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사자 무리’ 왕위 권불십개월… 암사자만 왕국 역사에 남는다

[동물萬事㉑]

  • 이강원 동물칼럼니스트

    powerranger7@hanmail.net

    입력2020-11-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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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사자 세계

    • 왕이 되려면 무력만큼 사교성도 중요

    • 우두머리 아들도 나이 차면 공평하게 추방

    • 미토콘드리아로 쓰는 사자의 모계 족보

    포효하는 수사자. 아침마다 수사자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자 소리를 지른다.  [GettyImage]

    포효하는 수사자. 아침마다 수사자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자 소리를 지른다. [GettyImage]

    바람에 흩날리는 길고 검은 갈기, 200㎏에 이르는 당당한 체구. 외모만 봐도 수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맹수다. 

    전성기에 이른 수사자는 매일 하는 일과(日課)가 있다. 마치 바리톤(Baritone) 가수처럼 자신의 전용 무대에 올라서 엄청난 성량(聲量)을 뽐내는 일이다. 수사자가 애용하는 장소는 평탄한 초원에 홀로 우뚝 솟은 흰개미집이다. 수백만의 흰개미가 사는 초고층 아파트가 수사자에게는 목청을 자랑하는 연단인 셈이다.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성악가의 노래를 눈앞에서 들으면 크고 명징한 소리에 놀라게 된다. 수십m 떨어진 거리에서도 성악가의 노래는 정확히 들린다. 수사자의 울음소리도 마찬가지다. 목청을 가다듬은 사자가 자신의 배에서 내는 포효(咆哮)는 사방 수십㎞까지 들린다.

    아빠 찬스, 엄마 찬스는 사용 불가능

    수사자의 포효는 모든 동물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함성이 아니다. 특정 동물만 염두에 둔 핀셋(pincette) 공격이다. 수사자의 포효는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떠돌이 수사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 포효를 해석하자면 “이곳은 나의 영역이니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의미다. 

    누구나 흰개미집 위에서 마음껏 포효하는 수사자처럼 당당하고 화려한 삶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닌 법이다. 제아무리 멋진 수사자라도 그 삶이 항상 영광에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수사자가 목소리를 뽐낼 수 있는 기간은 사자 일생에서 그리 길지 않다. 



    사자 왕국의 왕좌는 인간 세상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사람의 왕국에서 왕이 되려면 일단 왕의 자녀로 태어나야 한다. 새 왕은 부왕(父王)인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정해진 순리다. 프라이드(pride)라는 사자 무리에서 왕위에 오르는 것은 출신 성분과는 관계없다. 왕의 아들이라고 해서 거저 자리를 얻는 것은 사자의 왕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프라이드의 우두머리 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사자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 쟁취해야만 한다. 삼국지의 장수로 비유하면 여포(呂布) 정도의 무위를 보여야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건설하고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수사자들은 우두머리 자리를 두고 목숨 건 경쟁을 벌인다. 얼굴이나 몸에 깊이 난 상처는 사생결단의 혈전 끝에 얻은 영광의 흔적이다. 그런 것이 없으면 진정한 왕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사자의 왕국에서 아빠 찬스나 엄마 찬스를 사용한다는 것은 애당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사교술은 출세의 지름길

    수사자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GettyImage]

    수사자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GettyImage]

    프라이드의 왕좌(王座)는 하나가 아닌 여럿일 수도 있다. 프라이드의 임금 자리가 수사자 한 마리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수사자가 짧으면 수개월, 길면 수년 동안 힘들게 구축한 기존 권력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 힘만으로 다른 수사자 집단이 가진 권력을 쟁취하는 것보다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성공 확률을 높이는 길이다. 프라이드의 주인이 되기 전 모든 수사자는 무리에서 쫓겨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수사자들은 일정 기간 무리와 떨어져 떠돌이 생활을 거쳐야 한다. 이 시절 생사고락을 같이한 젊은 수사자 친구들이 왕위 찬탈의 동료가 된다. 기존 권력을 무너뜨리려 협력하는 모습은 사람이나 사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 쿠데타에 성공했다면 논공행상의 시간이다. 새 정권 확립에 앞장선 수사자들이 권력을 나눠 갖는다. 프라이드에서는 마치 의원내각제를 하는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연립정권 같은 지도체제를 볼 수 있다. 이런 지도체제는 후일 다른 경쟁자들의 외침을 막을 때 장점이 되기도 한다. 

    수사자로 태어나 한번 권력을 쥐어보려면 싸움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세력이다. 젊은 떠돌이 시절 자신을 도와줄 능력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게 유리하다. 특히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친구가 좋다. 유비(劉備)처럼 관우(關羽)나 장비(張飛)를 자신의 옆에 두는 것이 수사자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강한 힘을 가진 수사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사귀고 이들과 합종연횡(合縱連衡)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다음 정권을 잡을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사교술은 인간 세상과 마찬가지로 사자의 세계에서도 성공을 위한 핵심 경쟁력이다. 

    사람 세상이나 사자의 왕국이나 권력을 가진 지배자는 선망의 대상이다. 권력자의 자리는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제한된 자리일 뿐이다. 사자의 사회에는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외톨이 수사자가 다수 존재한다. 이들의 목적은 하나다. 프라이드의 대장 자리를 꿰차서 자신의 유전자를 이 세상에 가능한 한 많이 남기는 것이다. 

    권력자가 되면 번식에 대한 배타적 권리는 물론 초원의 최고 사냥꾼인 암사자들이 사냥한 영양가 풍부한 먹이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권리도 보유하게 된다. 수사자는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다. 번식과 식사에 대한 권리가 보장된 호사를 마다할 수사자는 세상에 없다.

    프라이드의 잦은 권력 교체, 불안정한 권력

    좋은 특권이 보장돼 있으니 그 자리는 목숨을 건 희망자가 차고 넘친다. 그 결과 프라이드의 우두머리 자리는 계속 바뀐다. 사자 무리에서의 정권교체는 마치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같이 자주 일어난다. 다반사(茶飯事)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권력자는 타이틀을 가진 복싱 챔피언과 같다. 100번의 도전을 격파해도 단 한 번의 실패가 있으면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챔피언 벨트를 반납해야 한다. 그래서 매번 싸움은 챔피언 타이틀전이나 한국시리즈와 같이 중요하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사자 무리의 특성상 프라이드의 지배자들은 장기 집권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런 점은 사자라는 종(種)에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약 특정 수사자가 장기 집권한다면 그 수사자의 유전자를 가진 많은 후손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매우 잔인하고 냉혹한 이야기지만 나이 많은 수사자의 자식보다는 아무래도 젊고 튼튼한 수사자의 후손이 많은 게 좋다. 다양한 샘플의 유전자가 퍼지는 것이 종의 생존에는 유리하다. 중국 속담에 장강(長江)의 뒷물이 앞의 물을 밀어낸다는 의미의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는 문구가 있다. 대자연의 질서는 수사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단절되는 부계 역사와 연속되는 모계 역사

    프라이드 우두머리 수사자의 재임기간은 길어야 수년에 불과하다. 그 짧은 시간에도 권력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펼쳐진다. 

    프라이드와는 달리 사람들이 세운 왕국은 부계(父系)를 통해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10세기부터 20세기 사이 우리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1000년 동안의 역사에서 한반도에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라는 두 개의 왕국만 있었다. 

    서기 918년 태봉(泰封)이라는 왕국의 2인자이던 시중(侍中) 왕건(王建)은 1인자인 국왕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한다. 고려는 1392년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왕건을 포함한 34명의 왕씨(王氏)가 재위에 오르며 나라를 다스렸다. 고려를 역사의 무대에서 밀어내 버린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창업 군주 이성계를 포함해 27명의 이씨(李氏)가 518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사자는 모계(母系)의 역사를 단절 없이 계속 이어간다. 암사자는 자신이 태어난 프라이드를 일평생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출생으로 시작된 암사자와 프라이드의 인연은 죽음을 맞아야만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도 암사자와 프라이드 사이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암사자는 죽음에 앞서 생전에 자신의 후손을 이미 프라이드에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비록 죽었지만 그 딸과 외손녀는 계속 프라이드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어 또 다른 후손들이 계속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 죽음도 암사자와 프라이드의 인연을 끊지는 못하는 것이다.

    아빠 사자가 친아들을 추방하는 이유

    프라이드에서 부계가 단절되는 이유 중 하나는 무리 내부의 어린 수사자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반드시 추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라이드의 지배자는 아무리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친아들이라고 해도 이런 추방의 대열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아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2차 성징이 시작되면 자신의 경쟁자로 인식하고 상당한 경계를 한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예외 없이 무리에서 추방해 버린다. 자신을 대체할 만한 젊은 수사자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권력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이 있다. 왕좌에 있는 수사자를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자신의 아들까지 외부로 냉혹하게 쫓아내는 잔혹한 우두머리의 행동은 결과론적으로 사자라는 종의 운명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무리에서 수사자들이 추방되기 때문에 사자의 세계에서는 근친혼(近親婚)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태어난 무리에서 수사자가 떠나지 않고 계속 자란다면 사자라는 동물은 근친혼의 폐해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이라면 특정 성(性)이 출생한 곳을 떠나는 것이 해당 종(種)의 운명에 바람직할 수 있다. 

    사자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포식자다. 그래서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다른 동물들보다 높다. 건강한 사자는 대자연의 지속가능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접어든 어린 수사자들을 무리에서 추방하는 사자들의 습성은 사자라는 종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세심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왕국에서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창업 군주의 후손이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업 군주의 성(姓)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성은 부계로 이어지는 왕위의 근거가 되고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프라이드에도 인간 세상의 왕족들이 가진 성과 비슷한 존재가 있다. 사자의 표지는 신체에 남겨져 있다. 암사자의 몸에 있는 증거를 보면 해당 사자가 어느 프라이드 소속인지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데 사자들이 남긴 표지를 이해하려면 간단한 생물학 공부를 먼저 할 필요가 있다.

    모계로만 유전되는 세포 내 에너지 공장 미토콘드리아

    평생 자신이 속한 무리를 떠나지 않는 암사자. [GettyImage]

    평생 자신이 속한 무리를 떠나지 않는 암사자. [GettyImage]

    사자는 성(性)에 따라 운명의 차이가 큰 동물이다. 수사자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무리를 떠나야 하는 운명이고, 암사자들은 평생 자신이 태어난 무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후 수사자는 자신에게 맞는 프라이드를 찾기 위해 방랑 생활을 이어가며 기회를 노린다. 따라서 사자의 세계에서는 암사자가 수사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고, 수사자가 암사자에게 장가를 가는 셈이다. 

    프라이드에 있는 암사자 대부분은 혈연적으로 가까운 사이다. 사람의 촌수로 따지면 암사자들은 대부분 모녀, 친자매, 이종사촌 자매, 이모와 조카, 외할머니와 외손녀 사이에 해당된다. 당연한 이치지만 이들은 가까운 외가 친척들이다. 이에 비해 프라이드의 권력자인 수사자들은 암사자들과는 혈연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 

    사자를 포함한 동물의 신체에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는 작은 에너지 공장이 존재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안에 존재하는 세포소기관(organelle)의 일종으로 산소를 이용해 영양소를 분해하고, 세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인간 왕족들이 창업 군주의 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프라이드의 암사자들은 세포 내 작은 에너지 공장인 미토콘드리아를 공유한다. 그 이유는 미토콘드리아는 부계유전이 아닌 모계유전(maternal inheritance)으로만 후대에 전해지는 데 있다.

    미토콘드리아가 말하는 프라이드의 역사

    미토콘드리아는 특이하게도 모계로만 유전된다. 따라서 이 점을 이용하면 암사자들이 어느 프라이드 소속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프라이드 P에 속한 암사자 A가 있다고 가정한다. 암사자 A의 세포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당연히 어미로부터 받은 것이다. 같은 무리에 있는 A의 어미 역시 미토콘드리아를 자신의 어미 즉 A의 외할머니 사자로부터 받았다. 외할머니 사자도 여느 암사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태어난 무리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으니 A와 같은 프라이드인 P에서 살고 있다. 

    프라이드 P에는 A의 어미와 외할머니는 물론 어미와 친자매인 B라는 이모 사자도 살고 있다. 그런데 B도 외할머니의 딸이어서 미토콘드리아가 외할머니와 같다. 그러니 A와 B의 미토콘드리아는 같은 것이다. 또한 B가 낳았고 프라이드 P에서 같이 사는 이종사촌 자매 C와 D도 A와 같은 미토콘드리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프라이드 P의 암사자 대부분은 같은 미토콘드리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암사자의 세포에서 미토콘드리아만 추출해서 분석해 보면 해당 암사자가 어느 프라이드 소속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를 통해 이어지는 프라이드의 역사를 증명하는 일종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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