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문고보 시절의 정지용. 극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이날 음악회의 공식 명칭은 ‘다시 찾은 우리의 노래’, 부제는 ‘정지용의 시에 부친 채동선의 가곡 되살리는 음악회’였다. 38년 만에 정지용 문학의 해금과 더불어 작곡가 채동선이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이 이날 복권된 것이다. 들을수록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흠뻑 젖어들게 하는, 무척이나 서정적이고 강물이 굽이를 도는 듯한 유장한 곡조의 노래다.
그러나 이날 부른 ‘고향’은 40대 이후의 기성세대나 알 뿐 젊은 세대에겐 무척 낯선 노래다. 이 노랫말이 된 시 ‘고향’을 지은 정지용이 전쟁기간에 월북하거나 납북됐다는 이유로 노래마저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성세대에게는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 임은 아니 뵈네/ 들국화는 애처럽고/ 갈 꽃만 바람에 날리고…’ 로 시작되는 ‘그리워’라야 이해가 되거나 아니면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로 시작되는 ‘망향’이라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왜냐하면 정지용의 시로 인해 노래 자체가 금지된 후 이은상과 박화목이 곡조의 유려한 아름다움에 감동해 각각 ‘그리워’ 와 ‘망향’이라는 노랫말을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을 기점으로 이 노래는 정지용의 시 ‘고향’으로 제자리를 찾게 된다. 1989년 저명 성악가인 서울대 교수 박인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휩싸인다. 정지용의 시에 유행가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붙인 노래 ‘향수’가 그 단서가 된다. 박인수는 가수 이동원과 ‘향수’를 녹음했다. 요즈음 말로 크로스오버 음악인 셈이다. 당시로서는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부른다는 게 매우 이례적인 일. 노래 ‘향수’가 국민가요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자 국립오페라단은 그를 제명한다. 클래식 음악을 모독했다는 게 이유였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땐 그랬다.
박 교수는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떤 선입관이나 장르의 구분 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며 순순히 제명을 받아들였다. 국립오페라단에서 쫓겨나는 자리에서 그가 “다른 대중가요면 몰라도 그것이 정지용의 ‘향수’라면 어떤 반대급부도 오히려 영광”이라고 선언하자, 한동안 순수 음악계는 ‘타도 박인수’를 외치며 법석을 떨기도 했다.
실개천, 질화로, 얼룩배기 황소…
그날 이후 이동원과 박인수가 함께 부른 ‘향수’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성악가의 첫 대중가요 녹음이란 점에서도 자연스레 세간의 화제를 더했다.
세월이 흘렀다. 요즘 사람들은 ‘향수’란 노래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노래 ‘향수’의 후렴구에 등장하는 ‘참하(원문) 꿈엔들 잊힐리야’를 들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떠올리는 고향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에 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도회인에게 고향은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기에 노래 ‘향수’를 통해 떠나온 고향을 추억하게 된다.

정지용의 시 ‘향수’의 모티프가 된 초가집 풍경. 더 이상 찾기 어려운 과거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