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다수 발생한 제조번호 백신 미(未)수거
의료기관 백신 접종 환경 미(未)개선
백신 유통 및 보관 감독 시스템 미(未)구축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10월 27일 세종시 한 병원에서 독감 백신을 맞고 있다. [뉴스1]
천은미 이화여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가 한 말이다. 10월 29일 0시 기준 질병관리청에 접수된 독감백신 접종 후 사망신고 건수는 72건이다. 16일 첫 사례가 보고된 뒤 연일 사망자가 늘고 있다. 그중 다수는 70대 이상(62명·86%)이다. 천 교수는 “현장에서 뵙는 어르신 환자 상당수가 두려움 때문에 독감백신 접종을 망설인다”며 “방역당국이 ‘독감백신 접종과 사망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고 단숨에 신뢰가 회복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독감백신 접종 후 이상반응 신고, 예년 10배 수준
10월 23일 서울 한 병원에 독감 백신 접종을 일시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독감 백신 접종 후 사망 사례가 이어지면서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의료기관은 자체적으로 백신 접종을 일시 중단했다. [뉴스1]
정은경 질병청장은 10월 24일 언론 브리핑에서 이런 현상의 배경에 “백신 안전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밝혔다. “올해는 독감백신과 관련해 이슈가 많았다. 상온유통 백신 때문에 국민이 불안을 느꼈고, 백색입자 발견으로 인해 두 번째 불안감이 생겼다. 예방접종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이 신고 증가로 이어진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고 풀이했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시민들이 평소보다 백신 접종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 것도 이상반응 신고 급증의 배경이 됐을 거라고 분석한다. 질병청 자료를 보면 독감백신 접종 후 사망 신고 건수는 2009년(8건), 2015년(12건)을 제외하면 매년 5건 이하에 머물렀다. 앞의 두 해는 각각 신종플루와 메르스가 유행한 때다. 감염병 유행과 신고 건수 증가 사이의 상관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우주 고려대 의대 감염내과 교수는 “올해 방역당국은 코로나19와 독감 동시 유행을 막겠다며 일찍부터 독감백신 접종 캠페인을 펼쳤다. 백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더 커질 환경을 조성한 셈이다. 그래 놓고 실수를 연발해 시민 불안을 키운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어르신 독감백신 접종률 53.4%, 목표에 30%p 미달
독감백신 안전성에 대한 불안이 확산하는 가운데, 개별 의료기관의 백신 관리 능력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는 자료까지 공개됐다. 오명돈 서울대 감염내과 교수팀이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 용역을 받아 2018년 7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전국 보건소와 병·의원을 조사한 뒤 작성한 ‘국내 생백신의 콜드체인 유지관리 현황분석 및 개선방안’ 보고서가 그것이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내용에 따르면 민간의료기관에서 백신 보관 시 적정온도(2~8℃)를 유지한 비율이 23.4%에 불과했다. 천 교수는 “나도 일선 병‧의원에서 백신 전용 냉장고를 쓰지 않고 성능이 떨어지는 일반 냉장고에 음식물과 백신을 같이 보관하는 걸 직접 본 일이 있다”며 “그럴 경우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이 출고 당시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고 밝혔다.문제는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독감백신 접종을 꺼리면 감염병 관리에 비상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이다. 2018~2019년 만 65세 이상 국민 독감백신 접종률은 84.3%였다. 2019~2020년에는 83.5%를 기록했다. 독감백신 무료접종 대상을 만 62세 이상으로 넓힌 올해는 10월 29일 현재 접종률이 53.4%에 머물고 있다. 예년에 비해 30%p 정도 낮다. 방역당국이 6월 ‘2020~2021절기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사업 계획’ 자료를 통해 밝힌 목표치(84.3%)에 크게 못 미친다. 전문가들은 “11월 말 안에 이 수치를 끌어올리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정부가 ‘안심하고 맞으라’는 말만 할 게 아니라 시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실질적 행동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사망자 다수 발생한 제조번호 백신 수거 및 조사결과 공개
첫 번째로 거론되는 게 사망자가 다수 발생한 제조번호 백신 수거 및 검사다. 방역당국은 독감백신 관리를 위해 같은 날 같은 원료를 이용해 같은 설비에서 생산한 백신군(群)에 동일한 제조번호를 붙인다. 이를 로트(LOT)번호라고 한다. 제조번호가 같은 백신 피접종자 가운데 이상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다수 발생하면 해당 백신 품질에 문제가 있다고 의심할 수 있다. 정은경 질병청장도 10월 22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부터 “같은 제조번호를 가진 백신 피접종자 가운데 추가 사망자가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때는 해당 로트를 봉인 조치하고 접종을 중단하면서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재검정을 요청할 것”이라고 답했다.당시만 해도 동일 제조번호 백신을 맞고 숨진 사례가 없었다. 같은 날 오후, 질병청 조사에서 이 사례가 확인됐다. 현재까지 피접종자 가운데 사망 신고가 2건 이상 접수된 백신 제조번호는 총 19개다. 한 제조번호 백신에서 4명 사망이 확인된 사례를 포함해 관련 사망자는 모두 48명. 해당 독감백신 수거 및 접종 중단 등의 조치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방역당국은 “해당 백신 접종과 중증이상반응 발생 사이의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망자 부검을 통해 독감백신이 사망에 이르게 만든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는 의미다.
김우주 교수는 “지금 국민이 궁금해 하는 건 독감백신의 안전성인데, 방역당국은 사망자가 기저질환 때문에 사망했다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다. 부검뿐 아니라 독감백신 검사 결과도 같이 공개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사망 사례와 연결된 제조번호 백신을 수거해 오염 및 변질 여부를 조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현재 개별 의료기관 냉장고에서 접종을 기다리는 백신이 검정 당시 품질성적서에 적힌 것과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는지, 정말 안전한지 확인하고 그 내용을 국민한테 투명하게 알려줘야죠. 질병청장이 국회에서 ‘같은 제조번호를 가진 백신 피접종자 가운데 추가 사망자가 나오면 식약처에 재검정을 요청하겠다’고까지 발언했습니다. 이 조치가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불안이 계속될 수밖에 없어요.”
의료기관 독감백신 접종 환경 개선
독감백신 안전성에 대한 불안이 확산하는 가운데 10월 22일 서울 강서구 한국건강관리협회 서울서부지부 독감 예방접종소에서 의료진이 독감 백신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정기석 한림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는 “고령자가 추운 환경에 장시간 노출되면 혈전이 생겨 돌연사 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우주 교수도 “고령자의 경우 기저질환이 없어도 혈관이 좁아져 있는 경우가 많다. 쌀쌀한 날씨에는 그러잖아도 좁은 혈관이 더욱 수축해 혈류가 감소한다. 그 영향으로 뇌나 심장으로 가는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하면 심근경색, 뇌경색, 뇌출혈 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질병청이 독감백신 접종 후 사망자를 부검한 결과를 보면, 고령자 사망원인 대부분이 심혈관 또는 뇌혈관 질환이다.
질병청이 올해부터 독감백신 접종 환경 개선에 나서긴 했다. 코로나19 확산 차단 목표로 의사 1인당 최대 접종 가능 환자 수를 100명으로 제한했다. 질병청이 배포한 ‘2020~2021절기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지원사업 관리지침’에는 ‘접종가능 환자 수 제한을 3회 위반할 경우 해당 의료기관과 독감백신 접종사업 계약을 해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문제는 독감백신 접종 예약시스템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졌다. 질병청이 하루 접종 인원을 제한하자 오히려 아침 일찍부터 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노인들 사이에 “늦게 가면 주사 못 맞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쌀쌀한 아침 시간 병원 앞 대기 행렬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독감백신 접종 후 중증 이상반응 발생을 줄이려면 지금이라도 백신 접종 환경을 혁신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의료기관 당 하루 최대 접종인원을 30명 수준으로 제한하고 예약자에게 우선권을 줘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질병청에 따르면 올해 독감 예방접종 사업을 위탁받은 의료기관은 전국에 2만1396개다. 여기서 하루에 30명씩 독감백신을 접종해도 하루 접종자가 64만 명이 넘는다. 10월 29일 기준 방역당국이 집계한 만 62세 이상 독감백신 미접종 인원은 800만 명이 채 안 된다. ‘하루 30명 시간표’를 따라도 11월 말까지 어르신 접종을 마치기에 충분하다.
현재 방역당국은 기회 될 때마다 고령자를 대상으로 “독감백신은 반드시 컨디션 좋은 날 맞으라”고 안내하고 있다. 김우주 교수는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며 “고령자들이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에 와서 따뜻한 환경에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며 쉬다가 천천히 독감백신을 맞고, 다시 15~30분간 쉬며 이상반응을 관찰한 뒤 집에 돌아가도록 하면 중증이상반응 발생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백신 유통 및 보관 감독 시스템 구축
독감백신 접종에 대한 국민 불안을 잠재우는 데 필요한 방역당국의 또 다른 ‘행동’은 백신 유통 및 보관 감독 시스템 정비다. 천은미 교수는 “코로나19를 비롯한 감염병 유행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장기적 관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독감백신 상온노출 사고 당시를 떠올려보세요. 방역당국은 ‘올해 국내에 공급된 모든 독감백신을 검사한 결과, 섭씨 25도 환경에 24시간 노출시켜도 품질 변화가 없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독감백신은 노출시간이 모두 24시간 범위 안에 있으니 효능과 안전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고요. 그 설명을 듣는데 저는 그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독감백신은 적정온도(2~8℃)에 보관해야 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 원칙이 깨진 마당에 ‘그래도 백신엔 문제가 없다’고 하면 신뢰가 회복됩니까. 저는 오히려 방역당국이 ‘어느 공장에서 생산한 백신 몇 개가 어느 의료기관으로 이동하던 중 상온에 어느 정도 시간 동안 노출된 걸 확인했다. 해당 백신을 빠짐없이 수거해 점검했더니 품질에 이상이 없었다’ 식으로, 개별 사례를 세세하고 투명하게 공개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 교수는 특히 “지금 국민에게 필요한 건 방역당국이 독감백신 생산 및 유통, 접종과정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이라며 “국민이 방역당국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고 투명하게 공개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천 교수는 정은경 질병청장이 10월 24일 언론 브리핑에서 “지난해 독감 예방접종 기간에 백신을 맞고 일주일 안에 숨진 만 65세 이상 고령자가 약 1500명가량”이라고 밝힌 데 대해서도 비판했다. 당시 정 청장은 최근 백신접종 후 사망 사례가 접종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 수치를 공개했다. 질병청은 과거 관련 자료를 발표한 적이 없으며, 이번에 통계청 자료 등을 취합해 계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 교수는 “그 시기 노인 사망자 가운데 약 1500명이 독감백신을 맞았다는 얘기와 지금 독감백신 접종 후 이상반응 신고가 이어지는 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질병청이 괜한 혼란만 부추긴 꼴”이라며 “그보다는 현재 방역당국이 백신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를 알리는 쪽에 더욱 힘을 집중하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