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참다못한 관음은 어느 날 석가여래에게 하소연했다.
“대중을 구제한다는 구실로 저들의 비밀을 엿보는 삶이 짜증납니다. 게다가 시간에 쫓기다 보면 엉뚱한 자를 성불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제가 하는 일에 자신을 잃은 데다, 인간들 돕는 이 짓에도 점점 염증이 나는군요. 대답해 주소서. 제가 왜 이 일을 계속해야만 합니까?”
끝이 없는 열반에 들어 깨달음의 환희에 잠겨 있던 여래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자리를 비워놓을 순 없지 않으냐? 관음 노릇도 업보이니만큼, 네 스스로 그 업을 풀어야 할 게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넌 관음 아니냐? 인간 세상 경험은 나보다 풍부하고, 지혜로 치자면 우주 제일의 보살이렷다! 꾀를 내어보아라.”
생각에 잠겨 도솔천을 떠돌던 관음은 자기 자리를 물려줄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기로 결심했다. 사바세계 어딘가에는 인간도 싫고 부처도 싫어 관음보살이 되고 싶은 자 한 명 정도는 필시 있을 법했다. 쾌재를 부른 관음은 서둘러 인간계로 복귀했다.
관음의 권태
신라 성덕왕 재위 8년째 되던 해 사월 초파일, 후계자를 찾는 데 실패를 거듭하던 관음은 지친 발걸음으로 반도 남단 백월산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영험한 길지로 소문난 백월산 주변에는 불자들이 수행하는 암자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가운데 어딘가에는 관음보살의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백월산 북쪽 기슭에서 수행하던 달달박박이 정체 모를 처녀의 방문을 받은 건 초저녁 무렵이었다. 길을 잃었다는 처녀는 다짜고짜 하룻밤 묵어가겠다며 떼를 썼다. 그녀 몸에서 풍겨오는 미묘한 냄새와 기품 있는 말투에 흥미를 느낀 박박은 우선 처녀를 들여 방에 앉히고 물었다.
“보아하니 귀한 댁 처자이신 듯하온데, 홀몸으로 이 깊은 산중엔 무슨 까닭이신지?”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교태를 부린 처녀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서라벌의 재미없는 삶에 진력났지 뭐예요. 시종을 데리고 남쪽 바닷가를 떠돌며 놀다 혼자 길을 잘못 들었답니다. 자비를 베풀어 하룻밤만 재워주셔요.”
염주를 쥔 손마디에 잔뜩 힘을 준 박박이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서라벌은 어쩌다 그리 재미없어지셨습니까?”
바싹 다가앉은 처녀가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왕이 문제예요. 나라를 통째로 바꾸려고 하잖아요. 사람 이름과 땅 이름을 죄다 당나라식으로 고쳐 쓰게 하고 있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유학을 국교로 삼아 예의범절을 강요하는데, 아휴 숨도 못 쉴 지경이랍니다.”
“그거야 그분이 왕권을 강화하고 싶은 게지요. 귀족들 힘만 꺾으면 서라벌은 도로 불국토가 될 겁니다.”
“아니에요! 왕은 우리 귀족을 아예 짓뭉갤 심산이에요. 서라벌엔 이제 저랑 놀아줄 풍류 있는 스님 한 분 없게 됐답니다.”
말을 마친 처녀가 박박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살며시 상대 머리를 들어 올리고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던 박박이 속삭였다.
“그대가 날 유혹하러 온 요망한 야차인지, 아니면 날 시험하고 있는 관음보살인지 잘 모르겠소만, 이건 분명히 해두겠소. 난 처자식을 뒀던 행자로서 이미 부녀자와 즐거움을 누릴 만큼 누려본 사람이요. 이런 꾐엔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요.”
박박의 품에서 벗어난 처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럼 내가 야차인지 관음인지 맞혀보거라! 네 녀석 법력이나 알아보자꾸나!”
달달박박의 묘책
처녀 몸을 유지한 채 긴 얘기를 마친 관음이 쓸쓸한 눈빛으로 박박을 쏘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침묵하던 박박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소승보고 성불을 단념한 채 관음이 되란 말씀이시죠?”
고개를 끄덕인 관음이 대답했다.
“그래만 준다면 감사하겠소. 이 일은 제법 흥미진진하고, 또 가끔 여래도 직접 뵐 수가 있소.”
크게 입맛을 다신 박박이 관음 앞으로 다가앉으며 속삭였다.
“소승에게 절묘한 계책이 있습니다만.”
“말해 보시구려.”
“관음으로 사는 게 좋기야 합니다만, 거 뭐냐, 끝이 안 나는 일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건 곤란하지요. 저희 같은 불자의 최종 목표가 성불인 건 아시는 바일 테고. 그러니까 소승이 적당한 다른 인물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송구합니다만, 소승을 어서 성불시켜 주십시오. 요즘 신라가 불법 정신을 잃고 유학이다 뭐다 어지럽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이런 때일수록 옛날에 순교하신 이차돈 스님 같은 분이 다시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법을 널리 떨칠 큰 기적이 또 한 번 일어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 기적, 소승이 일으키면 어떻습니까? 아니, 순교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성불의 대사건이 신라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현신불을 제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면…, 뭐랄까, 불법이 융성해져 여래께서도 크게 칭찬하지 않으실까요?”
박박을 한참 바라보던 관음이 한숨을 푹푹 쉬다 대답했다.
“여래께선 성불 하나하나에 신경 쓰진 않으십니다. 너무 흔한 일이 된 까닭도 있고. 그나저나 누굴 소개해 주시려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박박이 말했다.
“소승에겐 저 너머 법적방에서부터 함께 수련하던 법형제 하나가 있습지요. 노혜부득이란 친군데. 성정이 저랑은 조금 다릅니다. 뭐랄까, 속세에 애정이 많다고나 할까, 측은지심이 발달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잔정이 많습니다!”
“관음이 어디 속세의 잔정으로 하는 일인 줄 아시오?”
“그런 뜻이 아니옵고! 들어보세요. 그러니까 관음이란 업이 워낙 특이한 거란 말씀 아닙니까? 성불을 이룰 도력을 충분히 갖췄지만, 사부대중에 대한 미련이 남아 인간세에 더 머물고 싶어야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자비심이라고 아까 말했소!”
“그러니까 자비심 말입니다. 노혜부득이 그게 아주 많습니다. 저는 처자식을 뒀지만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아예 뚝 끊어냈습니다. 성불 아니면 마귀라도 되겠다는 모진 결심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부득은 그걸 못 합디다. 여전히 암자 근처에 처자식을 살게 하고서는 가끔씩 들른다고 들었습니다. 파계할 친구는 전혀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 성불해 속세에서 싹 사라져버릴 위인도 못 됩지요. 어떻습니까? 관음 일에 딱 제격이 아닌지요?”
골똘히 상대 말을 경청하던 관음의 입가에 조금씩 미소가 번져갔다.
백월산 남쪽 허름한 암자에서 수행하던 노혜부득은 낯선 처녀의 방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날이 저문 지 이미 오래여서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촛불을 하나 더 켜 방 안을 밝힌 부득이 처녀를 맞이해 앉히고 물었다.
“이 시각에 제대로 된 길도 없는 곳엔 어인 일이신지요?”
가시덤불에 여기저기 찢긴 웃옷을 벗어 단정히 갠 처녀가 대답했다.
“먼저 몸을 가릴 옷가지 아무 거라도 부탁드려요.”
잠시 망설이던 부득이 천 조각을 기워 만든 분소의(糞掃衣) 한 벌을 꺼내 처녀에게 건넸다. 볼이 발그레 물든 그녀가 바닥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어둠 속에서 헤매다 온몸이 땀에 젖었나이다. 소녀 옷을 다 벗어야겠기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부득이 급히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그녀가 만류하며 말했다.
“어찌 그리 내외하시는지요? 소녀 스님을 믿습니다.”
등을 돌리고 앉은 부득이 눈을 감자 처녀가 옷 벗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기 시작했다. 땀내로 시작된 그녀의 체취는 점점 미묘한 향기로 번지더니 마침내 사내가 참기 힘든 사향 냄새로 변해갔다. 숨을 참은 부득은 목탁을 쥐고 금강경을 나지막이 독송했다.
찢어진 옷을 입은 처녀
[GettyImage]
어느새 새벽이 다가오려 할 무렵, 깊이 잠들었던 처녀가 엉엉 울며 몸부림쳤다. 깜짝 놀란 부득이 다가가자 그의 팔뚝을 움켜쥔 그녀가 외쳤다.
“소녀 부끄럽사오나 아이를 출산할 모양입니다. 산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도와주셔요.”
두려움과 난처함이 가슴을 채웠지만 부득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마른 짚을 두껍게 깔아 자리를 확보한 그는 여자를 정좌하게 하고 산도를 살폈다. 아기 머리가 보이자 능란한 산파처럼 끄집어낸 그가 촛불에 달군 칼로 잽싸게 탯줄을 잘랐다.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한 걸 확인한 부득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벽에 기대 긴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가 속삭였다.
“스님께선 참으로 친절하세요. 제 이름을 묻지 않으셨고 정체도 궁금해하지 않으셨어요.”
피곤으로 두 다리를 쭉 뻗으며 눈을 감은 부득이 대답했다.
“이 빈도, 스스로의 정체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가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면목 없지만 목욕을 하도록 도와주시겠어요? 몸이 더러워져 있습니다.”
힘을 내 다시 일어선 부득이 나무로 된 욕조를 방 가운데 설치한 뒤 부엌 아궁이의 큰 솥에 물을 받아 끓이기 시작했다. 끓인 물을 욕조에 옮겨 채운 그가 여자를 부축해 안에 앉게 하고 두 손을 합장한 채 고개를 숙였다. 놀란 여자가 물었다.
“내 정체를 언제 알아챘느냐?”
합장한 손을 풀며 부득이 대답했다.
“평생 기다려온 순간입니다. 관음보살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소승이 수도 없이 예상하던 바로 그 성불 과정과 똑같더군요.”
노혜부득의 성불
한숨을 길게 몰아쉰 관음이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중생들이 도대체 속는 법이 없구나. 얼마나 성불이 흔해졌으면 이리 됐을꼬? 아무튼 내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들어보겠느냐?”
“제 안의 법성이 들끓고 있습니다. 성불을 앞둔 이 몸, 무슨 제안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자기 자리를 물려주고 싶다며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한 관음은 중생 구제가 주는 희열이 단숨에 성불하는 허무함보다 훨씬 낫다고 힘주어 강조하며 말을 마쳤다. 멍한 표정이 된 부득이 여자의 모습으로 욕조 안에 앉은 관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초조해진 관음이 덧붙였다.
“게다가 넌 처자식도 있다면서? 이 근처 어디 살고 있느냐? 관음이 되면 그들의 전생윤회를 끝까지 지켜볼 수도 있다. 물론 조금씩 도울 수도 있을 테고.”
부득의 눈이 잠시 반짝이다 다시 흐릿하게 빛을 잃어갔다.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겨우 입을 뗐다.
“관음이 되면 성불은 언제 할 수 있습니까?”
크게 입맛을 다신 관음이 자기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짐짓 여유를 보인 뒤 속삭였다.
“그거야 여래께 잘 보이면 언제든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뭐 궁해서 이런 제안 하는 줄 아느냐? 북쪽 암자에 사는 달달박박이란 녀석을 잘 안다면서?”
“오랜 법형제이옵니다.”
“그래! 그 녀석도 이 자리를 꽤나 탐을 냈지만 미심쩍은 점이 있어 여기까지 와본 것이다. 빨리 결정할수록 이득임을 명심해라.”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번민에 싸여 있던 부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잘 알겠습니다. 관음보살님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자리를 이어받으려면?”
흥분에 겨워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멈춘 관음이 외쳤다.
“이 물 안으로 들어오려무나. 보아라! 물이 황금 액체로 변했지? 어서 들어오너라!”
열반의 대희락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달달박박은 먼동이 트자마자 노혜부득의 남쪽 암자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계획대로라면 부득은 관음의 자리를 이어받았을 테고, 자신을 성불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몇 번이나 실족할 위기를 넘기며 부득의 암자에 도착한 박박은 상서로운 향기가 진동하는 방 안을 향해 돌진하듯 들어섰다.방 안에서 벌어진 광경을 마주한 박박은 말문을 잃고 뒷걸음질 쳤다. 방 중앙에 둥둥 떠 있는 연꽃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미륵부처님은 바로 노혜부득이었다. 머리를 바닥에 조아려 예를 갖춘 박박이 물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요? 어쩌다 이 위대한 지혜를 이루셨습니까?”
열반의 미소를 머금은 부득이 자애로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도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관음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 저 욕조에 몸을 담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 금빛 액체가 제 온몸을 물들이더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박박이 지난밤 자신이 지은 죄를 실토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부득이 다정한 모습으로 속삭였다.
“성불이 이리 쉬운 것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욕조 안을 보세요. 액체가 꽤 남아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몸을 담그시지요.”
감사의 절을 거듭 올린 박박이 엉금엉금 기어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남은 금빛 액체를 구석구석 바르던 그가 갑자기 황금빛 광휘 속에 감싸이더니 천천히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윽고 대좌가 생성돼 몸을 받치자 박박은 아미타부처의 모습으로 화했다. 이렇게 두 부처는 늠름하게 마주 보며 열반의 대희락에 잠겼고,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신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황금빛 액체의 비밀
울상이 된 관음이 석가여래를 마주해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분명히 제 업을 그자에게 전했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요?”
눈을 감은 여래가 졸린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의 업이 그대로 남은 것이지 따로 뭐가 있겠느냐?”
“금빛 액체에 업을 실어 노혜부득과 나누었습니다. 제가 처음 관음이 된 방식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관음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요?”
길게 하품한 여래가 가늘고 긴 눈을 천천히 뜨자 지혜의 광선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눈부신 빛을 피하려는 관음을 향해 여래가 속삭였다.
“너에게 관음의 업을 물려주고 떠난 옛 관음을 기억하겠지?”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 관음이 북방의 한 호수로 절 이끌었지요. 제 몸이 호수의 물에 잠기자 갑자기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관음은 성불하고 너는 그 관음보살의 업을 이어받았었지?”
“그렇습니다. 이번에 제가 한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요?”
“잘못된 건 없었다. 무익한 노력을 했을 뿐이다.”
“저보고 꾀를 내보라 하셨잖습니까?”
“업을 풀 꾀를 내보라 했느니라.”
“이게 업을 풀 꾀가 아니라면 무슨 꾀가 더 있나이까?”
“그건 잔꾀니라. 진짜 꾀를 냈어야지. 들어보아라. 저번 관음이 성불하기 직전 한 말도 기억은 하는 게냐?”
“문 하나를 닫았고 다음 문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문 하나를 닫을 때까지 업은 끝나지 않느니라.”
“무슨 문이기에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열려 있는 것입니까?”
“하나의 시공 전체가 성불할 때까지니라.”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관음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금빛 액체는 관음의 업이 풀리는 것과 애초부터 무관한 것이었군요?”
번쩍이는 거대한 황금빛 손으로 관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래가 대답했다.
“그러하다. 금빛 액체는 누군가 성불했다는 징표일 뿐, 관음의 업이 풀리는 것과는 무관하다. 네게 업을 물려주고 성불한 그 관음은 자신이 몸담았던 우주 전체를 성불시키고 떠나는 길이었다. 문 하나를 닫았다는 말이 그런 뜻이었느니라. 네가 성불하려면 네가 속해 있는 이 새로운 우주 시공의 모든 생명을 성불시켜야 한다. 그때 문이 닫힐 것이고, 너도 떠날 수 있다.”
“그렇다면 저는 마지막에 문을 닫는 자로군요?”
“그러하다. 그때 새로운 우주의 문이 열리고 다음 관음도 나타날 게다.”
좌절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관음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꾀를 내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였는지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여래가 대답했다.
“대중을 빨리 성불시킬 꾀를 내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려면 네 운명을 빨리 깨달아야 했기에 던져본 말이니라. 이제 가보아라. 관음은 한시도 편히 쉴 여유가 없는 존재니라.”
마지막에 문을 닫는 자
경남 창원의 백월산 남쪽에 도착한 버스에서 관광객이 우르르 내렸다. 지역문화 해설사인 젊은 여성이 그들을 인솔하고 통일신라 때 지어진 거대한 절터 주변으로 이동했다. 관광객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산은 우람하긴 한데, 도대체 어디에 절터가 있단 말이요?”
여성 해설사가 마이크를 입에 대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절터니까요. 최근까지도 땅 아래에서 기와 조각이나 석조물 일부가 발견되곤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규모가 엄청난 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른 관광객이 물었다.
“언제 누가 지었소?”
“신라 경덕왕이 즉위한 서기 755년 착공해 764년 완공됐습니다. 절 이름은 백월산남사. 이 자리에 있던 허름한 한 암자에서 바로 앞선 성덕왕 때 두 명의 부처님이 나셨거든요. 그걸 기념해 지은 거예요.”
“두 명이나, 한꺼번에?”
“네. 노혜부득이란 스님께서 미륵부처로 먼저 현신 성불하시고, 뒤따라 나타난 달달박박이란 친구 분께서 아미타부처님이 되셨답니다. 고려 때까지 두 부처님 모습을 빚은 상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부득 스님께선 관음이 목욕하던 황금빛 물에 함께 목욕하시고 성불하셨다는데, 뒤늦게 도착한 박박 스님이 남은 물로 목욕할 때는 물의 양이 조금 부족했나 봐요. 그래서 아미타부처님을 새긴 상은 군데군데 얼룩덜룩했다는군요.”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산길을 따라 도로 버스로 향했다. 혼자 남은 해설사가 절터를 빙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일행 후미의 한 관광객이 외쳤다.
“우리 예쁜 처녀 해설사 양반! 빨리 안 오고 뭐해? 또 한 곡 불러줘야 될 거 아냐?”
방긋 웃으며 일행 쪽으로 움직이던 해설사가 대답했다.
“그럼요. 그게 제 일인 걸요.”
일행이 다 타고 버스가 출발하려 하자 사람들이 출입구에서 인원을 점검하던 해설사 이름을 연호하며 노래를 요청했다. 그녀가 차문을 닫으며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 게 제 역할이지요.”
* 이 작품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