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동의 절차 추가한 시즌2에 게시글 급감
게시글 67.1%, 정견 표출·범죄자 엄벌 요구
정책, 법·제도 개선 요구 게시글 7.3% 불과
“김어준 하차” vs “김어준 사수” 勢 대결 양상
최장집 “숙의 과정 건너뛸 위험”…책임윤리 증발
장민지 교수 “‘국민소통’ 전시 장치에 그칠 우려”
KIPA 보고서 쓴 정동재 박사 “청와대가 수치에 집착”
김계조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이 5월 20일 청와대 사랑채 스튜디오에서 도로교통법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일부 개정안(민식이법)과 관련된 국민청원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제공]
2017년 8월 19일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이하 국민청원)에 대해 장민지 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가 공과(功過)를 짚었다. 국민청원 게시판이 문을 연 지 3년하고도 두 달, 한쪽에서는 ‘사이버 공론장’이라는 호평이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 대결장’이라는 날 선 소리가 서로 대립한다. ‘공론장’과 ‘대결장’ 사이 그 어느 언저리에 국민청원이 있는 셈이다.
국민청원은 그간 여론을 단번에 결집하는 데서 또렷한 힘을 발휘했다. 3월 21일 게시된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는 역대 가장 많은 약 272만 명의 동의를 받았다. n번방 관련 유사 청원 5건을 합하면 동의 수는 총 500만 회 이상이다. 그 뒤 성 착취물 제작 및 유포 혐의로 체포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의 신상이 공개됐다.
“통계, 이용하기에 따라 현상 미화”
2018년 10월 2일 게시된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친구 인생이 박살났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약 40만 명 동의)는 음주운전 처벌 수위를 높이는 ‘윤창호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다수가 청원에 동의하고 기성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의제가 설정됐다. 긍정적 방향으로 국민청원의 존재감이 빛을 발한 사례다.정권은 잔뜩 고무됐다. 청와대는 국민청원 도입 3주년을 맞은 8월 19일 ‘한눈에 보는 국민청원’이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해 각종 통계를 언론에 제공했다. 청와대는 이날 기준 총 청원 수 87만8690건, 총 동의 수 1억5088만8250회라고 밝혔다. 총 방문자 수는 3억3836만4174명으로 나타났다. 월평균, 일평균 방문자 수는 각각 943만3945명, 31만4464명이었다. 20만 이상의 동의를 받은 청원은 189건으로 집계됐다. 이 중 청와대는 178건에 응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같은 날 페이스북에 “정부의 답에 만족하지 못한 국민들도 계시겠지만, 국민 참여의 공간을 소중하게 키워간다면 그것이 바로 변화의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계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통계는 이용하기에 따라 현상을 미화하고, 허풍을 떨고, 대중을 호도하고, 현실을 조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중략) 숫자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숫자를 올바르게 활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게르트 보스바흐 외, ‘통계의 거짓말’ 중) 청와대가 애써 드러내지 않은 숫자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시계를 2019년 3월 31일로 돌려보자. 이날 오전 5시 국민청원 시즌2가 시작됐다. 시즌1 때는 청원을 올리면 모두 공개됐다. 시즌2에서는 30일 내에 100명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게시판에 글이 공개된다. 청와대는 두 시즌 사이의 단절선에 대해선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궁금증은 올해 8월 24일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행정연구원(KIPA)이 풀어줬다. 이날 KIPA는 ‘온라인 시민소통 및 참여 플랫폼의 역할과 한계: 청와대 국민청원제도 운영 성과 및 개선방안’이라는 제목의 이슈 페이퍼를 냈다. 집필진에 따르면 국민청원 시즌1 당시 분기별 평균 9만6723건 수준이던 게시글은 시즌2 개편 후 2060건으로 급감했다.
직접민주주의냐 만기친람이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적혀 있는 문구.
이를 두고 집필진은 “어떤 내용의 게시글이건 등록이 가능한 제도 설계는 행정부가 적절히 응답할 수 없는 내용의 게시글(예: 삼권분립 원칙에 따른 사법부, 정치인 등에 대한 처벌 관련)조차 20만의 동의를 받을 경우 응답을 해야 하는 딜레마를 야기한다”고 썼다. 이어 국민청원이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는 참여자들을 온라인상에 끌어모으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 간 세력 다툼의 양상으로 변질됐다”고 짚었다.
10월 11일 현재 동의 수 기준 상위 20개 게시글을 보면 문제가 또렷이 드러난다. ‘소규모 드라이브스루 집회 허가해 준 이성용 부장판사 탄핵청원’(7만4523명 동의)과 ‘수천억 원대 일가 비리 의혹 국민의짐 박덕흠 의원, 특검 실시하십시오!’(7만3049명 동의)가 단연 눈에 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해임을 요구하는 게시글도 9만7726명의 동의를 얻었다. ‘TBS 교통방송 아침방송 진행자 김어준 씨에 대한 하차를 청원합니다’(6만5992명 동의)와 ‘김어준을 지킵시다’(5만1971명 동의)는 동시에 게시돼 세 대결 조짐마저 엿보인다.
국민청원이 청와대의 만기친람(萬機親覽)식 국정 운영을 자극한다는 지적도 있다. 입법 권한이 없는 청와대는 여당을 통해 원하는 정책 현안을 구현한다. 이는 청와대가 모든 국정 현안을 총괄·조정하고 지휘하는 ‘청와대 정부’(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현상을 낳는다. 각종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시민의 목소리가 대의기관인 국회나 지방자치단체를 거치지 않고 국민청원 게시판으로 몰린다. 옹호론자들은 ‘대의민주주의의 폐해 보완’이라는 해석을 내놓지만, 비판론자들은 ‘포퓰리즘’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주장한다.
증발하는 책임윤리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2017년 11월 23일 강연에서 직접민주주의가 부작용을 빚은 사례로 국민청원을 들면서 “‘소년범을 무겁게 처벌하라’ ‘여성도 군대 보내라’ 등 깊은 논의가 필요한 이슈를 즉흥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여론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 차분한 숙의 과정을 건너뛰게 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막스 베버는 정치가의 두 가지 덕목으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꼽았다. 책임윤리는 정치적 선택이 초래한 결과에 무제한의 책임을 지는 태도를 뜻한다. 법적 근거가 없는 국민청원은 책임 소재를 흐릿하게 만든다. KIPA 집필진에 따르면 시즌2 개편 후 8월 24일까지 청와대가 청원에 답변한 게시글은 86건이다. 이 중 42건(48.8%)을 국민소통수석과 국민청원 운영 실무를 맡은 디지털소통센터장(대독)이 답변했다. 홍보 라인이 전면에 선 대신 문제 해결의 실무자인 정책 라인은 뒤로 빠졌다.
장민지 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권력은 청원에 답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문제 해결 여부와 상관없이 국민의 의사를 듣는다는 모양새를 갖출 수 있다. 자칫 국민청원이 ‘국민과 소통하고 있다’는 점만 전시하는 장치에 그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interview | 정동재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 부연구위원
“청와대가 수치에 집착…자극적 글 재확산”
한국행정연구원(KIPA)에서 나온 ‘온라인 시민소통 및 참여 플랫폼의 역할과 한계: 청와대 국민청원제도 운영 성과 및 개선방안’은 논쟁적인 보고서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에서 국민청원에 가감 없이 메스를 들이댄 점도 눈길을 끈다. 작성자인 정동재(47)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 부연구위원과 10월 12일 전화 인터뷰를 했다.
- 국민청원 시즌2 개편 후 정치적 견해를 표출한 글이나 범죄자 엄벌을 촉구하는 글이 많아 국민청원이 공론장의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썼던데.
“개편 이전에도 국민청원의 법적 근거가 불확실하고 관리자의 게시글 삭제 근거도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청와대가 문제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고민이 투영된 개편안이 나오길 희망했다. 막상 시즌2를 살펴보면 문제점을 개선했다기보다는, 문제점을 우회한 모양새가 됐더라. 100명 이상의 사전 동의 절차를 도입한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개편안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니 사실관계도 확인되지 않은 자극적 글이 올라오고, 그런 글이 단시간 내에 20만의 동의를 모은다. 이것이 다시 언론을 통해 재확산한다.”
- 최장집 교수는 국민청원을 두고 여론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다는 표현도 했다.
“국민청원은 정치 의제가 찬반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정쟁을 부추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제도를 처음 설계할 때부터 청와대가 게시글에 대해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했다면, 지금처럼 ‘판사를 파면하라’는 둥 정치인을 처벌하라는 둥의 글이 올라오지는 않았을 거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시즌2의 제도 개편 과정에서 사실상 논의되지 않았다.”
- 왜 청와대는 근본 해결책을 논의하지 않았을까.
“청와대가 수치에 집착하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청원을 중요한 업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청원은 국민이 의제를 꺼내고, 언론이 이를 되받아 확산시키는 이슈 메이킹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정치적 파급력과 폭발력이 있는 이슈가 올라와 끊임없이 정쟁의 장을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국민청원이 만들어낸 소통의 순기능이 더 크다고 판단하니 (현재 시스템을) 포기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 한국행정연구원은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데, 국민청원 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의 이슈 페이퍼를 낸 후 유무형의 압박은 없었나.
“제가 있는 곳이 국책연구기관이니 작성하는 내용에 대해 시민과 정치권, 또 청와대에서 다 지켜볼 수 있다. 굉장히 민감한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사들의 연구 독립성과 자율성이 침해받지 않도록 연구원 내에서 많은 도움을 준다. 또 이번 보고서를 쓸 때도 내부에서 여러 차례 모니터링을 했다. 저희가 작성한 내용에 대해 상위 기관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바는 없다.”
- 국민청원을 제대로 수선하면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나.
“국민청원의 본래 취지는 많은 국민이 불편해하지만, 정책 결정자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숨어 있는 정책 담론을 끌어내려는 데 있다. 훌륭한 취지다. 현재도 그와 같은 국민청원이 올라오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30일 동안 20만의 동의를 받기가 매우 어렵다. 청와대가 소통 철학의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는 제도 개편을 위해 용기와 의지를 보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