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만난 두 분의 스승
韓 법조계 전관예우 말하자 “그건 뇌물” 일침
‘토착왜구’ 규정, 美백인 하층계급의 흑인 차별 연상
발밑에 다른 인간 깔고 앉아 쾌감
정부 당국이 몹쓸 행동 조장하는 듯
선량한 시민에게 억울한 누명 씌워, ‘독사의 자식들’
바이든 당선 이후 文정부 반일정책 수정 기미
최근 유니클로 국내 매장에 많은 인파가 몰렸다. 유니클로가 독일 출신 디자이너 질 샌더와 합작한 제품을 사려는 소비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온라인에서는 반일 불매운동의 취지를 져버렸다면서 유니클로에 방문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글이 돌았다. [뉴스1]
나는 1989년 한국 법관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파견됐다. 당시만 해도 해외로 파견되는 판사 수가 적어 경합이 치열했다. 14명의 판사가 지원했는데, 서열이 가장 밑인 내가 선발됐다. 지원자들은 미리 한국외대에서 일본어 시험을 치렀다. 시험관인 교수가 법원행정처를 일부러 찾아와 내 일본어 실력을 칭찬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이 내 선발로 연결됐다.
그해는 지금 퇴임한 ‘헤이세이(平成)’ 일왕이 즉위한 해였다. 일본 어디에서나 ‘평성원년(平成元年·헤이세이가 시작된 첫해)’의 밝은 소리가 울렸다. 당시 일본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계경제를 주름잡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일본의 경제력이 세계 전체 GNP(국민총생산)의 30% 내지 40%를 점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에 버금가는 ‘팍스 자포니카(Pax Japonica·일본의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까지 회자됐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일본을 배우러 몰려왔다. 나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두 일본인 스승과의 추억
당시만 해도 우리는 권위주의 정권에다 사회 모든 부분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서울올림픽을 잘 치러냈지만, 그것은 작은 성공이었다. 일본 체류 중 한 대학의 연구실을 배정받았다. 또 일본 최고재판소의 외국재판관연수원으로서 동경지방재판소 판사실에서 일본 판사들과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일본 땅 일본 바람’이라는 책을 썼는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에 일본과 비교해 한국 사법부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을 담았는데, 이것이 사법부 내에서 격분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1993년 내가 법관재임명에서 탈락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일본에서 나는 두 분의 귀중한 스승과 인연을 맺었다. 한 분은 히토쯔바시(一橋)대학의 스기하라 야스오(衫原泰雄) 선생으로, 일본 진보 헌법학의 태두(泰斗)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는 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를 개정해 일본을 전쟁 할 수 있는 보통 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우익에 맞서 평생을 싸웠다. 또 한중일 세 나라가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력했다. 3국 학자 간의 교류와 협력을 강조하며 빈번하게 한국과 중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2007년 한국헌법학회장으로 아시아권의 헌법학자들을 널리 규합, 한국 국회에서 ‘아시아헌법포럼’ 창설대회를 열었다. 사실 스기하라 선생이 뿌린 씨를 수확한 데 불과했다.
선생은 언제나 웃음을 머금은 화창한 얼굴로 조근조근 설명했다. 그 내용은 뼈대가 있고 힘이 들어 있었다. 어느 날 선생의 연구실을 찾았다. 추운 겨울이었다. 도쿄는 습도가 높아 겨울에는 추위가 뼛속으로 파고든다. 선생은 옛날 제국대학 시절 지어진 낡은 연구실에서 그나마 나오는 난방을 끄고 있었다. 뜨거운 물을 끓여 만든 차를 한 번씩 마실 뿐이었다.
이런 극도의 내핍과 절제의 생활을 하는 일본인들을 드문드문 보며 일본사회의 저력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날도 선생은 한중일 3국의 평화로운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역설했다. 근대 이후 일본의 국시가 되다시피 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들어가자)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화가 끝날 무렵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그분과 나의 유일한 사진이 됐다.
스기하라 선생은 그 무렵 일본에 오신 내 한국인 스승 김철수 선생을 만나 “신(申)상은 일본에 있으면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사람인데, 굳이 귀국한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라고 했다. 그 후 인생의 여러 어두운 골목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지금의 나이가 되고 보니, 선생의 말씀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뇌물이지요!”
또 한 분 소노베 이쯔오(園部逸夫) 선생은 192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선생의 부친은 서울법률전문학교(서울대 법대 전신) 교수로 있었다. 우리말로 ‘진고개’로 불리던 지금의 퇴계로 부근이 선생의 출생지다. 교수와 판사를 번갈아하다 나중에 최고법원의 판사(우리의 대법관)로 발탁됐고, 최고법원 부소장을 역임했다. 퇴임 후에는 황실전범(典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는데, 주된 의제는 여성이 황위에 오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하루는 잠이 오지 않아 캄캄한 새벽에 일어났다. 마침 배달된 요미우리신문에 ‘서울 출생’의 선생이 최고재판소 판사로 발탁됐다는 기사가 났다. 조금 기다려 전화를 드리니 놀랍게도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도쿄지방재판소에서 판사들에게 농담조로 이 일화를 얘기했더니, 어떤 부장판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혹시 내가 사무총국(우리의 법원행정처)에 안테나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직적인 일본사회는 차별이 일상화 돼 있지만, 일단 자신들이 속한 ‘나와바리’(영역)에 들어온 사람은 전혀 차별하지 않는다. 그 부장판사는 나를 자기들과 똑같은 일본 판사로 착각하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다.
선생은 특별히 ‘서울 출생’이라는 사실에 매여 있었다. 사모님이 “저이는 대륙의 사람이에요”라고 자주 말한 까닭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선생은 한국과의 인연을 무척 중히 여겼다. 마침 한국의 판사로서 내가 처음 일본에 파견되자 무엇이든지 베풀어주려 애썼다. 선생이 일본 체류 중인 나의 어려운 사정을 돌봐주는 ‘오세와닌’(お世話人)이라는 소문이 퍼져 지내기가 무척 편했다.
두 분은 정성을 다해 나를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다. 나는 두 분의 인격을 흠모했고,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많이 배웠다. 기꺼이 존경하는 스승으로 모셨다. 귀국 후 그분들이 한 번씩 한국에 오시거나 내가 학회 참석과 책 출판 등의 이유로 일본에 갈 때 뵈며 사제의 정을 나눴다.
2006년 10월 부산대, 경북대, 사법연수원, 헌법재판소에서 소노베 선생 초청 강연을 계획해 내가 선생을 모시고 다녔다. 서울 한강변 88올림픽도로 위를 택시 타고 지나던 중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대법관 출신 변호사라면 도장 하나 찍어주고서 수천만 원의 수임료를 챙기는 현실을 개탄하는 말씀을 드렸다. 선생은 그 말을 듣고 바로 “그것은 뇌물이지요!”라고 잘라 말했다. 선생도 일본 대법관 출신이지만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강연을 다니는 도중 법률신문과 대담이 잡혔다. 선생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과 제도를 급속히 도입했는데, 법관직을 맡길 자원이 전무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사무라이들을 응급으로 교육시켜 법관에 앉혔다고 한다. 우스운 말인데, 그래도 사무라이들은 명예를 생명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그로써 일본 법관의 염결성(廉潔性) 전통이 잡힌 셈이다.
다른 인간을 깔고 앉음으로써 느끼는 쾌감
2019년 8월 6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 서울 중구청이 태극기와 ‘노 재팬’ 배너기를 설치한 모습.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이제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을 피력해야 할 때가 됐다. 지금 한국에는 ‘토착왜구’니 뭐니 하면서 일본에 호감을 갖는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이상한 풍조가 퍼졌다. 어느 유명 작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된다. 민족 반역자가 된다” “150만 정도 되는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이나 미국에 대해 배척하는 의견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지만 이들은 공공연하게 나서지는 못한다. 반면 ‘배일’(排日)과 ‘반일’은 ‘반공’처럼 권력을 쥔 쪽에서 외치는 구호에 따라 속 편하게 동조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우리 사회의 주류로 편입된 것 같은 즐거운 착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요즘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거나 일본과 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 사회의 평범한 시민들이다. 과거 제국주의 일본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토착왜구’라고 공격한다. 미국에서 흑인을 공격하는 일부 하층계급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racism)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자기 발밑에 다른 인간을 깔고 앉음으로써 저열한 쾌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약한 자를 비겁하게 괴롭히는 전형적인 ‘불리잉’(bulling)이다. 이에 유니클로 매장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유니클로 개돼지’라고 마구 욕하는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 민족주의 혹은 친일청산이라는 거창한 외관을 취했으나, 사실은 이와 별로 관계가 없다. 앞에서 말한 그 작가는 지독한 반미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친미파’를 공격하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무슨 후폭풍을 겪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친일파’나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힘을 못 쓰는 약한 존재다. 그러니 마음 놓고 프레임에 넣어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고통스런 절규 담긴 한 통의 e메일
이런 조잡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피해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 당국은 이 몹쓸 행동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피해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본보기로 나에게 온 어떤 e메일을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간장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스런 절규가 글에 넘쳐난다.“빨갱이로 낙인찍거나 토착왜구로 낙인찍거나 그 찍기 수법과 폭력 논리는 별 차이가 없다는 지적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집사람이 일본인이고 올해 3월 다니고 있던 회사의 일본지사에서 약 2년 근무하다 한국에 들어왔는데, 너무나도 변한 대한민국의 현실 어디에다 눈높이를 맞춰야 할지,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총칼만 안 들었지 유사계급혁명이 진행 중인 내전국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문(文) 586집단이 근래 보여주는 패악질을 무너져 가는 자신들의 허구와 모순을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보고 있습니다. 권력은 유한하나 진실은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친일청산은 분명 필요하다. 그에 못지않게 우리에게 시급한 건 ‘대미 종속 관계의 청산’이다. 떳떳한 자주독립국가 실현을 위해 조만간 반드시 일궈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이나 미국이 우리의 경제적 번영에 큰 도움을 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향후 두 나라와 친선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일본인, 미국인들과도 상호신뢰와 상호부조의 틀을 더욱 탄탄히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단순히 유학을 갔다 왔다고 해서, 생업을 위해 일본과 접촉을 했다고 해서 어찌 모두 매국의 ‘토착왜구’인가?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하루하루 성실하고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죄, 나아가 그 사람의 마음에 원한을 품게 한 죄가 결코 작지 않다. 영문도 모르는 이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꼬드겨 ‘반일’ ‘반미’의 비열하고 잔인한 공격 대열에 가담시킨 죄는 한없이 크다.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독사의 자식’들이다. 아마 그들의 행위는 자손에까지 넘어갈 흉측한 업보가 될 것이다.
山紫水明과 지옥의 도가니
다행히 미국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승리한 이후 정부의 반일정책에 수정의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로 복귀해 세계 지도자국의 지위를 회복하려 할 것이다. 한미일 3국의 동맹을 전략적으로 최우선 과제에 넣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를 추종하는 게 타당한지 여부를 떠나, 과도한 반일 프레임으로 피해를 입은 억울한 사람들이 줄어드는 건 좋은 일이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한국을 지옥의 도가니로 몰고 가며 ‘토착왜구’ 소탕을 부르짖던 모습들이 조만간 완전히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늘과 바람과 별
일상이 내 생명의 꽃을 짓이기고
눈앞 풍경이 죄다 낡은 회색으로 비치던
어느 날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깨달았다
내 입김이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고
풍경의 내면이 출렁거리며 튀어나왔다
하늘이 눈 깜빡이며 속삭인다
이제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어
바람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지나간다
좀 늦긴 했어도 다행이야
그런데 정수리 바로 위 별 하나가 어깃장을 놓는다
고마움의 울타리를 쳐야
네가 얻은 것이 그대로 남을 수 있어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심수관’ 도공 일가를 그린 ‘고향을 어찌 잊으리이까’ 작가인 고(故)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선생은 1945년 일본이 세계 최강이라고 자랑하던 만주 관동군에 배속돼 있었다. 소련군이 8월 9일 선전포고 후 막강한 기갑부대를 앞세워 소만국경을 돌파하자 관동군은 순식간에 궤멸됐다. 선생은 패잔병이 돼 도보로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부산으로 가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선생이 전라도 지방을 걸을 때 조선의 하늘이 그토록 맑을 수가 없었다. 조선백자의 맑음과 통하는 것이었다. 패잔병으로서의 참혹한 기억에 남은 조선의 가을하늘은 그에게 평생 큰 영감을 주었다. [신평 제공]
● 1956년 출생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제23회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제13기
● 인천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대구지방법원 판사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헌법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