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전신 유공 1982년 배터리 사업 도전 시사
1993년 배터리 충전식 전기차 개발 성공
2012년 에너지 밀도 가장 높은 전기차 배터리 개발
2019년부터는 차세대 리튬메탈배터리 개발 착수
SK이노베이션이 생산한 리튬이온배터리를 들고 있는 연구원. [SK이노베이션 제공]
전기차의 주행성능은 모터와 배터리에 달려 있다. 아무리 고성능의 모터가 있어도 배터리의 출력이 높아야 제 성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충전에 먼 거리를 갈 수 있어야 하는 만큼 배터리의 용량도 간과할 수 없다. 배터리의 무게나 크기도 중요하다. 자동차가 이동수단인 만큼 무게는 가벼울수록 좋다. 배터리가 작을수록 차량 내 여유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충전 속도와 내구성까지 신경 써야 한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배터리 업계 최전선’이라 불리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SK 전기차 배터리 후발주자 아냐
배터리 업계의 최전선에서 SK이노베이션(이하 SK)은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현재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는 대부분 리튬이온배터리다. 리튬이온배터리는 금속을 여러 장 쌓아서 양극과 음극을 만든다. 리튬 이온이 이 두 극을 오가며 축전과 방전을 하는 원리다. 전기차용 배터리의 양극과 음극에는 주로 니켈과 구리, 망간이 쓰인다. 이 중 니켈의 함량이 높을수록 출력과 용량도 커진다.올 8월 9일 SK는 ‘NCM구반반’ 배터리 상용화에 성공했다. ‘NCM구반반’은 니켈(Ni)과 구리(Cu), 망간(Mn)의 원소기호 앞 글자를 따 만든 이름이다. 각 원소의 비율은 각각 9:½:½이다. 니켈 함량이 높은 만큼 고성능의 배터리다. 미국 자동차 업체 포드는 2023년 출시 예정인 전기 픽업트럭 ‘F-150’에 ‘NCM구반반’ 배터리를 탑재할 예정이다. 9월 8일에는 현대·기아자동차와 협력체계 구축을 발표했다. 앞으로 현대·기아자동차가 생산하는 전기차에 대부분 SK의 배터리가 들어간다.
SK는 배터리업계의 후발주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리튬이온배터리에 한정된 얘기다. 전기차 배터리 개발 시점으로 보면 SK는 최고참이다. 이미 1993년에 배터리 충전식 전기차를 내놨기 때문이다. 1995년 리튬이온배터리 개발에 나선 LG화학(이하 LG)은 2009년에야 차량용 리튬이온배터리 양산을 시작했다. SK가 LG보다 16년 먼저 전기차 배터리 개발에 성공한 셈이다.
90년대에는 국내 유일 전기차 배터리 개발업체
1991년 대한석유공사가 전기 삼륜차를 개발했다는 내용의 매일경제 보도. [SK이노베이션 제공]
이 발언의 배경에는 1973년 시작된 중동발 석유가격 급등 사태인 ‘오일 쇼크’가 있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간담회 당시 “세계 각국은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인해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장기적으로는 가스, 전기, 태양에너지, 원자력, 에너지 축적 배터리 시스템 등 종합 에너지와 관련된 모든 사업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최 선대회장의 발언 이후 3년 만에 유공은 종합에너지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1985년 SK는 정유업계 최초로 ‘기술지원연구소’를 설립했다. 1991년에는 본격적으로 전기차 개발에 나섰다. 유공이 처음 개발한 전기차는 태양광 전지를 이용한 삼륜차였다. 이 실적을 바탕으로 이듬해 정부 지원 과학기술 개발 사업인 ‘G7 과학기술과제’에 선정됐다. 유공은 전기차용 나트륨-유황 배터리 개발 과제를 맡았다.
1년 만에 유공은 주목할 만한 결과를 이끌어 냈다. 1993년에는 5인승 자동차에 모터와 나트륨-유황 배터리를 달아 시험 주행에 성공했다. 유공은 당시 국내 전기차 성능 신기록을 세웠다. 유공 개발 전기차의 최고 속도는 130㎞/h, 1회 충전 시 주행 가능 거리는 120㎞를 기록했다. 1993년 국내 연구기관과 기업이 개발한 전기차의 최고 속도는 100㎞/h, 1회 충전시 주행가능 거리는 100㎞에도 미치지 못했다.
1996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재편이 시작됐다. 인산철 리튬이온배터리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1990년 개발된 초기형 리튬이온배터리는 리튬 금속을 양극으로 사용했다. 인산철이나 니켈, 구리, 망간 등의 촉매가 없으니 축전이나 방전 성능이 나트륨-유황 배터리에 비해 떨어졌다. 낮은 성능 때문에 전기차에는 사용이 어려웠다. 카세트, CD플레이어 등 소형 가전제품에만 사용이 가능했다. 한편 인산철 리튬이온배터리는 나트륨-유황 배터리와 성능이 비슷하다. 지금도 중국 기업은 인산철 리튬이온배터리를 전기차 배터리로 사용한다.
두 배터리의 경합은 2004년 리튬이온배터리의 승리로 끝났다. 나트륨-유황 배터리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나트륨-유황 배터리는 축전과 방전 과정에서 300℃가 넘는 고열이 발생한다. 배터리 내부의 전해질 액상이 흘러나가면 높은 온도 때문에 발화·폭발의 가능성이 높다. 배터리가 이동을 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전기차에 싣기에는 적합한 배터리가 아니었다. 현재 나르륨-유황 배터리는 태양광 발전소 축전지, 가정용 축전 배터리 등 고정된 장소에 놓는 배터리로만 쓰인다.
테슬라보다 주행 성능 앞서는 SK 배터리
1992년 유공의 사보에 실린 전기차용 배터리 연구 주관기관 선정 기사. [SK이노베이션 제공]
SK가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점은 2012년.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를 개발한 이후부터다. 니켈과 코발트, 망간이 들어간 리튬이온배터리는 인산철 리튬이온배터리에 비해 가볍고 크기가 작으며 출력이 높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안전성. 폭발·발화의 위험이 인산철 리튬이온배터리에 비해 높다. 특히 니켈의 비율이 높을수록 배터리가 폭발·발화할 가능성이 높다. 니켈 함량이 높을수록 에너지 밀도가 커지는데 좁은 공간에서 이온이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발열이 생길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SK는 ‘고품질 습식 분리막’으로 배터리의 발열 위험을 극복했다. 배터리 축전 및 방전 과정에서 리튬 이온은 니켈, 코발트, 망간으로 구성된 양극을 넘나들게 된다. 이 때 이온이 제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면 열이 발생하고 폭발이나 발화의 위험이 생긴다. 분리막은 이온의 이탈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SK의 습식 분리막은 타사 제품에 비해 안전성과 내열성이 높고 수명이 길다. 실제로 SK의 배터리를 사용한 전기차는 한 번도 배터리 발화나 폭발 문제로 구설에 오른 적이 없다.
SK는 최근 ‘NCM구반반’ 배터리 상용화에 성공하며 니켈 함유 비율을 90%까지 올렸다. 주행 거리만 따지면 현재 상용화된 배터리 중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을 이끌고 있는 테슬라의 대형 세단 ‘테슬라S’가 1회 충전에 460km를 갈 수 있다. SK의 NCM구반반 배터리가 탑재된 승용차는 한 번 충전에 500~700km를 달릴 수 있다. SK는 니켈 함유 비율을 95%까지 올리려 연구 개발에 힘쓰고 있다. 이 배터리가 개발되면 한 번 충전으로 700km 이상 달릴 수 있는 전기차를 만들 수 있다.
리튬메탈배터리는 SK가 주도할 예정
리튬이온배터리 개발의 공로로 20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존 굿이너프 미국 텍사스대 교수. 굿이너프 교수는 SK이노베이션과 협력해 리튬메탈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제공]
2019년 SK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존 굿이너프(John B. Goodenough) 미국 텍사스대학 교수와 손잡고 리튬메탈 배터리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굿이너프 교수는 리튬이온배터리의 아버지 같은 학자다. 1981년 리튬이온배터리를 개발하고 1996년 인산철 리튬이온배터리로 발전시켰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에는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성준 SK이노베이션 기술혁신연구원장은 “배터리 산업의 오늘을 만들어 준 굿이너프 교수와 차세대 리튬메탈배터리를 개발하는 것은 SK뿐 아니라 관련 산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의 유력 배터리 기업과 미국의 세계 최고 석학이 함께하는 만큼 배터리 산업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굿이너프 교수도 “SK와 협력해 차세대 배터리가 시장에 나오는 시점을 최대한 앞당길 것”이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