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후 염색체 이상은 산전 비침습검사(NIPT)나 정밀 초음파검사로 걸러낼 수 있다. Gettyimage
39년간 난임의사로 지내오면서 요즘처럼 “자식을 꼭 낳아야 합니까?”라는 반문을 많이 들은 적이 없다. 단연코 말한다. “낳을 수 있다면 없는 것보다 있으면 좋지요!”라고. 여기에는 개인의 의견을 넘어, 인간이 오랜 세월 동안 이어온 ‘생명을 남긴다’는 본능적 결단과 역사적 사명이 담겨 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다양해졌다고 해도 생명을 잇는 일만큼은 인류가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지난 5000년 동안 40회 이상 큰 전쟁을 치렀고, 세계적으로 약 1만6000회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인류는 생명을 잉태하는 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 기근과 폐허를 극복하며 자손을 이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기에 오늘날 우리는 최첨단 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다.
자손은 선택 아닌 운명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에게는 12남 17녀, 모두 29명의 자식이 있었다. 조강지처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만 8남 4녀가 태어났다. 그중 태종이 서른여덟에 얻은 늦둥이 막내딸 정선공주의 짧은 삶은 인간에게 자손이 어떤 의미인지를 일깨우는 상징적 이야기라 할 수 있다.정선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외가(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의 비극적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12세에 남휘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과의 불화로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열여섯에 어머니(원경왕후)를, 또 열여덟에 아버지(태종)를 떠나보내야 했으니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다. 보호받아야 할 나이에 잇따른 부모의 상실을 견뎌야 했고, 의지할 곳도 기대어 울 품도 없이 왕실의 거친 바람 속에 홀로 서야 했다.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던 정선공주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기구하게 살다 간 정선공주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이들은 훗날 한국사에 크게 이름을 남겼다. 손자가 바로 남이장군(1443~1468)이고, 신자승과 혼인한 딸의 증손녀가 신사임당이다. 그리고 신사임당의 아들이 우리가 잘 아는 율곡 이이다.
우리는 결혼과 임신이 ‘사랑의 결실’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감정이 안정되고, 관계가 평온하고, 경제적 여건이 갖춰지고, 마음이 준비된 상태여야 비로소 출산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정선공주를 통해 알 수 있듯 결혼과 출산이 꼭 그렇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정선공주의 불행한 혼인, 부모의 죽음, 외로운 성장은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이다. 하지만 사랑도, 안정도, 평온도 없던 삶 속에 태어난 그녀의 자식들은 조선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뤘다. 이는 생명이 반드시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사의 가장 깊은 동력은 때때로 사랑보다 강한 ‘생명의 의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또한 자손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올 생명은 온다. 결코 인간의 뜻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임신과 출산이란 인간의 계산과 의지보다 훨씬 더 큰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에서 전쟁과 가난의 시기를 지나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다산(多産)은 결코 축복만은 아니었다. 한 일화가 있다. 이미 여섯 아이를 낳아 키우던 마흔다섯 살의 한 여성은 몸에 태기가 느껴지자 일곱째를 품을 자신이 없어 섬돌(문턱과 마루 사이의 돌 디딤대)에서 몸을 던져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로 곤두박질쳐 보기도 했다. 몸을 다치게 해 자연유산을 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리 뛰고 굴러도 유산이 되지 않자 그녀는 ‘수양버들 강아지 꼬리’라 불리는 독초를 달여 마시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심지어 스스로 물레방아에 깔려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할 만큼 다치기도 했지만 배 속의 아이는 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고 박정희 대통령(1917.11.14.~1979.10.26.)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차치하고, 그가 한국을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산업·수출 중심 국가로 이끈 지도자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출산을 기피하는 이들 중에는 “집안에 유전병이 있어서 자식을 안 낳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자와 난자가 만들어질 때 DNA는 단순 복제가 아니라 ‘재조합’을 거치며 완전히 새로운 조합으로 바뀐다. 따라서 부모가 가진 취약점이 자식에게 그대로 전달될 가능성은 오히려 적다. 유전병이 있어도 건강한 아기가 태어날 수 있다. 부모가 보인자라 하더라도 자식이 정상일 확률이 훨씬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靑出於藍 靑於藍(청출어람 청어람)”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이치를 ‘청출어람(靑出於藍)’ 혹은 ‘청어람(靑於藍)’이라고 표현했다. 스승과 제자뿐 아니라 자식도 부모를 닮아 나오지만 때로는 더 나은 존재로 태어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더욱이 현대 의학은 부모의 불안을 크게 줄였다. 이식 전 배아를 검사하는 PGT-M, PGT-A를 통해 단일 유전병은 사전에 차단할 수 있고, 임신 후에도 산전 비침습검사(NIPT), 정밀 초음파 등으로 염색체 이상을 높은 정확도로 걸러낼 수 있다. 부모가 가진 유전적 위험이 자손에게 대물림될 확률이 과거에 비해 놀라울 만큼 낮아졌다.또 어떤 부부들은 “엄마와 아빠가 학습 능력이 떨어졌으니 아기도 저능아가 아니면 뒤처질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다고 들었다. 지능은 단일 유전자가 아니라 수백 개의 ‘작은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복합 형질이다. 유전학자들은 지능을 결정하는 유전적 요소가 1%씩 미세하게 작용하는 수백 개의 조각의 합이라 설명한다. 이 조합은 매번 다른 정자와 다른 난자가 수정돼 새롭게 섞이므로 부모보다 더 뛰어난 조합이 나오면 나왔지, 뒤처질 것을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생명은 늘 더 나아지려는 쪽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반복했다.
분명한 점은 인간의 뇌는 후천적으로 계속 변화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아이의 뇌는 성장 과정에서 수십억 개의 시냅스를 새로 만들고, 집중력과 기억력, 문제해결력 등 핵심 기능을 환경과 훈련에 따라 강화한다.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위인들의 탄생과 삶을 보면 상당수의 부모가 평범했으며 삶도 녹록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귀띔을 하자면 여성의 지혜와 지능은 미래를 밝히는 힘이라는 점이다. 지능에 관여하는 수백 개의 유전자 중 상당수가 X염색체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XY)은 엄마의 머리를 닮고, 똑똑한 부부의 딸(XX)은 특히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지혜롭고 총명한 여성들이 IVF(시험관아기시술)를 받으러 오거나 난자은행에 난자를 동결하겠다고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