이를 보는 시선이 그만큼 따뜻해졌다는 것이다.

    정신 번쩍 들게 한 이천수

    이동국과 남다른 인연을 맺은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이름하여 ‘이동국과 사람들’. 이동국은 먼저 인천에서 뛰는 이천수를 꼽았다.

    ▼ 이동국에게 이천수란?

    “스페인에서 활약 중인 이승우 못지않은 천부적인 실력을 가진 선수? 천수를 처음 봤을 때는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는 선수라고 생각했다. 작은 체구의 선수가 뛰어난 탄력과 스피드를 장착하고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수마다 크고 작은 시련이 있게 마련이고, 천수는 좀 더 시련이 깊었지만, 그래도 잘 극복하고 견뎌낸 덕분에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왔다고 본다. 이천수는 나에게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긴장하게 한 천재 후배였다.”

    ▼ 이동국에게 이영표란?

    (이영표에게 이동국은 아픈 송곳과도 같은 후배다.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때 이란과의 준결승에서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가 이영표였다. 그런데 이영표가 찬 공이 크로스바를 맞고 하늘로 치솟는 바람에 금메달은 물거품이 됐다. 2002년 월드컵으로 병역 혜택을 받은 이영표는 승부차기 실축으로 이동국을 포함한 후배들이 병역 면제 혜택을 받지 못하자 미안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이듬해 이동국은 이영표 덕분(?)에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했다. 당시 이영표의 슈팅을 가리켜 축구팬들은 ‘군대가라 슛’이라고 한다.)

    “나에게 군인의 본분을 제대로 체험하게 해준 은인(?)이다. 영표 형의 슈팅이 허공을 향하는 것을 보는 순간 ‘아, 난 군대 가야 할 운명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영표 형도, 나도 서로 힘들어했지만, 돌이켜보면 영표 형이 우리에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노력으로 되지 않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 이동국에게 김남일이란?

    (현재 이동국과 함께 전북 현대에서 뛰는 김남일은 9월 14일 K리그 클래식 2014 26라운드 경남과의 경기에서 0-0으로 맞서던 후반 38분 헤딩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김남일의 활약에 힘입은 전북은 하루 만에 포항 스틸러스를 제치고 선두를 탈환했다. 김남일의 골은 10년 3개월 만에 터진 귀중한 골이었다.)

    “남일이 형이 골을 성공시켰을 때 형보다 내가 더 좋아한 것 같다. 형이 골을 넣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1위 다툼이 한창일 때, 정말 귀한 골이 나왔고, 그 골의 주인공이 남일이 형이라 더욱 짜릿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남일이 형이 또 그런 멋진 골을 넣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웃음).”

    선홍이 형과 투톱으로 뛰었더라면…

    ▼ 이동국에게 안정환이란?

    “축구하지 말고 방송을 했어야 하는 분이다. 그동안 축구를 한 건 시간 낭비였다고 본다. 정환이 형은 얼굴이 잘생겨 무엇을 해도 재미가 있다. 얼굴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정환이 형과 함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장해나갔다. 좋은 일,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나에게 자극과 용기를 준 선배 아닌 형이다.”

    ▼ 이동국에게 고종수란?

    “지금은 수원 삼성의 코치로 있지만, 이분은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야 한다. 너무 일찍 태어났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선입관과 색안경 속에서 생활했다. 만약 종수 형이 지금 시대에 축구선수로 활약했다면 스페인의 이승우는 명함도 못 내민다. 왼발 하나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선수였다. 이런 선수를 ‘축구천재’라고 불러야 한다.”

    이동국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은퇴하기 전 꼭 한 번 같이 뛰어보고 싶은 선수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는 ‘축구천재’ 고종수와 베스트 프렌드 김은중, FC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를 꼽았다. 메시를 거론한 이유는 패스를 잘해줄 것 같기 때문이란다. 메시 같은 선수만 있으면 1년에 30골은 거뜬히 올릴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포항 스틸러스의 황선홍 감독을 거론했다. 한국 축구사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황선홍과 이동국이 한 팀에서 뛰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선홍이 형과 대표팀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형의 아우라에 기가 눌려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시간이 후회된다. 얼마 전부터 혼자 이런 상상을 해봤다. 만약 서로가 전성기에 만나 동시대에 축구를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K리그 최고의 투톱이 되지 않았을까. 선홍이 형이 있다면 나이 마흔 살에도 현역으로 뛸 수 있을 것만 같다. K리그 최고의 투톱으로 말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