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부터 북한 공무원 피살 사건까지 성난 민심
인터넷 짤·밈과 결합… 드립·디테일 돋보일수록 인기
비호하는 척 비꼬기, 창의적 표현으로 촌철살인 날리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 유행어 낳아
“차별받지 않는 사회 기대했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아”
‘국민의짐’ 구실 못하는 야당도 조롱거리로 전락
“자기 이해관계, 취향, 이슈 따라 반응 제각각”
불평등·불공정·불의에 항의하면서 정치권을 꼬집는 패러디물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쏟아지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파란색 바탕에 지구본 모양이 그려진 책 표지 문구가 흥미롭다. 책 제목은 ‘없는 살림에 자녀 유학 보내는 비법’. 공동 저자는 ‘륜미향·리인영·림종석·킴두관’, 출판사 이름은 ‘도서출판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자녀를 유학 보낸 이인영 통일부 장관, 김두관·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 임종석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특별보좌관 등을 풍자한 ‘없는 살림에 자녀 유학 보내는 비법’.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정치 패러디물 봇물, 단골 소재는 文정부 인사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김조원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등 정부·여당의 주요 인사를 ‘부동산 어벤져스 강사’로 소개한 패러디물.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불평등·불공정·불의에 항의하고 정치권을 조롱하며 꼬집는 패러디물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쏟아지고 있다. 현 정부와 여권의 위선과 민낯을 풍자하는 게시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주목할 것은 이런 정치 패러디물이 적지 않은 이의 호응과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패러디물마다 “이게 나라냐”라며 비아냥대는 댓글이 올라온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강조한 현 정부와 여권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 배신감 등이 복합적으로 표출되는 모습이다.
국내에 패러디가 보편화하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이 대중화한 2000년대 이후부터다. 1998년 인터넷 매체 ‘딴지일보’가 등장하고, 1999년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사진 합성 패러디가 확산하면서 유행이 시작됐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 명대사인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를 “이게 최순입니까? 확siri(시리·애플사의 음성인식서비스) 해요?”로 바꾼 패러디물이 그런 경우다. 시간이 흐르면서 패러디는 드라마·영화 포스터 합성이나 말장난 수준을 넘어 짤(인터넷에 나도는 각종 자투리 이미지 파일)과 동영상 등 콘텐츠 제작 쪽으로 진화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요즘 인기 정치 패러디물에 대해 “팩트 중심 서술, 기발한 발상, 재치 만점 문구가 조화를 이룬다”고 평가한다. 과거처럼 자극적인 비난을 쏟아내기보다 슬쩍 꼬아서 조롱하는 ‘돌려 깎기’ 기법으로 가벼운 웃음을 유발한다. ‘톡톡 튀는 드립’도 최근 정치 패러디물의 특징이다. 드립이란 상황과 맞지 않은 이미지나 엉뚱한 발언을 총칭하는 신조어다.
‘여론 통제’ 논란에 휩싸인 윤영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풍자한 게시물.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누리꾼들은 ‘응용 버전’도 만들어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설정하고 ‘○○○ 들어오라 하셍’이라고 쓴다. 예를 들어 정부와 여당이 13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통신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올려놓은 뒤 “SKT·KT·LGU+ 들어오라 하셍”이라고 대꾸하는 식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1년여 동안 인터넷에 등장한 정치 패러디물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정치·사회·경제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패러디물 여러 개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다. 이 가운데 대중의 호응을 얻은 일부 패러디물이 인터넷에 계속 돌아다니면서 또 다른 버전을 만들어낸다”고 분석했다.
쉽게 만들고 쉽게 소비… 인터넷 짤·밈과 결합도
김조원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집 내놓기 쇼’와 문재인 정부의 위선을 겨냥한 풍자물. 인터넷 ‘짤’로 유명한 일본 만화 ‘이누야사’ 캐럭터 히구라시 카고메의 사진과 대사를 패러디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문재인 대통령이 사용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라는 표현은 온라인 공간에서 다양하게 쓰인다.
상대방을 비호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비꼬는 반어법 패러디물도 반응이 뜨겁다. 유튜브에 올라온 ‘조국 후보자 딸 사태’라는 제목 영상은 한영외국어고를 졸업한 딸을 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외고 폐지’ 주장에 대해 “정말 공명정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한다. 다음 장면에서 ‘공명정대의 표본!’이란 자막과 함께 포청천(송나라 시대 판관)의 얼굴이 등장하고, 화면 위로는 “hoxy… 포청천? 누구의 손인지 증명할 수 있느냐?’ ‘진정한 법무부 장관감일세’ ‘공정한 박수소리 ASMR: 짝짝짝짝’이라는 자막이 덧씌워진다. 반어적 표현으로 조 전 장관을 조롱한 것이다. 이 영상은 10월 중순 현재까지 167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스마트폰 대중화로 패러디물을 이전보다 더 쉽게 만들고 쉽게 소비한다. 패러디물을 만드는 과정이 쉽고 간단할수록 표현법은 진지함보다는 가벼운 유쾌함을 추구한다. 풍자할 때도 자극적인 문구보다는 원작에 대한 비틀기나 비꼬기를 선호한다.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짤이나 밈 문화와 결합해 만든 패러디물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호하는 척 비꼬기, 촌철살인 날리기
연평도 공무원 피살 사건을 풍자한 ‘조두순의 사과문’과 ‘윗집 아저씨가 우리집 강아지를 때려 죽였어요’ 패러디물.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창의적 표현으로 촌철살인을 날리는 댓글형 패러디는 많은 이의 공감을 얻는다.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 요원 직고용 관련 기사에서는 “이것이 K직고용” “기회는 불평등, 과정은 불공정, 결과는 부정의”라는 댓글이 누리꾼의 큰 호응을 얻었다. ‘K직고용’은 문 대통령이 코로나19 방역 성과를 자랑하며 쓴 ‘K방역’에, ‘기회는 불평등’은 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인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에 각각 비유한 말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 특혜 의혹을 패러디해 만든 게시물들. ‘카톡 휴가 신청놀이’ ‘오늘은 내가 당직사병이다’ ‘군무이탈자’ ‘화랑무공훈장 추천서’ 등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추 장관 관련 말장난 패러디물의 압권은 한 누리꾼이 ‘추미애 지키기’에 앞장선 김종민 민주당 의원의 발언, “보좌관이 아들 서모 씨 부대에 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외압은 아니다”를 패러디해 지은 ‘유체이탈 화법 모음’이다. ‘언쟁은 했지만 싸우지는 않았다’ ‘식사는 했지만 밥은 안 먹었다’ 식의 단순 조롱을 넘어 ‘공짜 현금을 퍼주지만 세금 낭비는 아니다’ ‘울산선거에 개입은 했지만 법은 지켰다’ 등 현 정부의 이중성을 저격한다. 이 패러디물은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각종 논란의 축약판이다.
드립력, 디테일 돋보일수록 반응 뜨거워
4·15 총선 당시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마라토너에 빗대 풍자한 게시물.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공공의대 학생 선발 관련 시·도지사 추천 팩트체크’를 패러디해 만든 ‘공공의대 학생 선발 관련 시도지사 추천 특권체크’.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자영업자 정재용(30) 씨는 “현 정부 출범 때는 누구나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는 정치권을 비꼬는 패러디물을 보면서 위로와 만족을 얻는다. 인터넷상에서는 언어나 행동이 더욱 자유롭기 때문에 비틀기나 비꼬기를 강조한 패러디물이 큰 인기를 얻는다”고 말했다.
자기 이해관계, 취향, 이슈 따라 반응 제각각
미래통합당의 새로운 당명 ‘국민의힘’을 ‘국민의짐’으로 풍자해 만든 이미지.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국민의힘 전신(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로고를 한데 모아 만든 ‘힘×당’.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가족기업 특혜 의혹’이 불거진 박덕흠 의원(무소속)을 풍자한 패러디물.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인기 정치 패러디물에 반응하는 대중은 어떤 성향을 보일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현대는 개인화 시대다. 전 세대에서 폭발적 반응을 얻는 콘텐츠가 등장하기 어렵다. 대중은 정치적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일관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이해관계, 취향, 이슈 내용에 따라 달리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인 사안도 어제는 반응했다가 오늘은 반응하지 않는 식이다”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