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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근원은 놔두고 가지만 쳤으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외척

  • 이규옥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근원은 놔두고 가지만 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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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췌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둘러싼 잡음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친인척 비리다.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처럼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아무래도 집안 단속부터 제대로 해야 하는 모양이다. 조선에서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왕실의 친척인 종친(宗親)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도록 규정했지만, 왕실의 인척인 외척(外戚)의 정치 참여에는 별다른 제약을 두지 않았는데, 이것이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중종은 정비(正妃)에게서 아들 둘을 낳았다.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 인종(仁宗)과 후비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 즉 명종이다. 어머니가 없는 외로운 처지의 세자와 어머니의 든든한 뒷받침을 받고 있는 경원대군은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겪는다. 이로 인해 세자의 외숙인 윤임 일파와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로·윤원형 일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윤임 일파인 대윤(大尹)과 윤원로·윤원형 일파인 소윤(小尹)으로 조정이 양분됐다.

왕후와 신하들의 기싸움




중종이 죽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자 대윤이 득세했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면서 왕위는 아우인 경원대군, 즉 명종(明宗)에게 돌아갔고, 겨우 12세인 명종을 대신해 모후인 문정왕후가 실질적으로 정사를 보게 됐다. 그런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첫날부터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대신들과의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명종이 즉위한 다음 날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이 문안한 자리에서 문정왕후는 이렇게 말했다.



“미망인이 덕이 없고 박복해 거듭 큰 변고를 당했으니 그저 통곡할 따름입니다. 이제 주상이 어린 나이로 보위를 이었으니 국가의 대사를 처리하는 것은 오직 대신들만 믿겠습니다. 또한 지난날 근거 없는 낭설을 유포하는 무리들이 간사한 말을 지어내어 나라를 어지럽히려 했으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또다시 이런 간사한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낭설에 대해서는 주상께서 털끝만한 사심도 없이 모두 씻어내고 힘껏 민심을 안정시켜 조정을 평안하게 하려 하시니, 대신들도 이러한 뜻을 알아서 민심을 진정시키고 충성을 다해 나랏일을 돕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명종실록 즉위년 7월 7일)

윤원로가 세자와 경원대군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세자가 경원대군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지어냈다는 소문이 중종 때부터 있어왔다. 문정왕후는 당시 조정을 장악한 대윤 쪽 신하들이 왕위가 교체되는 혼란한 상황을 틈타 그 소문을 근거로 윤원로를 처벌하려 하는 움직임을 눈치챘다. 그래서 미리 그 소문을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함으로써 윤원로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정을 총괄하던 윤인경과 유관은 문정왕후의 뜻에 따르지 않고 윤원로를 처벌해 먼 곳으로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기시 첨정 윤원로는 성품이 흉악하고 마음이 교활한 자로서 대비를 믿고 날마다 유언비어 만들기를 일삼아 형제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셨으니 시작이 바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조정 신하들이 모두 ‘이 사람을 없애지 않으면 반드시 성상을 현혹시키고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혀 마침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지난 두 선왕 때 죄를 지었으니 문정왕후께서도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시면 안 됩니다.”(명종실록 즉위년 7월 7일)

어린 아들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는 첫날부터 친오빠를 귀양 보내라는 조정 대신의 요구는 대비의 처지에서 보면 나라를 위한 충정이 아니라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모후(母后)가 어린 임금을 옹립해 국가의 형세가 매우 위태로운 때에 유관은 대신으로서 국권을 담당했다. 그는 충직하기는 하나 식견이 부족해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윤과 소윤을 모두 내쫓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윤원로를 처리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 모습이 마치 대윤의 편을 들어 소윤을 공격하는 것 같아 보여 대비가 더욱 진노한 것이다.

-명종실록 즉위년 7월 7일



대윤과 소윤 간의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됐으니 그들을 모두 내쫓아서 난국을 타개했어야 하는데, 대윤을 방조하고 소윤만 공격해 훗날 윤원형과 같은 무리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는 날선 비판이다. 이제 막 정사에 임한 문정왕후와 조정 대신들 간의 양보할 수 없는 한판 대결을 살펴보자.

보복 정치의 빌미 제공


문정왕후 대궐 안에는 이런 말이 전혀 없었는데 선왕이 승하한 지 겨우 7일 만에 조정에서 이렇게 아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윤원로가 형편없는 인물이기는 하나 소문의 출처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처벌하는 것은 부실한 조치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소문의 출처를 조사해 사실로 확인된다면 귀양을 보낸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윤인경 등 절대로 소문의 출처를 조사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조사하게 되면 반드시 혼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대비마마의 가족에 대한 일을 신들이 어찌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아뢰었겠습니까.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인심이 더욱 동요하게 될 것이니 종묘사직을 위하여 흔쾌히 받아들이소서.

문정왕후 어떤 일이든지 소문의 출처를 조사하지도 않고 무거운 벌을 준다면 훗날 폐해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종묘사직의 안위(安危)와도 관계가 깊습니다. 어찌 소문의 출처도 조사해보지 않고 무거운 벌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잇따라 국상(國喪)을 당하고도 스스로 죽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또 이런 말을 들으니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윤인경 등 이 일은 조정의 신하라면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신들은 대비마마께서도 반드시 이를 염려해 기꺼이 받아들이실 것으로 여겼지, 이처럼 망설이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의심하지 마소서.

문정왕후 정승들이 굳이 이렇게까지 할 것은 없습니다. 그대들은 어찌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아뢰었겠냐고 하지만, 나라고 어찌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부하는 것이겠습니까. 정승들이 어찌 직접 들었겠습니까. 필시 전해 들은 말일 것입니다. 반드시 소문의 출처를 캐낸 뒤에야 처벌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명종실록 즉위년 7월 7일




확실하지 않으니 사실 여부를 조사한 뒤에 잘못이 있으면 처벌하자는 문정왕후와 조사할 것 없이 처벌하자는 대신들이 팽팽한 기세로 맞서고 있다. 국상 중임에도 의정부, 육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에서는 연일 윤원로를 귀양 보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사흘 뒤 문정왕후는 조정 신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윤원로를 해남에 유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외척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외척의 전횡이 더욱 심해져 후일 윤원형이 조정을 어지럽히며 보복 정치를 일삼는 빌미를 제공하고야 말았다. 사관의 평론처럼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지 못하고 가지만 쳐냈기 때문이다.


정사룡의 과거시험 부정행위_자리나 채우는 신하는 필요 없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미국 대통령도 여러 차례 언급할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시대의 과거 제도가 이 같은 교육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능력 있는 인재에게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줬다는 측면에서 당시 과거 시험은 매우 선진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인재 선발이라는 과거 제도의 본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의 공정성이 전제돼야 한다.

과거 시험을 공정하게 치르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많았다. 부자,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 한곳에서 시험을 치르지 못하도록 시험장을 나누어 운영했고, 가까운 친척이 응시했을 경우엔 시관(試官)으로 임명하지 않는 규정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험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부정행위에 대해서도 치밀한 대책을 마련했고,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응시 자격을 박탈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등 엄하게 처벌했다. 그런데도 부정행위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점점 그 수법이 교묘하고 대담해졌다.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 중 가장 공정성을 해치는 것은 출제자와 응시자가 서로 짜고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였다. 명종 13년(1558)에 일어난 사건을 보자.

파직, 급제 취소, 번복




“정사룡은 과거 시험의 문제로 낼 만한 것을 미리 발설해 유생들에게 퍼뜨리고는 자신이 시관이 되자 실제로 그것을 문제로 냈으니, 그의 심보가 참으로 고약합니다. 그를 파직하소서.”(명종실록 13년 8월 24일)

요즘도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에서는 출제자가 누구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출제자가 누구인지 알면 시험 문제의 경향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사룡은 당시 홍문관 대제학이었다. 홍문관 대제학은 국가의 문필(文筆)을 주관하는 자리이니 그가 시관이 될 것이 뻔한데, 그런 사람이 제자들에게 예상 문제를 미리 귀띔했다니 이는 사전에 문제를 유출한 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사헌부에서는 계사를 올려 정사룡을 탄핵했다. 그 결과 출제자 정사룡은 파직되고,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아 2등으로 급제한 신사헌은 급제가 취소됐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신사헌의 아들 신희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아버지의 급제 취소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시험 부정이 드러나 급제를 취소한 것만으로도 이미 시험의 공정성을 크게 손상했는데, 그것을 다시 뒤집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명종의 하교는 뜻밖이었다.

“지금 신희의 상언을 보니, 신사헌의 급제를 취소한 일은 정황이 모호한 데가 있다. 원통함을 풀어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기에 의금부에서 조사해 사실을 알아내게 했다. 경들은 그리 알고 있으라.”(명종실록 13년 12월 6일)

도대체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이 사건의 배후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명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신사헌은 이량의 심복이었다. 심복의 과거 급제가 취소되자 이량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이를 번복하도록 일을 꾸민 것이다. 예상대로 명종은 의금부의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뒤 신사헌과 정사룡이 서로 내통한 단서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신하들에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 신하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신사헌과 정사룡이 서로 내통한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형장을 치며 신문한다면 성상의 밝은 세상에 깊은 원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정사룡이 당초에 신중하고 면밀하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미 처벌을 받았으니, 이것만으로도 훗날 있을 수 있는 과거 시험의 폐단을 없애기에 충분합니다. 그들의 진술을 참작해 처리하는 것은 성상의 결단에 달렸습니다.”(명종실록 13년 12월 8일)

명종의 심중을 헤아렸는지 영의정 상진 등은 급제 취소를 번복해도 된다는 어조로 결정권을 명종에게 넘겼다. 조정 대신들에게 다시 의견을 묻자 우의정 이준경만 급제 취소를 번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 나머지 신하들은 모두 눈치만 살폈다. 결국 명종은 석 달이나 시간을 끌며 여론의 추이를 살피다가 신사헌의 급제 취소를 번복했다.

“具臣이라 할 만하다”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을 사관은 어떻게 평했을까.



신사헌의 과거 급제를 취소한 것은 당시 조정의 여론으로 결정한 것이니, 자식이 원통함을 호소한다고 하여 고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대신은 자기가 한 말을 바꿨고 대간은 그 일을 덮어두고 있다가 다시 논의해 결정한 뒤에야 나와서 간쟁했다. 이런 식으로 나랏일을 처리하면 어떻게 국정의 올바른 방침을 정할 수 있겠는가. 구신(具臣, 제 역할을 못하고 자리나 채우는 신하)이라고 할 만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공정한 도리는 오로지 과거 시험 하나에 달렸다. 그런데 전시의 책문 시험에서 간사한 술책을 부렸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정사룡이 재물을 탐내 부정을 저질렀고, 나중에는 심통원, 이량 등의 무리가 신사헌의 자제를 꼬드겨 급제 취소를 번복해달라고 상소하게 했다. 그런데 언관으로 있는 자들이 끝내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과연 나라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명종실록 15년 4월 20일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나랏일을 그르친 신하들을 비난한 것인데, 특히 상진은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으면서 급제를 취소할 때나 취소를 번복할 때 두 번 다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했기에 사관이 이렇게 비판한 것이다.

나라를 유지하는 기본은 믿음이다. 위정자가 공정함을 지키지 않고 편법과 사심으로 나라를 이끈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를 막아낼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자리를 제대로 지키는 신하’와 ‘자리나 채우는 신하’를 잘 분별해내는 데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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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옥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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