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태식 기자
‘창의적이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 즉 개념설계 역량 부족이 현재의 위기를 불러왔다. 실패 경험을 다양하게 축적해오지 못했기에 우리는 개념설계 역량을 쌓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을 대표 집필한 이정동(48)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를 11월 5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단풍나무들은 낙엽을 하나둘 떨구며 차분하게 겨울맞이를 하는데,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마지막 잎사귀의 간절함을 담은 듯 열변을 토해냈다. ‘미쳤다’ ‘나쁜 짓’ ‘쓰레기’ 같은 거친 표현도 자주 튀어나왔다. 그는 결국 인터뷰 말미에 “기자가 알아서 순화해 써달라”고 당부했다.
질적 성장? 착각!
▼ 25명의 교수를 인터뷰해 책을 썼습니다. ‘선발 기준’이 뭔가요.
“서울대 공대 교수가 320여 명입니다. 그중에서 학계는 물론 산업계에서도 리더십을 가진, 각자의 필드에서 좌장(座長)이라 할 분들을 추렸습니다. 이들에게 ‘산업계가 어려우니 우리가 나서서 얘기해봅시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단 한 명도 거절하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출력해놓은 자료도 한 더미씩 됐고, 대여섯 시간 인터뷰하는 내내 휴대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았어요. 민감한 대목도 거침없이 언급하며 ‘실명으로 써도 된다’고들 해서 오히려 내가 곤란했지요(웃음).”
▼ 외부 펀딩 없이 자체 추진한 프로젝트입니다. 계기가….
“두 가지가 있어요. 우선 죽비(竹扉)를 들어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몇몇 기업만 잘될 뿐 한국 산업 전반이 어려워지고 있는데도, 정책가부터 기업인까지 ‘잘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선 서울대 공대가 자기반성의 의미로 지난여름 ‘공과대학 백서’를 발간했고, 그다음 순서로 산업계의 잘못을 논의하고자 이 책을 펴낸 것이죠(백서는 ‘서울대 공대는 1루 진출에 만족하는 타자였다. 그러나 학문 세계에서는 만루 홈런만 기억된다’고 스스로를 질타했다).
또한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가 자극이 됐습니다. MIT는 1988년 일본의 부상을 경계하며 ‘Made in America’라는 책을 냈어요. 2013년엔 두 번째 책을 냈는데, 제목이 ‘Making in America’입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을 위협으로 느끼며 ‘국가가 제조업을 해야 일자리가 생긴다’고 일침을 놓았지요. 이 책을 읽고 우리보다 앞서가는 미국도 스스로를 죽비로 내리치는데, 우리는 왜 가만있나 반성했습니다.”
서울대 공대는 ‘기술한국’의 산실이다. 2006년 공학한림원이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을 선발한 적이 있는데, 그중 43명이 서울대 공대 출신이다. 반도체 신화의 주역 진대제·황창규, ‘용광로 없는 제철소’를 만든 이구택, 국내 첫 자동차 모델 ‘포니’를 개발한 이충구 등이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60인 리스트에 올랐다. 책에 참여한 교수들은 이러한 엔지니어 거장들과 협동하며 산업을 일군 주역이기에 자부심을 느낄 만한 위치에 있지만, 요즘은 그보다는 걱정과 책임감을 더 느끼는 듯하다. 현택환 교수(화학생물공학부)는 이렇게 진단한다. ‘우리는 점점 데워지는 물 안에 있는 개구리와 같다. 서서히 몸이 망가지는지도 모르고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무가치한 얘기입니다. 노동시장 문제는 원인의 0.001%도 차지하지 않아요. 노동소득 분배율(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요? 원인은 고부가가치를 내는 핵심 기술이 없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역 조건은 계속 나빠지고 있는데, 저부가가치를 수출하고 고부가가치를 수입하기 때문이죠. 기술이 있어야 기업이, 산업이, 국가가 발전합니다.”
이 교수는 책에서 ‘우리 산업계가 질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착각하며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며 5가지를 제시했다(상자기사 참조). 그는 “공학교육이 썩어빠졌다, 산업정책이 문제다 등 10가지를 나열하려던 걸 절반으로 줄였다”고 귀띔했다. 그 ‘절반’ 중 개념설계 역량 부족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스케일 업(Scale up, 확대)’ 역량의 부재다. 혁신적 아이디어를 스케일 업해 실용화하지 못하면 그 아이디어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런데 스케일 업 역량은 ‘오랜 경험이 축적돼야 비로소 확보할 수 있는 고도의 경험지식 영역’이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 한국 산업의 비극이 자리한다.
▼ 글로벌 수준의 국내 기업에도 스케일 업 역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