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北 흉노, 東 조선 漢에 함께 맞서다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입력2016-09-22 11: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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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109년 가을, 한나라 군대가 왕검성으로 진군해 조선을 윽박질렀으나 대패했다. 흉노군이 한군의 배후를 노릴 상황이 조성됐다.
    • 결국 한무제는 조선과의 강화를 추진하는데….
    1953년 중국은 한(漢)나라 이후 중국인이 줄곧 활동해온 지역이라는 ‘역사적 권리’ 등을 근거로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에 둘러싸인 남중국해에 U자형 9단선(南海九段線, 소가 혀를 늘어뜨린 모양 같다고 해서 ‘牛舌線’이라고도 한다)을 긋고, 선의 안쪽은 모두 중국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최근 들어 남중국해 파라셀(西沙), 스프래틀리(南沙) 군도의 크고 작은 암초 주변을 매립한 후 활주로와 대공(對空) 미사일 기지, 대잠(對潛) 헬기 기지 등 군사시설과 항만 등대 등 각종 시설을 조성했다. 베트남, 필리핀 등의 반대에도 2012년 7월 24일 파라셀 군도의 융싱다오(永興島)를 치소(治所)로 해 파라셀, 스프래틀리, 메이클즈필드(中沙) 3개 군도를 관할하는 싼사(三沙)시 출범식을 개최했다. 싼사시 출범 5일 전인 7월 19일 남중국해를 관할하는 싼사군사경비구역도 설치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대립해온 필리핀은 2013년 1월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중국을 제소했다. PCA는 지난 7월 12일 9단선 등 중국의 주장을 거의 대부분 배척한다고 판결했다. 중국의 해양굴기(海洋崛起) 정책이 중대한 장애에 부딪힌 것이다.



    문명의 십자로, 오르도스

    중국은 1949년 정부 수립 이후 동서남북의 거의 모든 인접국과 영토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다. 한국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 획정 △고대사 문제 등을 두고 중국과 갈등한다. 고대사 문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        

    춘추시대 최강국은 산시(山西)성을 중심으로 한 진(晋)나라였으나, 기원전 403년 진나라가 조, 위, 한 3국으로 분열하면서 천하통일은 서방의 강대국 진(秦)과 남방의 강대국 초(楚)의 대결로 넘어갔다.

    오랑캐(戎)라는 말을 듣던 진(秦)나라는 위(衛)를 비롯한 상(商)나라 고토(故土) 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해 법가식(法家式) 개혁을 추진했다. 25명의 재상 중 외국 출신이 17명, 평민 출신이 9명이나 됐다. 또한 진은 외교·군사 정책을 이용해 각개격파하는 전략인 연횡책(連衡策)으로 라이벌 초나라의 대진(對秦)정책을 무력화했다.

    반면 개혁 부진에다 진나라의 연횡책에 농락당해 내분에 빠진 초나라의 국력은 크게 기울었다. 왕전 부자가 이끄는 진의 대군은 기원전 223년과 기원전 221년 각각 연(燕)과 제를 잇달아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했다.

    통일제국 진의 적은 북방의 흉노였다. 진은 통일의 여세를 몰아 흉노와 흉노의 왼팔 격인 조선(朝鮮, 이 글에서는 1392년 창건된 조선과 구분하고자 사용되는 ‘고조선’이라는 표현 대신 본래 이름인 ‘조선’으로 표기한다), 우이(武夷)산맥 이남의 월족(越族)을 압박했다. 진시황(秦始皇)은 통일 6년 후인 기원전 215년 대장군 몽염(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줘 조선을 랴오허(遼河) 동쪽으로 몰아냈으며, 태자 부소(扶蘇)와 하투(河套), 즉 오르도스로부터 흉노 세력을 축출하고 장성을 수축게 했다.

    오르도스는 황하가 북으로 크게 호(弧)를 그리는 만리장성 이북의 황하 중상류 스텝 지대를 가리킨다. 인류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으로 분화하기 이전에 번성하던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교차하는 문명의 십자로였다. 오르도스의 오원은 삼국지의 맹장 여포의 고향이기도 하다.

    동북아 인류가 농경민족과 유목·삼림민족으로 분화한 이후 오르도스는 농경민족과 유목민족 간 생사를 건 전쟁터이자 문물이 교환되는 장터였다. 한족은 때로는 공세적 방어의 수단으로, 때로는 증가한 인구로 인한 토지 부족을 타개하고자 오르도스로 진출했다.

    터키계 중심 유목국가

    진시황이 30만 대군을 주둔시킨 지 약 100년 후인 기원전 127년 한무제(漢武帝)는 오르도스의 흉노를 축출하고, 산둥과 허난(河南) 등지로부터 10만여 명의 백성을 이주시켜 흉노에 대항케 했다.

    이주한 한족 농경민은 농사를 짓고자 오르도스의 땅을 파헤쳤다. 건조 지역의 농업은 표토(表土) 상실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기름진 표토를 잃어버린 초원은 본래의 모습으로 쉽사리 돌아가지 않는다. 풀도 잘 자라지 않는다.

    흉노와 선비, 몽골 등 유목민은 땅을 갈아 표토를 망치는 한족 농경민을 증오했다. 농경민이 유목민을 소와 말이나 키우는 냄새나는 야만인이라고 경멸했듯, 유목민도 땅에 엎드려 농사를 짓는 농경민을 땅강아지라고 멸시했다.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호복기사(胡服騎射)’의 나라 조(趙)에 멸망당한 적족(狄族)의 나라 중산(中山)의 예에서 보듯, ‘적(狄)’으로 불리던 터키계 유목민은 기원전 7세기 이후 스키타이와 주(周)로부터 자극을 받아 국가 체제를 갖춰나갔다. 흉노는 하나의 종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만주, 서로는 아랄해(Aral Sea)까지를 영토로 한 터키계 중심의 고대 유목국가를 뜻한다. 흉노는 문자 기록은 남기지 못했으나, 바지와 등자(鐙子), 반월도, 버클 등 많은 이기(利器)를 우리에게 전해줬다.

    농경민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유목민의 나라도 통합과 분열을 반복했다.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유목사회는 지도자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데, 영명한 지도자를 추종하면 의식주가 쉽게 해결됐기 때문이다. 유목사회는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급속히 통일됐다가 그가 죽으면 쉽게 분열되곤 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 사망 후 진나라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어리석은 아들 호해가 시황을 계승했는데, 정권을 장악한 이사와 조고는 오르도스에 주둔하던 부소와 몽염을 속여 자살로 몰아갔고 권력투쟁을 계속해 진을 위기에 빠뜨렸다.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시달리던 초, 제, 한 등 제후국 백성들의 불만은 진시황이 죽은 이듬해 진승과 오광, 항적(항우)과 유계(유방) 등의 반란으로 터져 나왔다. 진나라는 그로부터 3년 후인 기원전 206년 항적과 유계에 의해 멸망했다.


    흉노 왕자가 신라 왕실 선조?

    김일제는 함께 포로가 된 일족 망하라의 무제 암살 기도를 저지한 공로 등으로 훗날 거기장군(車騎將軍)까지 승진하고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김일제는 그를 따르는 흉노인을 모아 분봉지인 산둥성의 금성(金城)을 도읍으로 투국(秺國)을 세웠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서한(西漢) 시대에는 번영했으나, 왕망의 서한 찬탈에 협력한 탓에 광무제 유수(劉秀)에 의해 투국이 폐지되는 등 동한(東漢) 시대에는 쇠락했다.

    신라 문무왕릉비에는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이(秺侯祭天之胤傳七葉以), 십오대조성한왕(十五代祖星漢王), 강질원궁탄영산악조림(降質圓穹誕靈山岳肇臨)’이라는 구절이 있다. “투후(김일제) 이래 7대를 이어갔으며, (문무왕의) 15대조 성한왕(김알지로 추정)은 신령한 산에 바탕을 내리고,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가 됐다”는 뜻이다. 즉, 신라의 김씨 왕실은 흉노의 왕자이자 서한 거기장군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4세기 무렵 신라에 갑작스레 등장한 적석목곽분과 금관문화는 스키타이-흉노 계열의 문화로 해석된다. 공교롭게도 김일제가 분봉받은 투국의 도읍 금성(金城)과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이 발음은 물론 한자도 똑같다.

    진·한이 교체되는 혼란기에 조선에서는 왕조가 바뀌었다. 농·목업을 주업으로 한 조선은 비단을 생산하고 명도전도 널리 사용했다. 조선은 발해만과 서한만 등을 무대로 해상활동도 활발히 했다. 우거왕 이전부터 조선은 흉노와의 교류를 통해 확보한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漢),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국가 간 중계무역 이익을 독점했다.

    한나라의 정치·군사적 압박이 심해지자 우거왕은 흉노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한나라는 기원전 110년부터 조선 원정을 준비해 기원전 109년 가을 육군, 해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공했다. 누선장군 양복은 산둥 해군 5만 명을 거느리고 산둥반도에서 보하이만을 건너 조선의 도성 왕검성으로 진격했으며, 좌장군 순체는 지금의 베이징 지역인 위양-유베이핑 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육지로 진군했다. 양복은 주력인 육군의 진격이 지체되자 7000명을 선발해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다 조선군에게 대패했다. 순체의 육군도 한나라와 조선 간 국경을 이루던 패수(浿水) 유역에서 조선 육군에 격퇴됐다. 흉노군이 한군의 배후를 노릴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무제는 위산을 파견해 조선과 강화를 추진했으나 결렬됐다.



    기원전 107년, 조선 멸망

    이후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해 조선을 재침공했다. 2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조선 지배층 사이에 분열이 생겨 우거왕이 피살되고 화친 세력은 한나라로 망명했다. 성기(成己)가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조선은 결국 기원전 107년 멸망하고 말았다.

    기원전 107년 함락당한 왕검성, 기원전 108년부터 설치된 한군현, 패수의 위치 등을 두고 논란이 있다. 조선-한나라 전쟁 당시 살아 있던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포함해 중국과 한국의 모든 사료를 뒤져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유적과 유물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서의 기술을 검토해보면 왕검성이 대동강 북안(北岸)에 위치했다거나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주장은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한군(漢軍)의 진군 과정과 전쟁 상황 기술에 비춰볼 때 맞지 않다. 흉노군을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치중부대(輜重部隊)를 포함한 한나라 육군 5만 명이 베이징 부근에서부터 진군해 조선군의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1300㎞나 떨어진 청천강 유역까지 진군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에서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일부의 주장 역시 사리에 맞지 않는 듯하다. 사서에 나타난 전쟁 상황 묘사와 지리 분석 결과 등에 비춰볼 때 패수는 다링허나 롼허로 추측되며, 왕검성은 랴오허 유역 어딘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한군현 중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강 유역설 △랴오허 유역설 △롼허 유역설 등이 있는데, 낙랑군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갔다는 설명이 맞는 듯하다.

    ‘사기’ 조선전(朝鮮傳)에 나오는 조선-한나라 전쟁 이후의 관계자 처리 결과 등을 살펴보면 한나라의 조선 원정은 사실상 실패한 전쟁이었다. 양복은 서인(庶人)이 되고,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으며, 위산과 공손수 또한 참형을 당한 것을 봐도 그렇다. 조선에서는 한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던 세력이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토착 세력의 기본 성격은 유지됐다. 한군현은 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 이 지역 토착사회에 대한 통제가 목적이었으나 토착사회의 반발에 의해 곧 축출됐으며, 존재하던 기간에도 토착사회와 병존하면서 한족 유이민(流移民)의 통치조직 겸 중계무역 기지 기능을 했다. 



    전쟁 중단 선언

    한무제는 기원전 104년 이광리로 하여금 신장의 오아시스 국가들과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를 정복하게 해 실크로드에 대한 한나라의 패권을 확립했다. 흉노 또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소강 기간에 힘입어 국력을 회복했다. 흉노는 한나라 변방 침공을 재개해 물자를 보충하고, 실크로드의 지분도 차지하고자 했다.

    무제는 남월, 조선, 서역을 정벌한 여세를 몰아 다시 흉노를 치려 했다. 기원전 99년 무제는 이광리가 이끄는 20여만의 병력을 흉노로 진격시켰다. 이광리는 10여 년간 수십 차례에 걸쳐 흉노를 공격했지만 대부분 패전했다. 기원전 90년에 벌어진 흉노군과의 전투에서 부대가 거의 전멸했으며 이광리는 흉노에 항복하고 말았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한나라의 국가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면서 무제는 기원전 89년 ‘윤대(輪臺)의 조칙’을 발표해 흉노와의 전쟁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백 범 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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