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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작은 소도시 법원에서 처음 영장업무와 형사단독재판을 겸하던 시절 만난 어느 할아버지 피고인이 생각나곤 한다. 그는 피해자들 말로 ‘성격이 괴팍한 노인네’라서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면 부지깽이 같은 것을 들고 나와서 쫓아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항의하는 학생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피고인이 못 참고 부지깽이를 휘둘렀다가 학부형들에게 고소를 당해서 결국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받게 되었다. 그는 처벌을 받고도 1년 뒤에 똑같은 범행을 저지른 바람에 이번에는 꼼짝없이 실형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성격 괴팍한 노인네’의 부탁
실형이 명백히 예상되는 경우에는 증거인멸이나 도망 우려가 더 높다고 판단되어 구속영장 발부 가능성이 높아진다. 영장을 발부하는 판사 입장에서도 비교적 마음이 편하다. 피고인은 어차피 실형을 받을 것이고 미결구금기간(재판이 확정되기 전에 구속되어 있는 기간)은 형기에 모두 산입 돼 피고인에게 손해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피고인이 징역 2년을 선고받을 사안에 대해 1년간 재판이 진행된다고 하면, 1년간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정신적 고통을 겪은 뒤 재판이 끝난 시점부터 다시 2년 동안 징역형을 사는 것보다는 구속 상태에서 1년간 재판을 받은 다음 나머지 1년만 징역형을 사는 것을 피고인이 선호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나도 같은 이유로 그 피고인에 대한 기록을 처음 보았을 때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구속영장을 발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피고인은 몇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혼자 키우고 있는 손녀를 맡길 사람을 찾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다니고 있는 노인대학 졸업장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마침 뒤에 사건이 없어서 피고인의 이야기를 제지하지 않고 죽 들어보았다.
그는 방음이 잘 안 되는 집에서 홀로 서너 살 된 손녀를 키우고 있었는데 밤에 손녀를 업고 힘들게 재워놓기만 하면 인근 학원에서 나온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어서 번번이 손녀를 깨워버리니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었다. 손녀의 부모는 아이를 낳은 직후 이혼하고서는 손녀를 보러 오지도 않아서 가뜩이나 몸과 마음이 힘든 상태였다. 사건기록에는 없는 이야기였다. 또 한 가지 그가 강조한 것은 자신이 노인대학을 다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가방끈이 짧은 것에 한이 맺혔는데 두어 달만 더 다니면 졸업장이 나오니 그것을 꼭 받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례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피고인은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증거를 인멸하지 않았고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식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짧은 기간이지만 손녀와 3대가 함께 살았고, 노인대학 졸업장도 받았다. 판결을 선고하는 날 나는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하고 그를 법정 구속했다.
훨씬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보다 덜한 처벌을 받는 사람이 많은데 이 정도 사안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1년 6개월이나 징역을 살게 하는 것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법이 징역형 하한을 그렇게 못 박아두어서 더 낮출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고 언제나처럼 딱딱한 표정으로 형을 선고했는데 뜻밖에도 그 할아버지 피고인은 구금실로 가기 전 내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흰 머리를 깊이 숙였다. ‘성격 괴팍한 노인네’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구속영장 기각의 부작용
물론 이런 경우가 있었다고 불구속을 확대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예전에 동료 판사가 폭력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풀려난 피의자가 바로 그날 밤 피해자 집을 찾아가서 피해자와 가족을 모조리 살해해버렸다. 유족들은 판사를 비난했고 동료 판사도 피해자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힘들어했다.나도 구속된 피고인을 보석으로 풀어준 것을 후회한 적이 왕왕 있다. 50대 초반의 어느 피고인은 자신을 잠깐만 풀어주면 거래처로부터 돈을 받아서 피해자에게 배상을 할 수 있으니 보석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피해자도 그 돈이 없으면 큰 곤경에 처할 상황이라 나는 보석을 허가해주었다.
그런데 피고인이 바로 다음 공판기일부터 나오지 않았다. 아주 도망간 것은 아니고 공판기일마다 한두 시간 일찍 법원에 나타나서 법정이나 직원들의 사무실 앞에 쪽지를 놓아두고는 달아나버리곤 했다. 내용은 ‘정말 죄송하다, 막상 구속되어 보니 도저히 다시 들어갈 수는 없겠더라, 돈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제발 이해하고 용서해달라’는 취지였다. 나를 속이고 도망간 셈이라 내가 화가 났을까봐 그런 쪽지를 두고 가는 것인가 본데 그 쪽지를 볼 때마다 오히려 더 얄밉고 보석허가결정을 해준 것이 후회되었다.
사실 피의자나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할지 도망할지는 미래의 일이라 현재 시점에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범인을 일부 놓치더라도 억울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최소화하든지, 반대로 억울한 사람이 일부 나오더라도 범인을 반드시 잡든지.
나는 법대생 때 전자가 절대적으로 옳고, 후자는 위험한 집단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교과서에서 하나같이 형사소송법의 기본 정신은 ‘열 명의 진범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 살다 보면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그 열 명의 범인이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강간한 최악질 범인이라면. 그 범인이 당신의 가족을 해친 사람이라면.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 열 명이 아니라 천 명의 범인을 놓쳐야 한다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인 것이다. 최근에도 납치강간범으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서 판사가 무죄판결을 선고하자 피해자 부부가 억울하고 화가 나서 동반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고서 마음이 무척 아팠다. 판사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동안 내가 나도 모르는 오판으로 사람들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지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무거워지고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형사법의 기본 이념을 어느 쪽으로 설정하든 간에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개개인의 입장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면 원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당사자가 되었을 때에도 원칙에 따라 움직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만 해도 운전하면서 다른 차선으로 끼어들려고 할 때 뒤에서 오는 차가 틈을 양보해주지 않으면 ‘이것은 도로교통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마음에 여유가 없다’고 속으로 툴툴거리지만, 반대로 누가 내 차 앞으로 끼어들면 얌체 같아서 싫다. (결국 나도 이기적이고 마음에 여유도 없는 얌체가 된다.)
무죄추정의 원칙
우리나라를 비롯해 근현대 법치국가가 선택한 원칙은 일부 진범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헌법 제27조 제4항은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원칙도 적용된다. 따라서 구속의 경우에도 구속요건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면 되도록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보아야 한다.다른 것은 몰라도 부인하는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피의자의 진을 빼놓기 위해서, 방어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구속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하기만 하면 다른 사정없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보고 구속영장을 신청하거나 청구하는 관행도 없어져야 한다. 피의자가 나름대로 알리바이의 증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논리를 가다듬기 위해서 조력자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것을 증거인멸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아직도 수사기관이 ‘자백하면 불구속으로 해줄 수 있지만 부인하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더라고 증언하는 피의자가 적지 않은데 그것은 저열한 협박이다.
법적으로 볼 때 구속은 처벌이 아니다. 수사와 재판 도중에 도망가거나 증거를 인멸하지 못하도록 신체의 자유를 제한해 놓은 조치일 뿐이다. 그러나 구속은 ‘사실상’ 처벌이 아닌가? 사람들에게 1년간 구속된 후에 무죄판결을 받고 나갈 것인지, 구속되지 않은 채 재판을 받다가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받을 것인지를 놓고 선택하라면 후자를 선택할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른다.
구속 후에도 무죄추정이 계속된다고 하지만 명예의 측면에서도 구속은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처벌이다. 유명인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 언론과 대중은 그가 유죄판결을 받는지보다 구속되는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운다. 구속영장이 청구되면 사람들은 마치 국가대표 스포츠 경기가 벌어질 때처럼 저마다 결과를 예측한다. 구속 여부가 결정되면 언론은 그 결과를 ‘속보’로 전하고 피의자가 구속되면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피의자가 호송차를 타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그러고 나면 보도가 눈에 띄게 뜸해지고 대중의 공분도 수그러든다. 훗날 재판이 끝나더라도 그 결과는 아주 짤막하게 보도된다. 도쿄특파원을 지낸 어느 기자가 일본 언론은 주로 재판 결과를 보도하는데 한국 언론은 주로 구속 여부를 보도하더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하루 10분 면회를 바꿔라
이런 현상이 아주 불합리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판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면 비록 유죄로 판단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이 아직 개시되지 않았고 따라서 피고인 측 반론을 본격적으로 들어보기 전이라는 한계가 있으나, 구속된 후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이 통계상 매우 낮은 현실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러나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구속이 ‘사실상’ 처벌 못지않다면 구속을 하는 쪽에서는 최대한 절제해야 하고, 구속을 당하는 쪽을 위해서는 불이익을 최대한 완화해주어야 한다. 처음 영장업무와 형사단독재판을 했을 때 선배가 성인오락실 사건, 고래잡이 사건, 사기 사건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거라고 조언해서 나는 개별적으로 구속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영장을 발부한 적이 있다. 경력이 짧은 내가 생각이 짧아서 이례적인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러운 마음에서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에도 과감하게 구속영장을 기각할 것을 그랬다.
구속이 처벌로 간주되는 효과가 덜해지도록, 구속된 사람들의 처우도 대폭 개선되면 좋겠다. 헌법상 무죄로 추정된다는 사람들의 생활이 왜 수형자와 거의 다름없이 제한되는지 의문이다. 지난번 지인을 면회 가보았더니 미결수 면회시간이 1일 1회 10분이었다. 변호인 접견권은 종일 보장되므로 변호사를 매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은 구치소에서 회사도 운영할 수 있는 반면, 그럴 수 없는 사람은 유죄판결을 받은 수형자와 별다를 바 없다. 적어도 가족만큼은 종일 만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옆에서 교도관이 대화를 받아 적고 있는데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면회를 10분 허용하고서 무죄로 추정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 유고유엔국제형사재판소 (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