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간 해전 주역 노선의 종언
新해양강국 영국, 스페인 해군 격파
‘함포 사격전’(英) vs ‘함상 백병전’(西)
화물 적재량 많은 범선, 大항해시대 열어
영국 갈레온 선박. [‘Bermuda 100’ 홈페이지]
범선(帆船)의 ‘범(帆)’은 돛을 뜻한다. 노선은 노를 통해 사람의 힘에서 추진력을 얻는다. 범선은 돛을 통해 바람의 힘에서 동력을 얻는다. 비유하자면 노선은 순간적으로 속력을 올리는 단거리 육상 선수다. 100m 달리기 선수는 불필요한 무게를 줄이려고 신발조차 최대한 가벼운 것을 신고 달린다. 마찬가지로 노선 설계의 핵심은 물과 마찰을 최소화하고자 몸집을 줄이는 것이다.
그 덕분에 속도는 빨라졌지만 단점도 분명했다. 좁은 곳에 틀어박힌 노잡이들은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했다. 식량 등 보급품을 실을 공간도 제한됐다.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제국은 기독교도들을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노잡이로 부렸다. 노잡이들은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로 인해 독이 오르거나 기아에 시달려 일찍 죽었다.
범선은 마라톤 선수와 같다. 먼바다로 나가 오래 항해하기에 보급품을 많이 실어야 한다. 갈레온(Galleon)이 대표적이다. 이 배에는 노 없이 돛만 있다. 선미가 둥근 과거 배와 달리 사각형이다. 배 뒤에서 부는 바람을 타기 유리한 사각 돛과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탈 수 있는 삼각 돛이 동시에 장착됐다. 돛들을 섬세하게 조종하기 위해 수십, 수백 개의 밧줄이 달렸다. 밧줄을 구분하고자 각 밧줄에 사람처럼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大항해시대와 범선
노선 시대가 끝나고 범선 시대가 시작된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대포의 발달, 다른 하나는 지리상 발견이다. 중국 송나라 시대(960~1279)에 개발된 대포는 13세기경 유럽에 전해져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1337~1453) 때 활용됐다.처음에는 대포의 위력이 약해 성벽에 접근하는 공성탑을 파괴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점차 성을 공격하는 쪽도 대포를 활용했다. 대표적 사례가 오스만제국 술탄 메흐메드 2세(1451~1481)가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1543)이다. 헝가리의 대포 기술자 우르반이 만든 69문의 초대형 대포가 콘스탄티노플성(城)을 40일 동안 2만 회 포격해 함락했다.
대포가 군함에 활용되지 않을 리 없었다. 멀리 떨어져 대포로 파괴할 수 있다면 굳이 위험한 충각(衝角)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필요가 없다. 사력을 다해 노를 젓는 노잡이도 필요 없어진다. 대포를 장착하자 군함의 전투 대형(隊形)도 변했다. 노선 시대에는 전투 직전 아군 군함이 뱃머리를 적진으로 향하는 종렬진을 사용했다. 범선 시대에는 대포를 많이 장착한 배의 측면이 적진을 향하는 횡렬진이 대세가 됐다.
15세기부터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유럽에서 인기를 얻고, 중국의 나침반이 유럽에 소개돼 항해술이 발달했다. 15세기 초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했다. 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마젤란은 스페인에서 동쪽 항로(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지났다)로 필리핀에 도착했다(1505~1512). 다시 반대로 스페인에서 서쪽 항로(대서양을 건너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해협을 뚫고 태평양을 지났다)로 필리핀에 도착했다(1519~1521). 최초의 세계 일주 성공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항해로 입증한 일이기도 하다.
유럽인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과 태평양을 오가면서 배도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식량과 보급품을 싣고 전투에 쓸 대포까지 장착해야 했다. 상선도 해적의 약탈을 막고자 대포로 무장한 경우가 많았다. 신대륙까지 대규모 인력과 물자를 수송할 필요도 있었다.
스페인의 자존심 무적함대 ‘아르마다’
영국 남동부 끝 ‘도버’와 프랑스 북부의 ‘칼레’ 지역은 30㎞의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이 해협을 영국에서는 도버, 프랑스에서는 칼레라고 한다. 1588년 칼레해협에서 벌어진 ‘칼레 해전’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가 영국 해군에 격파당한 전쟁이다. 지금도 스페인 축구대표팀을 ‘아르마다’라고 할 만큼 무적함대는 스페인의 자존심이다.당시 스페인과 영국의 국제적 위상은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스페인은 카를5세가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이 분할돼 수립됐다.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신대륙 아메리카의 절반 이상을 선점한 유럽 최강국이었다. 영국은 유럽의 북서쪽 끝에 위치해 무역의 주도권을 잡기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섬나라였다. 칼레 해전을 축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이 한국에 원정 경기를 왔다가 대패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스페인과 영국이 칼레 해전을 벌인 원인은 여러 가지다. 표면적 이유는 네덜란드를 둘러싼 문제다. 구교(가톨릭) 종주국 스페인은 1566년부터 식민지 네덜란드에 총독을 보내 현지 신교(개신교)를 탄압하고 상인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네덜란드는 윌리엄 공을 필두로 독립전쟁(1568~1648)을 시작했다. 영국이 네덜란드를 지원하면서 스페인과 갈등이 생겼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신교도였을 뿐 아니라, 영국 대외무역의 3분의 2가 네덜란드를 교두보 삼았다. 스페인 침략의 다음 차례는 영국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양국 왕가 사이의 구원(舊怨)도 무시할 수 없다. 스페인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속국으로 만들고자 영국 메리 1세 여왕과 결혼했으나 사별했다. 생전에 메리 1세는 이복동생 엘리자베스(훗날 엘리자베스 1세 여왕)를 반역 혐의로 런던탑에 가두기도 했다. 메리 1세의 부왕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고자 전처 캐서린과 이혼했다.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과 단교까지 감수했다. 메리 1세는 캐서린의 딸, 엘리자베스는 앤 불린의 딸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을 수 없었다.
메리 1세가 죽고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펠리페 2세는 그녀에게도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앙심을 품은 펠리페 2세는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구교 신도인 메리 스튜어트를 부추겨 엘리자베스 여왕을 축출하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를 반역죄로 처형해 버렸다(1587). 이 일도 칼레 해전의 원인 중 하나다.
‘왕실 공인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신대륙을 둘러싼 이권 다툼도 칼레 해전의 원인이다. 영국의 지리적 조건은 유럽 내 무역에 불리했다. 유럽 끄트머리의 섬나라여서다. 신대륙 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과 가까운 영국은 해외 진출 기회를 포착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교황의 승인을 근거로 자국에 신대륙 관련 기득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신교 국가로서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대륙에 대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권리도 인정할 수 없었다.1569년 스페인이 멕시코에 정박한 영국 선박의 선원들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귀족 출신으로 군인이자 무역업자, 선박 설계가이기도 한 존 호킨스의 배였다. 스페인의 선원 살해는 영국인의 공분을 샀다. 호킨스는 훗날 영국 해군위원으로 대(對)스페인 전쟁에 나서 자기 선원의 죽음을 설욕했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스페인의 도발을 좌시하지 않았다. 1577년 유럽과 신대륙을 오가며 해적이자 탐험가로 활약한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스페인 배를 약탈할 권한을 승인했다. 이처럼 왕에게 약탈권을 허가받은 배를 사략선(私掠船)이라고 한다. 드레이크가 사략선을 이끌고 스페인 배들을 약탈하자 펠리페 2세는 대사를 보내 영국에 처벌을 요구했다. 오히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 대사가 보는 앞에서 드레이크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1580년 여왕은 스페인 대사에게 “영국은 교황의 기증으로 신대륙이 스페인 소유가 됐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후 네덜란드나 프랑스와 같은 신대륙 개척의 후발주자들도 같은 주장을 했다. 이 무렵부터 신대륙 영토 배분 기준으로 ‘실효적 지배’가 중시됐으며 오늘날에도 영토주권의 판정 기준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페인 신대륙 소유, 인정하지 않는다”
1588년 칼레 해전 기록화. [영국 국립해양박물관]
이듬해 1587년, 드레이크는 공격 계획을 알고 스페인 해안을 급습해 함선 37척과 화물을 불태워 버렸다. 드레이크가 불태운 스페인의 물자 중에는 식량 보관용 나무통을 만들 목재도 있었다. 스페인은 출정을 1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산타크루즈 제독은 과로로 죽어버렸다. 그를 대신해 사령관이 된 인물은 메디나 시도니아. 뛰어난 행정가였지만 전쟁 경험은 전혀 없었다.
1588년 5월 23일 130척으로 구성된 스페인 무적함대가 마침내 리스본을 출항했다. 갈레온 20척, 무장상선 44척, 수송선 23척, 소형 보조선 35척, 갈레어스선 4척, 갤리선 4척이었다. 포(砲)는 중포 1100문을 포함해 2431문을 적재했다. 승조원은 8500명, 보병은 1만9000명이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태운 것은 레판토 해전과 같은 백병전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영국은 전투함 120척에 소형 함선 50척을 준비했다. 다만 스페인과는 다른 방식의 전쟁을 준비했다. 영국은 헨리 5세 때 왕립 해군을 창설했다. 헨리 8세 때는 왕립 조선소를 설립해 해군력을 증강했다. 갑판 아래 또 갑판이 있는 다중갑판을 설치해 대포를 더 많이 장착할 수 있도록 했다. 대포를 실은 포가(砲架)의 바퀴를 네 개로 늘려 재장전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영국 해군위원이 된 존 호킨스는 기존 갈레온의 선체 높이를 낮추고 앞뒤 전장을 길게 늘였다. 배가 전체적으로 유선형을 띠어 안정성이 높아졌다. 빠른 속도를 내도 전복되지 않았다. 함미에 삼각 돛을 하나 더 추가해 조타가 수월해지고 기동성도 높아졌다.
화력도 영국 측이 압도적이었다. 스페인은 장거리 철포인 컬버린 포를 21문밖에 확보하지 못한 반면, 영국은 153문이나 보유했다. 중거리 포도 스페인이 151문, 영국은 344문 보유했다. 바퀴가 달린 영국의 포는 재장전이 쉬웠지만 스페인의 포는 종일 몇 발 쏘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 앞바다 북해는 원래 바람이 심하고 거칠다. 자국 바다에 익숙한 영국인의 돛과 배를 다루는 기술이 스페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영국은 흔들리는 배에 익숙한 선원이 대포를 다뤘지만 스페인은 육군 포병이 다뤄 조준이 쉽지 않았다.
영국의 압도적 화력
7월 31일 이른 새벽, 양국의 함대가 영국 남부 바다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다. 스페인은 오목한 초승달 대형을 갖추었다. 기존에 보지 못한 대형이라 영국 해군은 적잖이 당황했다. 스페인은 레판토 해전 때처럼 영국 배에 접근해 갈고리로 끌어당긴 다음 백병전을 벌이고자 했다. 반면 영국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 포를 쐈다. 양측이 수많은 포를 쏘았으나 거의 명중시키지 못했다. 전쟁 첫 주는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지나갔다.스페인 함대는 파르마 공의 병력을 태우려고 칼레보다 조금 더 북동쪽에 위치한 덩케르크 해안에 정박하고자 했다. 네덜란드 근해는 수심이 얕아 흘수(배가 물에 떠 있을 때 물속에 잠겨 있는 부분의 높이)가 높은 스페인 함선이 정박할 수 없었다. 스페인 함선이 정박할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은 지점은 영국 해군에 선점당했다. 게다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파르마 공은 제때 병력을 이끌고 덩케르크 해안에 도착하지 않았다. 스페인 함대는 칼레 해협 한가운데 투묘(바다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정박한 상태)한 상태로 막연히 파르마 공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8월 7일 밤, 영국은 어둠 속에서 불을 지른 배 8척으로 화공을 시도했다. 당시의 어뢰인 셈이다. 스페인 함장들은 화선(火船)에 화약이 잔뜩 실렸다고 믿고 공포에 질렸다. 닻줄을 절단하고 긴급히 출항을 시도하면서 배들은 서로 충돌하고 대열이 흐트러졌다. 무적함대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아르마다’ 격파 후 英 승승장구
때마침 강력한 남서풍이 불었다. 영국에서는 이를 ‘프로테스탄트 신풍(神風)’이라고 한다. 영국 함대는 바람을 등졌다. 포를 쏘면 더 멀리 나갔으며 항해에도 유리했다. 바람은 스페인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스페인 함선의 선체가 크고 높아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강력한 남서풍을 정면으로 거슬러 전투하기는 어려웠다. 영국 해군은 도주하는 스페인 함대를 90m 거리까지 쫓아 포를 쐈다. 큰 타격을 입은 스페인 함대는 영국 열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빙 돌아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함선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앞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좌초했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항해로 승조원 수천 명이 기아로 죽어갔다.한 해 전 드레이크의 습격에 따른 후유증도 선원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당시 공격으로 식량 보관용 나무통을 급조하느라 목재를 충분히 말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식과 물이 쉽게 부패해 많은 승조원이 병사했다. 패주한 무적함대는 9월 말에야 스페인으로 귀항했다. 44척의 함선과 수천 명의 유능한 승조원·군인을 잃은 후였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1596년과 1597년 영국을 재침공하려고 출동했으나 두 차례 모두 폭풍으로 실패했다.
1604년 두 나라가 평화협정을 체결해 전쟁은 일단락됐다. 영국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인도를 경영했고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북아메리카에는 엘리자베스 1세를 기념하는 도시 ‘버지니아’가 건설됐다. 반면 스페인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조덕현, ‘전쟁사 속의 해전’(신서원, 2016). 양욱, ‘포격은 해군력의 핵심 수단 일깨웠다 : 해상전투의 패러다임을 바꾼 칼레 해전’(국방저널, 2015). 프랜시스 로빈슨, ‘케임브리지 이슬람사’(시공사, 2002).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64-65부(국방TV).
정재민 | 전직 판사이자 현 행정부 공무원, 국제법 박사, ‘사는 듯 사는 삶’에 관심이 많은 작가, 쓴 책으로는 에세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혼밥판사’ 소설 ‘보헤미안랩소디’(세계문학상 대상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