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가짜 농부는 땅을 사고 진짜 농부는 풀을 벤다”

[이 사람의 삶] 유기농 말고 ‘자연농’ 깊은샘블루베리농장 김영일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1-04-28 10: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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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대에 귀향, 전북 진안고원에서 ‘풀치기’ 하는 낭만농부

    • 무비료 무퇴비 무농약, 건강한 땅에서 잡초와 상생하는 작물

    • 색깔도 크기도 제각각 달걀 한 판에 담긴 뜻

    • 닭 수명은 25년, 마당을 뛰놀며 알 낳는 10년생 암탉

    • 햇볕, 구름, 바람이 만든 씨도리배추로 김장 축제

    • 농사는 자연과 대화, 자연농부의 시간은 돈이 아닌 정성

    • “오늘도 배추님, 고추님께 문안인사 드리고 돌아옵니다”

    전북 진안군에서 무농약, 무제초, 무비료, 무퇴비, 무경운 5무(無) 원칙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있는 김영일(오른쪽), 배덕희 씨 부부. [지호영 기자]

    전북 진안군에서 무농약, 무제초, 무비료, 무퇴비, 무경운 5무(無) 원칙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있는 김영일(오른쪽), 배덕희 씨 부부. [지호영 기자]

    4월 10일 토요일
    “어제 오후와 오늘 아침 토종 생강 심었습니다. 작년에 토종 배추, 무, 당근 심었던 자리인데 망초(잡초)에게 양해를 구하고 심다 보니 겨울에 살아남은 당근들이 잎을 너풀거리는군요. 지난겨울 영하 23~24도 동토에서 살아남은 당근들 고맙다. 사랑해. 당근들 사이에 생강 심고 마늘, 양파들과 봄 인사 나눴습니다. 주말 오후엔 블루베리 옮겨 심을 힘을 쓰기 위해 ‘모래재너머’(진안고원에 있는 농가 레스토랑)에 스테이크 칼질하러 왔어요.”

    4월 11일 일요일
    “낭만농부의 자연농 블루베리 농장엔 많은 야생화들이 서식합니다. 그중 토종 가시엉겅퀴. 블루베리 나무에 세 들어 살면서 기 안 죽고 기세등등 군락지로 변해 버렸습니다. 인간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하는지라 행여 밟을세라 조심조심 피해 다닙니다.”

    4월 12일 월요일
    “낭만농부가 토종 고추(6품종) 농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까닭은? 자연농 김장김치를 담그기 위해서입니다. 씨내림 70일차 고르게 잘 자랐습니다. 10일 이내에 정식(定植·온상에서 기른 모종을 밭에 제대로 심는 일)하기 위해 3일 전부터 사이를 벌려줘 통풍과 햇볕을 골고루 받게 해주고 밤에 보온 덮개를 안 덮어 빳빳하게 경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전북 진안 ‘깊은샘블루베리농장’ 주인 김영일 씨 일기(페이스북)를 훔쳐본다. ‘낭만농부’라는 별칭만큼이나 그의 일기에서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자연농, 토종, 면역력, 잡초 같은 단어다.

    “농약 안 친 거니까 아껴 먹어라”

    김영일(66), 배덕희(67) 씨 부부는 귀농 12년차 농부이자 무농약, 무제초, 무비료, 무퇴비, 무경운 5무(無) 원칙을 고수하는 자연농(자연재배, 자연농법) 전도사다.



    서울 강남에서 큰 규모로 건축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김영일 씨는 2010년 귀향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남으로서 아버지 병구완이 목적이었고 농사지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늘 자식들에게 농산물을 보내면서 “농약 안 친 거니까 아껴 먹어라, 애들 먹여라”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니 아들 둘 키우면서 들쳐 업고 병원 간 적이 없고, 과외 안 시키고도 제 앞가림 잘 하며 산다. 문득 먹을거리가 우리 건강과 인성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건강하게 지켜온 땅을 남 주기 아까운 마음도 있었다. 아내가 흔쾌히 귀농에 동의해 주니 거리낄 게 없었다.

    “유기농은 알겠는데 자연농은 뭐가 다른가요?”

    사람들이 그에게 던지는 첫 질문은 늘 같다. 화학비료와 살충제 같은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퇴비를 포함해 어떠한 영양제도 주지 않고 자연 상태에서 자라게 하는 농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또 묻는다.

    “그렇게 내버려둬도 잘 자라나요?”

    심지어 논과 밭을 갈지도 않는다(무경운). 그는 지난 12년 동안 5무 원칙을 무너뜨린 적이 없다. 오히려 원칙을 하나 더 얹었다. 무(無)시설. 쉽게 말해 온실 재배나 비닐 멀칭(mulching·농작물을 재배할 때 경지 표면을 덮어주는 재배 방식)도 하지 않는다.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야물게 크는 작물

    닭들이 건강한 사료를 먹고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라는 깊은샘블루베리농장 축사. 이곳 닭들은 원할 때 교배하고 알을 낳으며 천수를 누린다. 사진 속 맨 앞에 있는 암탉이 10년생 청란닭이다. [지호영 기자]

    닭들이 건강한 사료를 먹고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라는 깊은샘블루베리농장 축사. 이곳 닭들은 원할 때 교배하고 알을 낳으며 천수를 누린다. 사진 속 맨 앞에 있는 암탉이 10년생 청란닭이다. [지호영 기자]

    4월 첫날 전북 진안군 성수면 깊은샘블루베리농장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가까워질수록 흐드러진 봄꽃이 벌써 낙화 채비를 하는데 고갯길로 접어들자 계절이 거꾸로 흐른다. 기대했던 초록빛 대신 아직 을씨년스러운 황톳빛이다. ‘북쪽은 개마고원, 남쪽은 진안고원’이라더니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 걸쳐 있는 진안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고랭지답게 일교차가 심하다. 대신 하루에도 추웠다 더웠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동식물은 더 야물게 자란다.

    오후 3시. 택배로 보낼 농산물 꾸러미를 챙기는 농부의 손이 한창 분주한 시각이다. 당일 도정한 쌀, 갓 짠 생들기름.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크기도 빛깔도 제각각인 달걀이다. 청리재래닭, 청란닭, 흑계, 맛닭 등 여러 품종 닭 600여 마리(사실 농부도 정확한 마리 수 세기를 포기했다)가 낳은 것인데 일반 달걀에 비해 작고 갸름하다. 암탉은 그날그날 제 컨디션에 따라 알을 낳기 때문에 하루 평균 출하량 개념도 없다. 그저 택배 시간에 맞춰 한 판 채워지면 운이 좋은 날이다.

    “사람들이 닭의 무게와 크기에 따라 몇 호 닭이 더 맛있네 하며 갑론을박 하기에 제가 한 마디 보탰어요. 같은 기간에 더 크게 자란 놈일수록 맛대가리 없다고. 큰 달걀, 작은 달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닭은 1.2kg 정도 성장하는 데 6~8개월이 걸립니다. 지난해 3월 세상에 나온 청리닭 새댁들이 9월 말경에야 초란을 낳기 시작했어요. 자유롭게 뛰어놀며 건강한 사료를 먹고 좋은 컨디션으로 교미하면 연간 100여 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지난겨울 너무 추우니까 닭들이 알을 안 낳아요. 4일간 모은 달걀이 한 집 보낼 양밖에 안 나왔으니까요. 일반 양계장이라면 보온시설 해주고 영양제, 촉진제 먹여서 산란율을 높이겠지만 우리는 인간 탐욕을 채우려고 산란촉진법을 쓰지 않아요. 사람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의욕이 떨어지고 몸을 보호하려고 쉬듯이 식물, 동물도 똑같아요.”

    닭장은 골짜기 안쪽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외지인이 다가가자 수탉을 중심으로 무리 지어 놀던 닭들이 떠들썩하게 경계경보를 울리며 잽싸게 우리 안으로 숨어든다.

    “자연 상태에서 닭의 수명은 20~25년인데 우리가 ‘치킨’이라며 먹는 닭은 평균 28~35일 속성으로 키운 것이죠. 햇빛이 차단된 상태로 최소의 수면 시간과 밀식사육으로 GMO(유전자변형생물) 곡물가공사료를 먹여 키운 닭이니 면역력이 떨어질 수밖에요. 그렇게 28일 키운 닭이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농부가 마당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는 10년생 암탉을 가리킨다. 청란닭으로, 회색 깃털엔 윤기가 자르르하고 여전히 알도 낳는단다. 8~9년생 청리재래닭도 여러 마리 있다. 자연 수명대로 사는 팔자 좋은 닭들이다.

    “닭도 인간과 같아서 암탉이 더 오래 살아요. 암컷을 10여 마리씩 거느린 장닭이 위세 당당해 보이지만 결국 수컷들끼리 피 터지게 영역 싸움하다 먼저 죽죠.”

    닭똥 냄새? 안 나는 게 정상

    이곳 닭장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흔히 축사에서 나오는 불쾌한 냄새가 없다는 것이다. 600여 마리의 닭이 배출한 닭똥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발아래 폭신폭신하게 밟히는 하얀 가루가 그것이다. 닭장 바닥에 닭똥이 20cm 이상 쌓여 있는데도 신발 바닥에 달라붙지 않는다. 닭장 짓고 5년 동안 닭똥을 한 번도 치우지 않았다는 말에 더 놀랐다. 고슬고슬한 계분의 비밀은 사료에 있다. 이곳 닭들은 농부가 직접 재배한 곡물의 미강, 싸라기, 풀, 채소에 굴껍질, 조개껍데기를 갈아서 발효시킨 사료를 먹는다. 특히 자연농으로 키운 배추겉잎은 최고의 별식이다. 이곳에서 자란 작물은 겉잎 하나 버릴 게 없다. 어느새 농부가 갓 낳은 달걀을 가져다 접시에 깨뜨렸다. 연노랑색 탱글탱글한 노른자가 투명한 흰자 위로 봉긋 솟는다. 날달걀인데도 비린 맛이 전혀 없어 한입에 호르륵 마셨다.

    깊은샘농장의 닭똥은 품질 보증된 유기농 퇴비라며 서로 가져가겠다고 야단인데 정작 김영일 씨는 닭똥 한 줌이라도 작물 쪽으로 떨어질까 봐 철저히 관리한다. 닭장뿐만 아니라 그의 밭에서 냄새가 안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맘때쯤 농촌 마을을 지나다 보면 달리는 차 안으로까지 가축분 퇴비에서 나오는 시큼털털한 냄새가 스며들곤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시골 냄새, 고향 냄새라고 여기지만 김영일 씨는 “음식물 쓰레기, 축산농가 분뇨, 하수종말처리 슬러지를 모아 공장에서 발효시켜 만든 것이 유기농 퇴비”라며 “봄에는 풀꽃 향기가 나야 하는데 요즘 농촌에는 역겨운 퇴비 냄새만 난다”고 했다. 자연농은 왜 화학비료뿐만 아니라 유기농 퇴비마저 거부할까.

    “유기농 퇴비에는 질소 성분이 많아서 작물 성장을 촉진해요. 열매도 많이 맺히고요. 대신 100% 해충이 달려들어요. 해충은 질소 성분이 많은 텁텁한 토양을 좋아하거든요. 반대로 담백하고 까칠한 토양에서 자란 작물을 해충도 ‘재수 없다’며 지나쳐요. 해충이 생기면 농약 쳐야죠. 안 치면 해충은 더 달려들죠. 도시인들이 채소, 과일 먹을 때 가장 걱정하는 게 잔류 농약 아닌가요? 화학 질소 성분이 많은 과채류는 쉽게 부패하고 쌀에선 푸른곰팡이가 핍니다.”

    유기농 퇴비로 웃자란 작물은 쉽게 썩어

    진안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고랭지로 일교차가 심하다. 여기서 자라는 블루베리는 단맛, 신맛이 골고루 섞여 있다. [지호영 기자]

    진안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고랭지로 일교차가 심하다. 여기서 자라는 블루베리는 단맛, 신맛이 골고루 섞여 있다. [지호영 기자]

    깊은샘농장은 약 40만㎡(1만2000여 평) 규모다. 닭장과 농막 사이 언덕배기에 블루베리를 심고, 농막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폐교 운동장에선 벼농사를 짓는다. 지력 유지나 농장 정비를 위해 휴경하는 땅 외에는 배추, 고추, 감자, 양파, 마늘, 생강, 깨, 파, 팥 등 다양한 작물을 순환해 심는 복합영농이다. 재배하는 작물이 몇 종인지 헤아려본 적은 없지만 부부의 밥상 위에 오르는 것은 대부분 직접 길러냈다.

    주력 작물인 블루베리는 품종이 노스랜드, 레카, 블루타, 노스블루, 저지, 코빌, 엘리자베스, 루벨 등 30여 종에 이른다. 열매는 작아도 성분 함량이 높아서 단맛, 신맛이 골고루 나는 것들이다. 일교차가 큰 진안고원은 블루베리 생육에 딱 좋은 환경이라고 한다.

    “지난겨울이 혹한이라고 했지만 블루베리는 영상 6도에서 영하 25도 사이에 숙면을 취하기 때문에 추위는 괜찮아요. 오히려 온난화가 되면 나무가 제대로 잠을 못 자서 열매가 튼실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50일간 비가 오는 바람에 수확량이 30%가량 줄었고 품질도 전년 대비 80% 수준에 그쳤어요.”

    농부는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받아야 한다. 그 이상은 인간 욕심이라는 걸 지난 그는 지난 12년간 농사를 지으며 배웠다.

    “5년 전 블루베리 수확이 끝난 뒤 갈색매미충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나무를 덮어버렸어요. 너무 화가 나서 살충제를 한 번 뿌릴까 살짝 갈등이 생기더군요. 전문가에게 상담했더니 ‘지금까지 해온 것 다 포기하려면 농약 치세요’라고 해요. 허탈하더군요. 수확이 끝나고 잎이 다 진 나무에 농약을 쳐도 이듬해 열매에서 농약 성분이 검출된다는 겁니다.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나뭇가지에서 벌레 먹은 자리를 일일이 가위로 잘라냈어요. 끝만 살살 깎아서 펜으로 써야 할 것을 몽당연필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아깝던지.”

    배추에서 양념까지 자연농 김장 축제 기획

    서울 강남에서 건축인테리어 사업을 하다 2010년 귀향한 김영일 씨는 이제 이웃들이 ‘농사 박사’라고 칭할 만큼 인정하는 자연농 전문가가 됐다. 그가 토종 고추 모종을 돌보고 있다. [지호영 기자]

    서울 강남에서 건축인테리어 사업을 하다 2010년 귀향한 김영일 씨는 이제 이웃들이 ‘농사 박사’라고 칭할 만큼 인정하는 자연농 전문가가 됐다. 그가 토종 고추 모종을 돌보고 있다. [지호영 기자]

    요즘 부부가 애지중지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은 토종 고추다. 무(無)시설이 원칙이지만 육묘만큼은 예외다. 1월 혹한과 폭설에도 음성재래초, 칠성초, 앉은뱅이초, 빵빵이초, 청룡초, 붕어초 등 토종 고추를 파종해 육묘 하우스에서 온도, 습도, 일조량을 관리하며 세 차례 이식을 거쳐 4월 말 정식을 앞두고 있다. 올해 김장김치 성패는 바로 이 토종 고추 수확량에 달려 있다.

    “지난해 배추 2000포기로 김장을 했는데 자연농 고춧가루가 부족해 절임배추 수십 통을 포기해야 했어요. 관행농(慣行農)에서는 고추에 농약을 많이 치기 때문에 아무 고춧가루나 가져다 쓸 수도 없죠. 올해는 자연농 하는 농부들이 각자 배추, 무, 파, 갓, 고추, 생강 등 김장거리를 재배한 뒤 한날 모여서 100% 자연농 김장 담그기를 할 겁니다. 알싸한 씨도리김치는 자연의 맛 그 자체죠.”

    원래 ‘씨도리’란 씨를 맺도록 남겨놓은 배추를 가리킨다. 재래종 조선배추는 눈 속에서 겨울을 나는데 뿌리는 얼어 죽지 않고 있다가 봄에 장다리가 노랗게 올라오면서 씨를 맺는다. 깊은샘농장에서 기른 자연농 배추는 작달막한 데다 속이 차지 않고 딱 벌어진 모양새가 씨도리배추를 닮았다. 몇 년 전 서울 반가음식 대가 고(故) 김숙년 선생이 진안까지 직접 찾아와 배덕희 씨가 담근 김치를 맛본 뒤 지어준 이름이 ‘씨도리김치’다. 속이 차지 않은 못난이 배추에 대한 농부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비료와 퇴비 힘으로 자란 배추는 땅이 얼면 뿌리와 줄기도 얼어서 해동되는 순간 썩어버립니다. 그러나 무비료, 무퇴비, 무농약으로 키운 자연농 배추는 기온이 영하 8~9도로 떨어져도 얼지 않고 낮 동안 기온이 올라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싱하게 살아나요. 강한 생명력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낫 하나로 농사짓는 사람 처음 봐”

    여름부터 가을까지 농부는 낫 하나 들고 밭으로 나간다. 비온 뒤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는 ‘풀치기’ 칼춤이 시작된다. 바닥이 보이도록 여물 썰 듯 잡초를 잘게 난도질하면 은신처를 잃은 해충, 쥐, 뱀, 진드기가 떠나가고 충분한 햇빛과 시원한 통기로 유해 곰팡이가 사라진다.

    “작물과 잡초는 같이 자라면서 경쟁을 해요. 형제 많은 집에서 밥 한 그릇 놓고 경쟁하는 것과 같죠. 그러면서 작물은 더 강하게 자랍니다. 베인 잡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유기물이 되죠. 그게 상생이에요.”

    그의 신명 난 풀치기를 지켜보던 70대 고참 농부가 다가와 “밭도 안 갈고, 낫 하나로 농사 짓는 사람 처음 봐”라며 엄지척을 한다. 12년 전 그가 귀농했을 때 “서울서 사업하던 사람이 어찌 농사를 짓겠느냐”며 혀를 차던 동네 사람들이 요즘은 “엊그제까지 풀밭이었는데 어느새 다 벴네. 어찌 그리 (농사) 박사여, 배워야겠어”라며 응원한다.

    투기 목적으로 땅을 사는 가짜 농부들이 뉴스를 도배할 때 그는 진짜 농부의 사명을 되뇐다.

    “농부는 몸으로 때우는 것을 힘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산하는 사람은 마음이 후해야 한다. 농사꾼이 돼야지 장사꾼이 되지 말자.”

    기계와 시설, 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관행농에 대한 유혹이 생길 때마다 하는 다짐도 있다.

    “농사는 자연과의 대화, 자연농부의 시간은 돈이 아니라 정성.”

    ‘깊은샘’이라는 농장 이름에는 물이 마르거나 넘치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 깊은 샘처럼 변치 않는 마음으로 자연농을 고수하겠다는 낭만농부의 집념이 담겨 있다.

    #자연농 #깊은샘블루베리농장 #진안고원 #낭만농부 #김영일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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