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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北 흉노, 東 조선 漢에 함께 맞서다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北 흉노, 東 조선 漢에 함께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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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遼河를 넘다

이로써 북방의 흉노와 동방의 조선은 부흥의 기회를 잡았다. 조선은 랴오허를 넘어가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 장군 진개에게 빼앗긴 영토 가운데 다링허(大陵河)와 롼허(灤河) 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위양(漁陽)과 유베이펑(右北平) 등 오늘날의 베이징 지역은 수복하지 못했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적과 유계는 황제 자리를 놓고 다퉜다. 유계의 한군(漢軍)은 형양(滎陽) 전투를 포함해 항적의 초군(楚軍)과 벌인 여러 전투에서 맥족(貊族) 등 북방 기마군단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유계는 기원전 202년 최후의 해하(垓下) 전투에서 한신(韓信)의 지원에 힘입어 항적을 자살로 몰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몽염에게 쫓겨 오르도스를 상실한 흉노의 선우(單于, 군주)는 두만(頭曼)이었다. 아버지 두만을 죽이고 선우 자리를 탈취한 묵돌(冒頓)은 흉노의 최전성 시대를 열었다. 동쪽의 동호(東胡)와 서쪽의 월지(月氏)를 정벌하고, 남쪽의 누번(樓煩)과 백양(白羊)을 합병했다. 묵돌은 영토를 세 부분으로 나눈 후 중부를 직접 다스렸으며, 수도도 중부에 뒀다. 남정(南廷)은 오르도스-음산(陰山)이었으며 북정(北庭)은 외몽골 지역으로 막북왕정이라고 했다. 동부는 산시 북부 상군(上郡) 동쪽으로 조선과 접경했으며 2인자인 좌현왕(左賢王)이 통치했다.

이렇듯 흉노가 잘나갈 때 한나라 황제가 된 유계도 흉노의 침공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계의 눈에 들어온 흉노 방어의 적임자는 한왕 신(信)이었다. 초한전쟁 때 유계를 따라다니며 군공(軍功)을 많이 세운 인물이다. 한나라는 신의 주둔지를 산시성 진양(晋陽)으로 옮겨 흉노를 막게 했다. 그전부터 신의 관할 지역은 흉노가 자주 공격해오던 위험한 곳이었는데, 신은 방어가 용이한 서북쪽의 마읍(馬邑)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원했으며 유계는 이를 허락했다.

기원전 200년 가을, 묵돌은 대군을 이끌고 마읍으로 향했다. 흉노의 선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한 것이라 이전의 산발적 공격과는 수준이 달랐다. 흉노군의 기세에 눌린 한왕 신은 묵돌에게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휴전을 이끌어내려 했다.



신이 이렇듯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을 때 한나라 군대가 신을 구출하기 위해 출전했다. 그런데 강화 목적이었다고는 하나 신이 너무 자주 흉노에 사절을 보낸 것이 문제가 됐다. 유계는 신이 흉노에 항복하려 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는데, 신은 모반 혐의로 소환돼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흉노에 투항했다. 흉노를 막기 위해 유계가 특별히 점찍은 인물이 배신했으니, 그 충격은 엄청났다.

화가 치민 한고조 유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치러 나섰다. 흉노의 묵돌은 좌현왕과 우현왕을 보내 1만여 기병을 진양까지 남하케 했는데, 유계가 이 군대를 격파했다. 흉노군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한군은 기세를 타고 그들을 쫓아 이석에서 또다시 무찔렀다. 한군은 기병을 앞세워 누번에서 흉노군을 재차 격파했다.

그러나 흉노의 잇따른 패배는 묵돌의 유인책이었다. 날씨가 추운 데다 눈비까지 내려 많은 한나라 병사가 동상에 걸렸다. 32만 한군은 주로 보병으로 이뤄졌는데, 병력은 많았지만 아직 한곳에 집결하지 못했고 추위로 지쳐 있었다.



유계와 묵돌의 전투

묵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40만 기병을 동원해 오늘날의 다퉁, 즉 평성(平城) 부근 백등산(白登山)에서 한군을 포위했다. 포위된 시간이 길어지자 식량이 바닥나 갔다. 이대로 가면 한군은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다. 유계는 묵돌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 한군은 천신만고 끝에 평성으로 철군할 수 있었다.

이후 2000년 이상 지속된 한족 농경민과 북방 유목민의 대결 구도는 바로 이 유계와 묵돌의 전투에서 출발한다. 흉노는 물자를 얻고자 한나라 변경을 유린했으며 유계가 죽고 난 다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유계의 자손들인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도 한나라는 흉노에 저자세였다.

경제 시대를 지나면서 흉노와 한나라 간 관계가 역전한다. 농경민의 엄청난 생산력이 유목민의 조직력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 문제와 경제 집권기를 거치면서 한나라의 국력은 일취월장한 반면 흉노는 기원전 174년 묵돌 선우가 사망한 이후 노상, 군신, 이치사 선우를 거치면서 약화했다.

한나라는 흉노 정벌과 관련해 ‘쉬운 문제부터 먼저 해결한다’는 선이후난(先易後難) 전략을 택했다. 고가품인 비단의 서역 수출을 증대하려면 흉노가 장악한 하서회랑 탈취 등 실크로드 확보도 필요했다.

경제를 이은 무제는 기원전 139년 신장(新疆) 이서 서역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월지(月氏)와 대흉노(對匈奴) 동맹을 체결하고자 장건(張騫)을 파견했다. 한군은 흉노군 수준의 철제 무기를 개발·보유했으며 유목민 고유의 군사 기술과 조직도 파악했다. 전쟁을 뒷받침할 재정은 생필품인 소금과 철의 전매를 통해 염출했다.

무제는 기원전 129~119년 6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이광리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게 했다. 한나라 군대가 장성을 넘어 흉노 영역으로 돌입한 것은 무제의 처남 위청(衛靑)의 부대가 처음이다.



장성을 넘어 흉노를 치다

北 흉노, 東 조선 漢에 함께 맞서다

중국 산시성 시안시 진시황릉 병마용갱. [동아일보]

무제는 기원전 129년 위청, 공손하, 공손오, 이광 등 네 장군에게 기병 1만 씩을 내주고 흉노를 공격게 했는데, 뛰어난 기동성을 갖춘 흉노군은 전쟁 초기 한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기원전 127년 흉노가 상구(上谷)와 위양에 침입해 랴오시(遼西) 태수를 살해하고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가자 한군은 반격에 나섰다. 위청 부대는 오르도스에 주둔하던 흉노군을 공격해 병사 수천 명을 사로잡고, 100여만 마리의 소와 양을 노획하는 등 흉노에 큰 손실을 입혔다. 위청은 오르도스도 점령했다. 기원전 124년에도 위청이 지휘한 3만 기병이 흉노군을 공격해 우현왕을 죽이고, 수십만 마리의 소와 양을 빼앗았다.

기원전 121년에는 곽거병이 이끈 1만 기병이 하서회랑으로 쳐들어가 흉노 병사 3만 명을 죽이고 2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해 가을 하서회랑을 통치하던 흉노 혼야왕(渾邪王)은 패전에 대한 문책이 두려워 4만여 부중(部衆)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나라는 하서회랑에서 흉노를 축출한 후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기원전 119년 한나라는 위청, 곽거병에게 각각 5만 기병을 내줘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위청은 이치사 선우를 상대로 격전을 벌여 흉노군을 격파했으며, 곽거병은 고비사막 이북 오르혼강까지 쳐들어가 흉노 병사 7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치사가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 개선을 제의하자 한나라는 한-흉노 관계를 군신관계로 전환하고, 선우를 외신(外臣)으로 격하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격분한 이치사는 화친을 포기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한나라도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마(戰馬) 상실이 격심했다. 전마 14만 필 중 3만 필만 수습했다. 무엇보다도 식량 공급 및 수송이 어려웠다. 원정 일수를 300일로 가정하면 군사 1인당 360㎏의 식량과 400㎏에 달하는 수송용 소의 여물을 운반해야 했기에 흉노 정벌전이 100일을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때로는 완전 격파를 눈앞에 두고도 포기해야 했다. 이런 사정 탓에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이 출정한 후 20년간 한과 흉노 사이에 대규모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곽거병은 하서전역(河西戰役)에서 하서회랑을 다스리던 흉노 휴도왕의 왕비와 14세의 왕자를 포로로 잡았다. 장안으로 잡혀와 마구간 노예로 전락한 왕자는 우연히 무제의 눈에 들어 노예에서 풀려나 마감(馬監)으로 임명됐으며, ‘김일제(金日磾)’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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