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호

20대 리포트

생활스터디 노예

기상인증, 공부, 스터디, 밥터디, 공부, 퇴첵

  • 입력2018-11-07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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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빡빡한 취업준비 위한 자발적 구속”

    • 24시간 일일이 상호 감시

    • 보편화되는 20대 문화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대학 졸업생 신모(27·서울 안암동) 씨의 하루는 생활스터디와 함께 시작된다. 신씨는 오전 8시 30분 학교에 도착했음을 카카오톡으로 스터디 멤버들에게 인증한다. 인증은 학교 도서관에 자리 잡기 위해 사용하는 키오스크(무인 터치스크린 단말기)에 있는 시계를 찍어 단체카카오톡방에 올리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열람실에서 공부하다 점심은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먹는다. 저녁도 이들과 같이 한다. 밤 11시쯤 도서관에서 나설 때도 귀가 인증샷을 이들에게 보낸다. 신씨는 이런 생활스터디 노예 상태를 5개월째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스터디 노예 생활’에 대해 신씨는 “규칙적이고 꾸준한 취업 준비를 위한 자발적 구속”이라고 말한다. 

    ‘스터디그룹’에서 온 20대의 은어인 ‘스터디’는 기본적으로 시험 준비를 위해 구성된다. 토익 스터디, 인-적성 스터디, 면접 스터디, 언론고시 스터디가 대표적이다. 그러다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한 생활스터디도 생겨났다.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된 시기에 해이해지기 쉬운 마음을 다잡고 취업 공부에 몰입하기 위한 것이다. 일어나는 시간을 확인하는 기상 스터디,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함께 하는 밥터디, 귀가시간을 확인하는 퇴첵스터디 등이다.

    인증샷 채팅방에 올리기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생활의 전 과정을 멤버들과 온·오프라인으로 공유하면서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다. 취업준비생 김모(28·서울 청량리동) 씨는 “생활스터디는 딱 정해진 용어는 아니다. 어떤 식이든 서로 간섭하거나 식사 등을 같이 하면 이렇게 부른다. 대학생과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굉장히 널리 퍼져 있다”고 말했다.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정모(25) 씨도 오전 7시에 집을 나선다. 8시 30분까지 학교 도서관에 도착해야 하는 ‘생활스터디’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정씨의 생활스터디는 스터디 원들끼리 공부 시작 시간과 마치는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동안 공부했음을 보여주는 ‘인증샷’을 단체채팅방에 의무적으로 올리게 한다. 지각이나 결석을 하면 벌금을 낸다. 

    정씨는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들과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고 했다. 이 생활스터디는 멤버들 간 잡담도 일절 없고 사적인 시간도 공유하지 않는다. 오로지 공부 시간만 감시한다. 정씨는 “공부 시간을 확보하는 데엔 도움이 된다. 아침부터 밤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살인적인 임용고시 준비에 대해 ”고3 때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20대 취업준비생들이 생활스터디를 택하는 주된 이유로 생활 통제 외에 외로움 극복도 꼽힌다. 이런 생활스터디에선 멤버들 간의 식사나 대화는 허용한다. 취업준비생 이모(여·29·서울 제기동) 씨는 “회사를 다니다 퇴직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보니 동기-후배 대부분이 학교를 떠났다. 공부하면서 생길 수밖에 없는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모이는 생활스터디를 만들었다”고 했다.

    커지는 불안, 빈번한 모집

    서울시내 한 대학 도서관 열람실에서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서울시내 한 대학 도서관 열람실에서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취업준비생 정모(여·29·서울 제기동) 씨도 “생활스터디에서 대화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정씨는 “술 한잔 같이할 옛 친구가 별로 없다. 스터디 멤버들이 다들 나이도 있고 바쁘다 보니 놀더라도 깔끔하게 일찍 귀가한다”고 했다.

    한 조사에서 신입직 구직자 523명 중 60.4%가 취업 준비를 위해 스터디를 해봤다고 답했다. 한 유명 포털 사이트의 취업 관련 카페에는 하루 300건이 넘는 스터디 모집 글이 올라온다. 대학 재학생 커뮤니티에도 생활스터디를 함께 하자는 공고가 빈번하게 올라온다. 고려대 ‘고파스’의 스터디 모집 게시판에서는 이틀에 한 건꼴로 생활스터디 모집 공고문을 찾을 수 있다. 한 공고는 “(스터디 멤버들의) 나이가 많다. 상관없으신 분만 지원하기 바란다”고 명시했다. 자신의 일과를 생활스터디에 의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방증이다. 

    취업준비생 라모(여·26·서울 황학동) 씨는 “취업을 못 한 20대 중후반이 공유할 수 있는 불안함, 위기의식, 외로움 같은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이런 것까지 생활스터디가 채워준다”고 말했다. 취업 카페에 스터디 모집 글을 올린 닉네임 ‘허니취뽀’는 ‘심리적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취업에 대한 불안감이 스터디에 대한 의존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마땅히 학원을 다닐 수도 없어 스터디밖에 믿을 게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취업 관련 카페를 들락거리는 박모(25) 씨도 “게시판에 취업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는 글이 수도 없이 올라온다. 그와 동시에 스터디 모집 글도 갈수록 늘어난다”고 전했다. 

    일부 생활스터디는 멤버들 간에 인간적으로 너무 친해지면서 취업공부를 오히려 방해하기도 한다. 변리사 시험을 준비 중인 박모(28·서울 종암동) 씨는 “스터디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져서 점심식사 후 한 시간 넘게 잡담을 하거나 일주일에 두세 번 술을 마시러 가기도 했다. 멤버들이 좋은 사람이면 이들과 더 놀고 싶어지는 부작용도 생긴다”고 말했다.

    수첩 가득 채운 스터디 스케줄

    생활스터디 모집 공고.

    생활스터디 모집 공고.

    몇몇 취준생 사이에선 스터디 중독 양상까지 나타난다. 공기업 입사를 목표로 하는 김모(여·24) 씨의 수첩은 각종 생활스터디와 시험스터디(국가직무능력표준 대비 스터디, 자기소개서 첨삭 스터디, 스페인어 스터디 등) 스케줄로 빡빡하다. 김씨는 “요즘 스터디 서너 개는 다들 한다”고 밝혔다. 

    몇몇 취준생은 “우리나라에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갖춰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이제 대학입시 보듯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생활스터디와 시험스터디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청년실업이 획기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생활스터디의 노예를 자처하는 현상이 더 확산될 것 같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필자들이 ‘고려대언론인교우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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